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 <화니단로 여행자들> 1장, 제7화
눈을 뜨면 나는 우주처럼 광활한 어둠의 공간을 떠돌고 있다. 착각이나 환영이 아니었다. 나는 그 공간에서의 감각을 온몸으로 기억한다.
바질, 다크초콜릿, 알코올 냄새가 나고, 그릇이 식기와 맞부딪치는 소리와 하루 일과를 공유하는 여러 명의 잔잔한 목소리가 겹쳐 들린다. 나른하고 기분 좋은 느낌에 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따스한 햇볕이 내 몸을 감싼다. 오렌지 나무 내음을 실은 소슬바람이 양볼에 닿는다.
다시 눈을 뜨면 여긴 그냥 내 방이다. 관점이 있는 집에서는 중학생이 된 아이들에게 각자만의 방을 선물해줬다. 13년만에 303호 나만의 방이 생겼다.
내 방이 생겼을 무렵에 해영이 나를 찾아왔던 걸로 기억한다. 어느 날 밝은 녹색 원피스를 입고 관점이 있는 집에 찾아온 해영은 내게 무언가를 자꾸 선물해줬다.
메리골드. 반드시 오고야 말 행복.
해영은 내 품에 쭈글쭈글하게 생긴 주황빛 꽃, 메리골드 다발을 안겨주고, 사라졌다.
어떤 날에는 핑크색 선풍기를 사왔다. 내 방이 너무 덥다고 말한 뒤의 일이었다.
또 다른 날에는 ‘벽으로 드나드는 남자’라는 제목의 그림책을 사왔다.
해영은 내게 그냥 오는 법이 없었다. 대단한 드라마 각본을 써서 큰 돈을 벌고 있다는 그녀가 나에게 이러는 이유를 알고 싶었다. 나는 그녀를 시험하기 시작했다. 당시의 해영과 나를 생각하면 내가 해영 옆에서 신경질을 낸 기억 밖에 없다. 정확히 화가 나는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해영에게 분노를 토했다.
해영은 종종 내게 같이 화를 냈고, 대부분은 그냥 묵묵히 짜증을 받아주었다. 그때 내가 겪은 해영은 둔한 사람이었다. 나는 그녀를 고마운 사람이라기보다는 만만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녀는 내게 확인시켜주고 싶어했다. 그게 무엇이든, 해영이 나를 자꾸 찾아오는 이유를.
네가 싫으면 할 수 없지.
말하며 뒤돌아 멀어지는 해영에게 울며 고함을 쳤던 날이 떠오른다. 관점이 있는 집에서 보냈던 시간은 듬성듬성 희미하게 기억날 뿐인데 해영과 보낸 짧은 순간들은 선명했다. 해영은 멈춰섰다. 그리고 어깨를 잔뜩 웅크린 채 라이터를 켰다. 탁, 탁. 그녀가 담배에 불을 붙이는 동안 나는 해영이 그 자리에 조금만 더 오래 서 있어 주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나를 버리지 마세요.
보육원의 아이들은 누구도 다시 버림받기를 바라지 않았다. 그 마음에 잠식당해 섣불리 누군가에게 마음을 주지도, 의지하지도 않았다. 그날은 내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해영에게 손을 내민 날이었다.
한 달 뒤 해영은 나를 금전적으로 지원해주겠다고 했다. 각종 장학재단의 지원 사업은 많았지만 해영과 같이 개인 지원자는 입양을 제외하고는 흔치 않았다. 그녀는 내게 기숙사가 있는 대안학교로의 전학을 제안했다. 나는 그녀의 말을 따랐다. 해영 덕분에 나는 관점이 있는 집을 떠나 생활할 수 있었다.
이 년 뒤 해영은 남편과 이혼을 했다. 혼자 남겨진 커다란 집에서 내가 함께 살기를 해영은 간절히 바랐다. 나는 중학교를 졸업하고, 당연한 과정처럼 해영의 집으로 짐을 옮겼다. 우리는 그렇게 함께 살게 됐다.
나는 해영을 언젠가부터 엄마라고 불렀다.
우리는 거의 매일을 싸웠다. 해영과 내가 모녀 사이라는 증명이 내게는 매순간 필요했다.
싸움을 할 땐 온전히 서로에게 집중했고, 감정의 밑바닥을 보였다. 그런 순간마다 해영이 나의 진짜 엄마처럼 느껴졌다.
나는 해영에게 의지하고 싶었다. 해영이 나를 감당하지 못하게 된다면, 그래서 나를 버리게 된다면 그건 전부 해영의 죄라고 탓하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