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딸기에 대하여

장편소설 <화니단로 여행자들> 2장, 제8화

by 산개

2장 천우


달기는 사람들에게 딸기라고 불렸다. 그런 상큼한 별명은 그녀의 이미지와 어울리지 않았다. 달기의 키는 170정도였고, 팔 다리가 유독 길었다. 머리카락은 허리 근처를 웃돌았다. 얼굴 윤곽을 따라 잘린 히메컷은 올곧게 축 늘어져 있었다. 머리카락이 얼굴을 가리고 있어 답답해 보였는데 그녀는 먹을 때나 역동적으로 연기할 때를 제외하고는 머리를 묶지 않았다. 달기는 눈두덩이에 진하게 아이라인을 그리고, 검붉은 색 셰도우를 볼 전체에 도포했다. 달기는 자신의 아름다움을 감추기 위해 화장을 하는 것 같았다. 사람들은 숨겨두었지만 빤히 보이는 그녀의 아름다움을 찾아내고 좋아했다. 달기는 이미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것 같았다.


화니단의 야시장 야외무대는 매주 수요일 늦은 8시부터 시작됐다. 달기는 별일이 없다면 늘 그 무대에 올랐고, 그래서 화니단의 모두는 달기를 알았다. 달기는 무대 위에서 홀로 대사를 읊곤 했다.


고등학생 때 내가 아닌 내가 되는 순간들이 있었어. 정신을 잃고 음식을 입안에 마구잡이로 밀어 넣어. 집 안에 있는 물건들을 다 던지고 부숴. 규칙적인 것들을 가만두지 않아. 그럼 죽은 엄마가 칼을 들고 나를 쫓아 달려와. 눈을 뜨면 모든 게 파편으로 기억나. 전부 다 게워내. 뭐가 진짜일까 생각해야 했어. 전부 다 불확실해져. 그래서 손목을 칼로 그어. 고통이 느껴지면 내가 살아있다는 사실만 명확해져.


달기는 대사를 다 읊고 난 뒤 객석을 등진 채 무대에 누웠다. 달기의 어깨가 들썩였다. 그녀가 홀로 울고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나는 다음 주에도 달기의 무대를 보기 위해 야외무대로 향했다.


정신병은 참 이상해. 증상이 명확하지 않으니까 내가 그렇다면 그렇게 돼. 내가 불안증 환자라고 일단 생각하면 그 이유는 수십 개도 넘게 찾을 수 있으니까. 정말 신기한 건 병을 앓고 있다고 믿는 순간 완전해져. 해방감 비슷한 거야. 너도 분명히 병에 걸려 있을 거야.


달기는 연기를 하고 있을까, 진짜를 말하고 있을까. 달기는 객석에 앉아 있는 나를 똑바로 내려보고 있었다. 그녀는 열 명 남짓 되는 관객들 중 나에게만 말을 걸고 있었다. 나는 그녀가 하는 말을 이해했다. 우리가 친구가 될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한 순간이었다.


그렇게 네 달 쯤 달기의 무대를 보러 갔을까. 달기는 무대를 끝낸 뒤 내게 천천히 다가왔다.


삭발 헤어스타일이 정말 멋져.


달기는 내 두피를 쓸어주며 말했다. 나는 그녀가 내 스타일을 마음에 들어할 것이라고 직감했다. 화니단로 사람들 대부분이 내 스타일을 쿨하다고 생각할 거란 사실과는 별개로, 달기는 나의 모든 걸 꽤 마음에 들어할 거라고 생각했다. 달기는 내 두피에 박힌 연꽃무늬 타투 문양도 멋지다고 말해주었다.


우리는 어색하게 마주 보고 있다가 당연하다는 듯이 브리즈로 향했다. 그곳에서 달기는 자신이 어떻게 화니단로로 거슬러 오게 되었는지 말해주었다.

달기가 화니단로에 온 건 우연히 칸을 만났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칸을 만난 건 한 VR 게임에서였다.


