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여기에 사는 사람들

장편소설 <화니단로 여행자들> 1장, 제1화

by 산개

1장 영진



내 이름 기억해요?


폰이 내 어깨 쪽으로 자신의 몸을 밀착시키며 물었다. 나는 폰의 까슬까슬한 탈색모를 쓸어 넘기며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그럼, 폰.


폰은 엄지 손가락을 추켜올리고 의미 없이 웃었다. 폰의 입 안에서는 텁텁한 견과류 냄새가 났다.

폰의 맞은편에 앉아 있던 쌍둥이 형제 사오와 마이도 내게 자신들의 이름을 기억하냐고 물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이번에는 국적을 기억하느냐고 물어왔다.

폰은 테이블의 빈 잔 네 개를 양손의 손가락 사이사이에 끼워 넣고, 몸을 일으켰다. 폰은 테이블의 분위기가 무르익는다 싶으면 또 다른 테이블로 가서 적당히 활기를 불어넣고, 술을 채워주었다. 그게 이곳에서의 폰의 역할이었지만 폰이 임금을 제대로 받고 있는지는 미지수였다.

폰이 빈 잔에 술을 채워 흑설탕에 절인 견과류 한 움큼과 함께 가지고 우리 테이블로 돌아왔을 때 사오와 마이는 태국어로 다투기 시작했다. 나는 어쩐 일인지 배운 적 없는 태국어를 이해하고 있었다. 이곳에 처음 왔을 때도 그랬다. 폰이 다른 손님들과 태국어로 주고받는 말을 이해했다.


오늘은 돈 많은 노인네랑 한탕하러 가는 날이야.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의 성기를 입안에 넣고 와구와구 씹어 먹는 것.

폰은 그렇게 말하다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 미심쩍게 웃었다.


사오와 마이는 누가 먼저 집으로 돌아갈지를 의논했다. 한국에서 그들을 거둬 키워준 곽은 사오와 마이의 얼굴을 구별하지 못했다. 저 사오예요, 그러면 사오로 알았고, 저 마이예요, 그러면 마이로 알았다. 이번엔 마이가 집에 늦게 들어갈 차례이니 사오든 마이든 저 사오예요, 곽에게 말하고 집으로 들어가야 했다.


사오가 사오를 연기하는 게 낫지.

마이가 말했다.


아니, 마이가 사오 연기를 더 잘하잖아.

사오가 말했다.


나는 그들의 싸움을 지켜보며 누가 사오고, 누가 마이였는지 까맣게 잊어버렸다.


사장 언니는 여느 때처럼 가게 밖으로 손을 뻗어 짬지들아 어서 들어와, 영업을 하고 있었다.

가게는 가파른 오르막 중반에 위태롭게 걸려 있다. 가게의 테라스 자리에 앉으면 오르막을 올라오는 사람들의 다소 연약해진 표정을 정면으로 마주하게 됐다. 그들은 숨이 차서 헉, 헉 밭은 숨을 토해냈다. 오르막에 오를 때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은 자신의 약한 얼굴을 내심 보여주고 싶은 사람들이었다. 연기를 아래쪽으로 흘려 걸어온 흔적을 지우면서.

사장 언니가 말을 걸면 어린 여자애들은 겁을 먹고 한발 물러섰다. 사장 언니의 떡 벌어진 어깨와 근육질의 다리가 다 드러나는 꽉 끼는 수영복 차림이 문제일까, 잔뜩 취한 채 비틀거리며 윙크를 하는 게 문제일까. 언니는 도망치는 여자애들의 뒤로 바짝 쫓아가 우리 다 게이라 괜찮아, 우리 남자 좋아해, 들어와, 귓속말을 했다.

언니는 오늘은 저녁 9시부터 취해 있었다. 그는 이 가게만이 자신이 살아 있는 이유라고 말했다. 술만이 그가 살아 있는 이유라는 표현이 더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폰의 손에 이끌려 여자 둘이 가게로 들어왔다. 여자들을 보자마자 언니는 짬지들 왔네. 짬지들이 다 왔어, 하며 마시고 있던 데킬라에 새 빨대를 꽂아 그들에게 건넸다. 둘 중 긴 머리의 여자가 망설이지 않고 데킬라를 받아 마셨다. 또 다른 여자는 키가 유난히 컸고, 반삭 헤어 스타일이 돋보였다.

