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굴
어서 일어나세요. 지금 당장 일어나지 않으면 당신은 여기 갇히게 돼요.
당신은 차갑고, 서늘한 목소리에 눈을 뜨고, 앞을 응시합니다. 그런데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온통 칠흑 같은 암흑. 가만히 앉아서 호흡을 가다듬어보니 물이 똑똑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고, 오른팔을 들어봅니다. 앞으로 뻗어보니 아무것도 닿지는 않네요. 오케이, 위로 올려보니 역시 아무것도 스치는 것이 없습니다. 오른팔을 오른쪽으로 돌리니 물컹거리는 감촉이 느껴집니다. 이게 뭘까?
왼팔도 마찬가지로 해봅니다. 앞으로 뻗어보니 아무것도 닿지 않아서 오케이, 위로 올려 보니 역시 어떤 것도 스치는 것이 없네요. 왼쪽으로 뻗으니 역시 오른쪽 팔의 느낌과 동일한 물컹거리는 감촉입니다. 나는 누구인가, 여기는 어디이며, 그 목소리는 누구인가? 앉아서 바닥에 닿아있는 다리의 감촉을 가만히 느껴봅니다. 역시 팔에 와닿던 물컹거림. 이런 감각은 이전에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새로운 감각입니다.
나는 왜 이렇게 평온한가? 이 낯선 곳에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기막힌 상황에서 나는 어떻게 이렇게 평온할 수가 있는가? 말을 하고 싶지만, 소리가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마른침을 삼켜봅니다. 입술과 혀의 감촉은 느껴지고, 이빨도 가지런히 있습니다. 두 손을 포개어 봅니다. 손가락을 느껴봅니다. 그런데 손이 너무 큽니다. 이게 내 손이라고? 그러고 보니 오른손으로 왼 팔을 더듬더듬 느껴봅니다. 팔이 길고 두꺼워졌습니다.
두 손으로 다리를 만져봅니다. 두 다리가 길고, 두껍고 단단합니다. 내가 나라고 믿었었던 그 사람이 더 이상 아니네요. 머리카락은 어떻지? 수 손을 더듬더듬 목 뒤로 가져갑니다. 숱이 많은 머리가 느껴집니다. 머리가 얼마나 자란 거지? 머리카락이 허리와 엉덩이 사이까지 내려와 있습니다. 웨이브가 구불구불합니다. 역시 너무 낯섭니다.
어서 일어나요. 시간이 없어요. 두 눈을 다시 감았다가 떠보세요.
방금 전의 차갑고, 서늘한 목소리가 좀 더 날카롭게 느껴집니다. 당신은 눈을 감았다가 다시 뜹니다. 칠흑 같던 어둠 속에서 동공이 어느 정도 적응이 되었는지 희미하게 보입니다. 바닥에 닿아있던 다리를 일으켜 세워 일어납니다. 폭이 대략 80cm가 되는 좁은 길인데, 동굴처럼 좌우가 막혀 있고, 앞 뒤로는 끝없이 열려 있는 길 같습니다. 앞으로 걸어가 볼까, 하다가 망설입니다. 앞, 뒤가 무슨 소용인가? 시간이 왜 없지? 시키는 대로 했는데, 아무 일 없네? 하고, 한숨을 쉬는 찰나!
눈앞에서 번쩍이는 섬광을 느끼고, 당신은 또다시 쓰러집니다. 머리가 바닥에 내리쳐 치는 동시에 그림자 연구소 엘리베이터를 타고, 7층으로 올라갔던 일이 기억납니다. 나는 누구였던가? 그림자 연구소 이전 기억은 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립니다. 동굴 같은 어두운 길에서 느꼈던 몸과 동일한 몸인지 두 손으로 팔, 다리를 더듬어 봅니다. 동일한 몸인 것 같습니다. 머리카락은 어떨까? 역시 동일합니다.
눈을 떠보니, 많은 것들이 희미하고 어지럽게 보입니다. 어두운 곳은 아닌 것은 확실합니다. 다양한 소리들이 들립니다. 사람이 말하는 듯한 노랫소리, 피아노 소리, 드럼 소리, 기타, 베이스, 유리잔이 부딪히는 소리. 분명히 쓰러졌다고 생각했던 당신의 몸은 서 있습니다. 다시 눈을 감았다가 떠보니, 많은 사람들이 당신 앞에 앉아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