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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아 Nov 29. 2022

초등학생 때의 꿈은

작가였습니다

저는 많은 친구를 필요로 하지 않는 꼬마였습니다. 단 한 명의 친구만 있어도 괜찮은 아이였죠. 낯가림도 심하고, 수줍어하며, 사람에게 먼저 다가가지 않는 아이가 할 수 있는 일은 사람들을 관찰하는 일이었어요. '말괄량이 삐삐'와 '빨강머리 앤'을 늘 들고 다니며 읽었죠. 


일주일에 한 번, 특별활동 시간에 문예부에 들어가서 글을 썼던 기억이 나네요. 집에서 엄마에게 말할 때는 큰 목소리로 시원하게 떠드는데, 밖에 나가서는 말을 먼저 하지도 않고, 수줍어하던 기억이 나네요.


그래서 글로 마음을 전달하는 것을 편하게 생각했던 것 같아요. 입에서 말이 잘 안 나와서 쪽지로 마음을 전달하고, 일기 쓰기를 좋아했던 것 같아요. 발표는 잘 못해도 일기를 쓰면 담임 선생님의 피드백이 좋았던 것 같아요. 꾸준히 일기를 썼던 것 같고, 그때의 버릇이 지금 브런치에서 발현되는 것도 같네요. 


책도 많이 읽었던 것 같지만, 초등학교 저학년 때는 밖으로 나가서 신체활동을 많이 했던 것 같아요. 동네를 탐험하는 것을 좋아했던 것 같네요. 친한 친구 한 명과 굉장히 친하게 지냈던 기억이 나네요. 거의 매일 제가 그 친구 집에 놀러 갔던 것 같아요.


'빨강머리 앤'에서 앤과 다이애나가 했던 우정 맹세라던가, 자작나무 숲에 둘 만의 비밀공간을 만들어서 소꿉놀이하던 것을 책에서 읽고 제가 그 친구에게 같이 하자고 했죠. 그 친구는 제가 하자는 대로 잘 따라주는 친구였어서 제가 참 좋아했던 친구였죠. 


초등학교 3학년 때까지 저에게 친구란 그 친구 한 명, 그리고 5살 연상의 옆집 언니, 그리고 그냥 함께 땅따먹기, 고무줄 같이하던 동네 친구들이었네요. 소속감을 느끼는 그룹은 없었던 것 같아요.


그러다가 초등학교 4학년 때 한 4~5명 정도의 친한 무리를 만들게 되었고, 담임 선생님도 새로 막 부임한 젊고 예쁘고 친절한 여자 선생님이어서 제가 그때 참 행복했던 것 같아요. 그전까지는 담임 선생님에 대한 애정도 별로 없었는데 처음으로 선생님을 좋아했고, 친한 무리가 생겼는데 저희 아빠께서 이사를 가자고 하셨어요. 


아빠 빼고 집안 식구 모두가 반대했는데, 특히 엄마와 제가 너무 싫다고 했는데 아빠가 독불장군이어서 이사를 가게 되었어요. 세상에나~ 지금 생각해도 저희 아빠 정말 심했네요. 지금은 임금 되셨죠. 


그 당시만 해도 강남 8 학군이라는 게 있어서 강북에 사는 사람들이 자식 교육 때문에 강남으로 이사를 오는 추세여서 많은 분들이 강북에서 강남으로 이사를 왔는데, 저희 집은 거꾸로 강남에서 강북으로 이사를 갔죠. 


저는 강남구 도곡동에서 태어나서 그곳에서 10살까지 살다가 아버지의 고집으로 노원구로 이사를 가게 되었죠. 아버지의 고집의 이유가 너무 나이브해서 기가 찹니다. 새로운 주택 단지가 생기고, 도곡동 집보다 더 넓은 새 집으로 가는 게 좋다는 이유죠.


저와 엄마는 도곡동에서의 사람들과의 관계 때문에 그 사람들과의 헤어짐이 너무 힘들고, 또한 어느 바보가 강남에서 강북으로 이사를 가냐고 아무리 말해도 꿈쩍도 안 하시는 아버지. 


저는 관계가 너무 소중한 관계 지향적인 사람이었는데, 이 일을 계기로 타고난 관계지향성이 많이 뭉개지게 되었습니다. 그 절망이 제 삶에서 그렇게 큰 영향을 미치게 될지 저는 당시에는 알지 못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니 아버지는 언제나 특이하셨고, 그 특이함은 어쩌면 불안함에서 나온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 이후로 제 삶은 아버지와의 투쟁으로, 아버지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으로 많이 뒤틀리게 되었습니다. 


물론 그 전에도 저는 아버지의 폭력적인 행동에 이미 외상을 입었습니다만, 그것도 40이 넘어서 의식화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 외상 없는 인생은 없겠습니다만, 그렇다고 그것이 저에게 미치는 영향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외상을 의식화하는데 많은 에너지와 세월이 필요하다는 것을 중년의 나이가 되어서 알게되었습니다. 이것을 좀 더 일찍 알았더라면 제 삶이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을 수도 있었겠지요.   


제 아버지에 대해 글을 쓰는 일이 참 힘듭니다. 제 얼굴에 침 뱉기 같은 행위 같고, 이제 와서 아버지를 공개적으로 욕하고자 하는 마음은 추호도 없습니다. 이미 과거에 너무 많이 했었기에 오히려 죄송한 마음마저 듭니다. 


그러나 제 자신에 대한 글을 쓰는 데 있어서 이 부분을 덮고 지나가면 저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축소될 것 같아서 담담하게 쓰고자 합니다.  


제가 지금 심리치료사로 살고 있는 데 큰 역할을 하신 분이 저희 아버지이시네요. 저의 많은 심리적 증상들의 배후에는 아버지의 존재가 계셨고, 그것을 아버지도 이제 인정하는 연세가 되셨습니다.  


제가 자우림의 김윤아 님을 참 좋아하는데, 그분의 곡에 그렇게 많이 공감을 했던 이유가 아버지 상이 겹치는 부분이 있어서라는 것을 최근에야 알게 되었습니다. 물론, 그분과 제 아버지의 스타일이 많이 다르고, 폭력의 형태도 다르겠지만요. 아, 사실 이 글을 얼마 전에 쓰고 지금 올리는데 여전히 머뭇거려집니다.


계속 머뭇거릴 것만 같습니다. 그래도 계속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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