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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아 Nov 07. 2022

제가 되고 싶었던 사람은

가수였습니다. 달리 말해서 뮤지션이죠.

저는 태어났을 때 포효하는 듯, 우렁차게 울음을 터뜨려다고 합니다.

제가 갑오 일주입니다.


갑오 일주 다운 태어남이죠. 위로 18개월 연년생 오빠가 있는데 오빠는 태어났을 때 울음소리가 저처럼 크지 않았다고 하네요. 저는 이목구비도 큼직큼직해서 사람들이 다 아들인 줄 알았다고 합니다. 자주 울지는 않았어도, 한 번 울면 목이 쉬도록 울어서 엄마가 많이 걱정을 하셨다고 합니다.


저는 잠도 잘 자고, 잘 먹는 건강한 아가였답니다. 피부가 희고 깨끗해서 제가 아장아장 걸어 다니면 사람들의 반응이 "그 집 아들 피부가 참 이쁘네. 백인이네. 백인" 하셨다네요. 그러면 저희 엄마는 "우리 예쁜 공주~ " 하며 사람들을 놀라게 했답니다.


제가 어릴 때는 강변 가요제, 대학 가요제가 있었던 시절이었습니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였던 것 같아요. 이선희 가수님이 강변 가요제에서 'J에게'를 불러서 수상했고, 그 당시 티브이를 틀면 이선희 가수님이 자주 나와서 그 노래를 불렀죠. 저는 그 노래가 참 좋았습니다.


그래서 카세트테이프에 이선희 가수님의 노래를 녹음해서 가사를 받아 적고, 따라 불렀죠. 엄마는 음치였습니다. 엄마의 꿈은 오페라 가수였다고 합니다. 드레스를 입고 무대를 장악하는 오페라 가수, 그러나 엄마는 노래에 재능이 없어서 노래 잘하는 사람을 보면 부러워만 했다고 하네요.


그런 엄마에게 우렁찬 목소리의 음치가 아닌, 노래 부르기를 좋아하는 딸이 태어나서 얼마나 좋았을까요? 저는 어릴 적에 낯가림이 정말 심한 아이였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사람과 싫어하는 사람의 구분이 너무나 분명해서 좋아하는 사람을 보고는 방긋방긋 웃었지만, 싫어하는 사람은 쳐다보지도 않고 싫어하는 사람이 저를 쳐다보면 고개를 돌리고 울었다고 하네요.


지금 생각하면 좀 안타깝네요. 오빠와 제 성향이 너무 달라서 엄마는 신기했다고 하십니다. 오빠는 낯가림은 별로 없지만 잠을 안 자고, 잘 안 먹어서 엄마를 힘들게 했고, 저는 잘 자고 잘 먹지만 낯가림이 심해서 엄마를 힘들게 했다 합니다.  


저는 타고나길 아주 뚜렷한 내향형의 사람입니다. 초등학교 1학년에 입학해서 반 친구들에게 "안녕"이라는 말을 꺼내는 일이 저에게는 참 힘든 일이었습니다. 다른 아이들이 수업시간에 다 손을 들고 "저요, 저요!" 외칠 때도 저는 손을 들지 않고 가만히 있는 아이였죠.


아이러니인 건, 이렇게 조용하게 수줍음이 많고 내향형의 아이가 노래를 부를 때는 다른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어디서 그런 자신감이 나왔을까요? 엄마는 제가 노래를 부를 때마다 눈을 반짝이며, 때로는 눈시울을 붉히시기도 하고, 때로는 정말 눈물을 흘리며 제 노래를 들어주셨습니다.


엄마는 굳이 말로 "우리 딸 노래 참~ 잘하네"라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엄마의 눈빛과 눈물, 그리고 표정이 저에게 '너는 노래를 잘하는구나. 네 노래가 나를 울리네. 정말 잘한다. 우리 딸'이라는 메시지를 전달하셨고, 저는 노래를 부를 때 자유로움과 자신감을 느꼈습니다.