그녀는 옆에 멀뚱히 서 있다가 가게 안을 빠르게 훑어봤다. 때가 탄 빨간색 소파 의자와 술들이 정리되지 않고 어지럽게 나열된 바에 오래 시선이 머물렀다. 그리고 가게의 가장 바깥인 테라스, 나와 내 옆에 앉은 사오와 마이 쪽으로 시선이 옮겨왔다가 이내 빠르게 눈을 피했다.

두 여자는 빨간 소파에 나란히 앉았고, 긴 머리의 여자가 반삭의 여자의 어깨 위에 자신의 팔을 친밀하게 올려놓았다. 우리느은 막걸리로 주세요오. 긴 머리의 여자가 폰에게 말했다. 폰은 알면서도 모르는 척, 막걸리? 막걸리가 뭐예요? 물었다. 폰의 유창했던 한국어 말투가 순식간에 어눌하게 바뀌었다. 긴 머리 여자는 재밌다는 듯이 웃었고, 그 웃음은 그녀만의 특유의 에너지로 무례하지 않게 느껴졌다.


폰과 언니가 짬지들 테이블에서 노닥거리는 동안 어제도, 엊그제도, 일주일 전에도 봤던 익숙한 얼굴의 남자들이 내 앞에 하나 둘 자리를 잡고 앉았다. 국적도, 나이도 다양한 이들의 두 가지 공통점은 가난한 게이라는 것, 그리고 여기 브리즈가 아니면 갈 곳이 없다는 것이었다.


어느새 마이와 사오는 싸움을 끝내고, 둘 모두 집에 들어가지 않기로 평화로운 합의를 봤다.


반삭의 여자는 구석에 놓인 턴테이블 근처를 서성이다가 오아시스의 Morning glory LP판을 손에 쥐고, 난처해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사용법을 모르는 것 같았다. 나는 재빨리 그녀 쪽으로 다가가 LP판을 뺐듯이 가져왔다. 플레터 위에 음반을 올리고 톤암을 내렸다. 첫곡으로 champagne supernova가 지직거리며 흘러나왔다. 나는 손에 붙은 먼지를 털어내고, 그녀가 뭐라 인사를 하기도 전에 다시 내 자리로 돌아왔다.


막스는 내가 돌아오자마자 내 옆구리를 끌어안았다. 내 출렁이는 옆구리살에 막스의 뺨이 파묻혔다.

누나 나 술.

내 손짓 한번에 폰은 골든블루를 우리 테이블로 내왔다.

샴페인 슈퍼노바아아. 긴 머리 여자가 큰 소리로 노래를 따라 부르기 시작했다. 여자는 취하지도 않았는데 춤까지 출 태세였다.

폰은 그들 앞으로도 흑설탕에 절인 견과류 한웅큼을 접시에 담아 내놨다.


크히스는 화장실 바로 앞의 작은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크히스는 가게의 가장 깊숙한 안쪽인 그 자리에만 앉았다. 모두를 지켜보기에 그곳이 가장 적합하다고 말했다. 크히스는 서아프리카 출신 흑인 남자다. 서른 살까지 프랑스 남부 지역에서 살았다. 그의 이름은 크히스. 영어로 읽으면 크리스지만 프랑스어로 읽으면 크히스라고 내게 말해줬다. 프랑스인이라는 단어 또한 프랑스어로 읽으면 남자는 프헝세. 여자는 프헝세즈였다. 프렁세가 아니라 프헝세. 프렁세즈가 아니라 프헝세즈라는 R 발음이 중요했다. 그는 벨기에어와 프랑스어를 주로 썼는데 나는 배운 적 없는 그 언어들을 이해했다. 그와 자유로운 의사소통이 가능했기 때문에 그가 이곳 사람들 중 나에게만 했던 제안은 당연했다.