둘은 스페이스 45G# 공간 속에서 한 세기가 저물 동안 함께 있었다고 했다. 둘이 그곳에서 나눈 대화는 딱 한마디 뿐이었다.

게임 속 공간은 끊임없이 생성되었고, 게임에 접속하는 유저들의 숫자도 늘어났다. 시끄럽고, 복잡하고, 폭력적인 공간들에 푹 빠져 즐길 수 있었으나 달기는 늘 결국 45G#으로 돌아갔다.


그곳에는 언제나 칸이 있었다.


먹먹한 고요와 끝없는 어둠, 간혹 떠돌아다니는 우주 쓰레기와 점멸하는 망가진 우주선의 불빛.

칸은 공처럼 몸을 둥글게 말고, 망가진 우주선과 연결된 가는 끈을 손목에 묶은 채 둥둥 떠 있었다.


달기는 언젠가부터는 그 공간을 빠져나올 수 없게 됐는데 기기상의 오류 때문이었는지 그녀의 자발적인 선택이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달기는 그곳에 발이 묶인 채 눈을 감고, 뜨기를 반복했다. 먹고, 자고, 걷는 것과 같이 기본적 움직임도 없이, 그곳에서 한 세기를 그저 그렇게 흘려 보냈다.


달기는 거기 칸이 있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기기가 자동 로그아웃 된 건 한순간이었다. 현실에서의 시간은 1년이 지났을 뿐이었다. 달기는 칸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자신에게 보냈던 채팅을 기억했다.


화니단로에서 칸을 찾아.


달기는 깨어난 이후 한동안은 45G#에서의 시간 감각을 체득한 채 동굴 속에서 느리게 흘러가는 하루를 마주했다. 책을 좀 읽어보려고 해도 도저히 읽을 수 없었고, 영화조차도 볼 수 없었다. 글을 쓰는 일은 더더욱 불가능했다. 방 안이 덥든, 춥든 높은 온도로 보일러를 틀어놓고, 속옷 하나 걸치지 않은 채로 땀을 쏟으며 침대 위에 그대로 누워 있었다. 어딘가 아픈 게 분명했으나 누구도 아픈 게 맞다고 인정해주지 않았다. 몸을 일으켜 보려, 운동을 하거나 뭐라도 읽으려 시도한 뒤 전부 실패하고 나면 열패감에 절어 집 안에 있는 무엇이든 입안에 밀어 넣었다. 음식을 씹어 넘기면서 그래 무엇이든 먹는 게 어디야, 먹기라도 하는 게 어디야라고 스스로 되뇌었다. 침대에 가만히 누워 자살 사고가 들지 않도록 긴장의 끈을 놓아서는 안 됐다. 생존, 그것만이 중요했다.


사람들은 몰랐어. 내가 서울의 작고, 어둡고, 냄새 나는 자취방 안에서 얼마나 고단한 싸움을 이어나가고 있었는지.


달기는 감자튀김 하나를 여러 번에 걸쳐 잘라 먹으며 조용히 말을 이었다.


달기는 자신이 혼자이기 때문에 고통스러운 것이란 생각을 멈출 수 없었다. 그렇다면 누가 옆에 있어야 하는가, 라는 질문에는 늘 답을 하지 못하고, 칸을 그리워했다.


그래서 칸을 찾았어?

내가 물었다. 달기는 고개를 저었다.


없어. 칸은 없었어.

달기는 어깨 너머로 긴 머리를 쓸어넘기며 말했다.


달기는 화니단에 온 뒤 칸을 찾기 위해 나름대로 일상을 영위했다. 결국은 칸을 찾지 못했으나 화니단에 더 머물러야 할 이유는 충분했다.


누가 옆에 있었으면 싶을 땐 나를 불러.


나는 정말로 달기에게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다. 달기는 좋다고 웃었다. 달기는 이미 혼자서 충분해 보였다.


하지만 달기의 빈 자리를 어떻게든 찾아내 달기에게 칸과 같은 사람이 되어 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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