아빠 차를 타고 가족 여행을 갈 때 저는 라이브 가수가 되었습니다. 쉬지 않고 노래를 불렀고, 수줍음 많은 꼬마가 어떻게 그렇게 충만하게, 신나게 노래를 불렀는지 지금도 신기하네요. 초등학생에서 중학생을 거쳐, 고등학생이 되어서도 저는 대학에 가려는 이유가 대학가요제에 나가기 위해서 대학교에 꼭 진학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을 정도니까요.


초등학생 때는 클래식과 대중가요를 많이 들었습니다. 중학생이 되어서는 오페라 곡을 많이 듣고, 가벼운 팝 음악들을 듣다가, 중학교 1~2학년 때부터 네덜란드 친구 루디와 펜팔 친구를 맺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펜팔이 유행이었거든요. 손글씨로 편지를 써서 국제우편으로 일상을 공유하는 친구죠. 물론 영어실력을 늘리려고 시작한 것이었고, 저는 펜팔을 하면서 정말 영어실력이 많이 향상되었습니다.


어떨 땐 5페이지 넘겨서 편지를 쓴 적도 있으니까요. 루디는 당시에 꿈이 변호사였고, 정말 똑똑한 친구였습니다. 루디가 그때, 아마 중 2 때였던 것 같아요. Tori Amos 1집 Little Earthquakes 테이프를 소포로 저에게 보내주었습니다.  


엄청난 충격이었습니다. 중 2 소녀의 마음에 그야말로 '작은 지진'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매혹적인 목소리, 호흡, 그리고 광기 어린 창작력을 가진 뮤지션이었죠. Tori Amos를 그때부터 지금까지 늘 듣고 있습니다. 딸을 낳으면, 같이 들어야지~ 했지만, 저는 딸이 없네요.


그 이후에 마돈나를 비롯해서 주로 여성 뮤지션의 음악들, 국내 미 발매된 테이프를 소포로 보내주었습니다. 저는 테이프가 닳도록 들었습니다. 고등학교에 진학해서 너무 바빠져서 루디에게 편지 쓸 시간이 나지 않아, 자연스럽게 멀어졌습니다.


고등학교 때 같은 반 친구가 저에게 락밴드를 소개해주었습니다. 저를 록음악의 세계로 입덕 시킨 셈이죠. 듣다 보니 점점 듣는 영역이 넓어졌습니다. Bon jovi, U2, Scornpions, Roxxette, Metallica, Queen, Smashing Pumkins 등.


제가 고등학교 다니던 시절에는 주로 워크맨이라는 카세트테이프 플레이어나 CD player로 음악을 듣던 시절이라서 저는 늘 귀에 이어폰을 낀 채로 음악을 들었습니다. 고등학교 때는 스쿨버스에서 '워크맨 걸(walkman girl)'이라는 별명이 생길 정도로 늘 귀에 이어폰을 꽂고 있었으니까요.


대학만 들어가면, (그 시절에는 이 가정이 정말 모든 고등학생의 마음에 새겨져 있었을 겁니다.) 나는 대학가요제에 나간다. 그러기 위해 대학에 가야 한다. 이런 마음으로 힘든 학창 시절을 버티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과연 제가 가수만 꿈이었을까요?


그렇진 않았습니다. 저는 꿈이 많았습니다. 소설가, 시인, 영화감독도 되고 싶었습니다. 뭔가를 창작하는 일을 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지금은 정말 많은 분들이 창작을 하시지만, 제 학창 시절에는 창작하시는 분들이 많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그러나 제가 하고 싶은 것을 반대하는 분이 계셨습니다. 그분은 바로 저희 아버지셨습니다. 엄마는 제가 뭘 하든 네가 행복한 거 했으면 좋겠다, 하셨는데 저희 아버지는 매우 뚜렷한 정답을 가졌던 분입니다. 너는 행정고시를 봐야 한다. 너는 공무원이 되어야 한다. 그게 말이 됩니까? 저는 사실, 어렸을 때부터 아빠의 그런 '답정너' 식의 태도를 정말 극혐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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