내가 브리즈에 처음 왔던 날이 떠오른다. 사장 언니가 나를 가게 안으로 무작정 끌어들였다. 폰은 테이블에 걸터앉아 대형 통조림 캔 안에서 견과류를 한 움큼 꺼내 입안에 밀어 넣고 있었다. 화장실 바로 앞에 있는 테이블에는 크히스가 앉아 있었다. 그의 선글라스 렌즈는 초록빛이 감돌며 반짝여서 그의 두 눈동자에서 레이저가 발사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하얗게 센 장발 머리는 가지런하게 묶여 있었다. 나는 브리즈에 처음 왔고, 그를 처음 봤지만 그가 어김없이 그 자리에 앉아 있다고 느꼈다. 그는 언제부턴가 필연적으로 그곳에 있어야 했고, 언제까지고 그곳에 있을 것처럼 보였다. 나는 바에 앉아 양주 위에 쌓인 먼지를 멀뚱히 바라봤다. 크히스는 내게 먼저 다가왔다.


오랜만에 왔지?

그가 물었다.


나는 오늘이 처음이라고 대답했다.


아닌데 너는 13년 전에도 여기 있었어.


내 옆으로 바짝 다가온 사장 언니는 크히스를 한 번 가리키고, 양손으로 자신의 눈을 가렸다. 내가 알아듣지 못했다는 표정을 짓자 언니는 한 번 더 자신의 눈을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엑스 표시를 크게 그렸다.

크히스는 맹인이었다. 크히스는 눈이 보이지 않지만 브리즈에 있는 13년 전의 나를 봤다. 나는 크히스가 정말로 나를 봤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어떻게 기억하는 거죠?

크리스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는 내 시선이 향하는 목적지를 비스듬히 피해 섰다.


너의 냄새.

그가 말했다.


크히스는 내게 일급으로 10만원을 지불했다. 나는 크히스가 브리즈에 머무는 동안 내내, 그리고 가끔은 브리즈 바깥에서까지 크히스 옆에 딱 붙어 전문적 노동력을 제공했다. 하루에 열 시간은 족히 일했으므로 시간당 만원을 받는 꼴이었으나 내가 받는 돈에 불만은 없었다. 일이 전혀 어렵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브리즈에서 사람들을 지켜보는 일을 언제까지고 지속해야 했기 때문에 꿩 먹고 알 먹는 꼴이었다. 심지어 브리즈에서 내가 마시는 술값도 모두 크히스가 내줬다. 무엇보다 크히스와 동업자가 된 듯한 기분이 좋았다. 나는 그에게 받는 돈으로 개태네 고시원 304호 방을 한 달 간 빌렸고, 그곳에서 잠을 자는 시간을 제외하면 나는 늘 브리즈에서 시간을 축냈다.

내가 그를 위해 해야 할 일은 간단했다. 브리즈에 모여드는 이들이 태국어와 영어, 독일어, 폴란드어와 한국어를 섞어 가며 떠드는 대화를 크히스에게 프랑스어로 전달해주면 됐다. 반복해서 언급하고 있지만 나는 배운 적 없는 언어를 능숙하게 구사할 수 있게 됐다. 화니단로에 온 뒤 처음으로 겪은 현상이었다.

나는 크히스의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사오와 마이는 무슨 일이 있는 거지?

크히스가 물었다.


누가 먼저 집에 들어갈지 의논했어. 그리고 둘 모두 여기 남기로 결정했어.

내가 말했다.


크히스는 프랑스에서 네 권의 소설을 출간했다. 가장 마지막에 발표한 소설로 프랑스 문학상인 페미나상을 수상하여 3000유로를 상금으로 받았고, 독자와 평단으로부터 짧은 주목을 받았다. 초판도 다 팔리지 않은 그의 전작들이 눈에 띄게 팔렸고, 그 덕분에 크히스는 마음 편히 다음 소설을 구상할 수 있었다. 크히스는 13년 전 딱 한 달 동안 머물렀던 이곳, 화니단로에서 커다란 영감을 받았다. 그 영감의 근원은 드렉 공연과 동양의 파티 문화에 있다고 내게 말해주었다. 그는 자신의 소설에 대해 그 이상을 말해주지 않았고, 만약 한국에서 이 소설을 출간하게 된다면 나에게 번역을 맡기겠노라 말할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