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 <화니단로 여행자들> 1장, 제6화
커다란 캐리어 두 개가 내 짐의 전부였다. 천우는 내 손에서 캐리어 하나를 빼앗아가 대신 끌어주었다. 천우의 집은 브리즈와도 야시장 골목과 아주 가까웠다. 우리는 집 앞에 있는 슈퍼에서 빵과 우유를 샀다. 모든 게 자연스러웠다.
천우의 집은 2층이었다. 저녁이 되면 꽤나 시끄러울 것 같았다. 천우의 집 현관문을 열면 곧바로 좁은 거실이 보였다. 거실에는 두 명이 간신히 앉을 소파와 좌식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거실 맞은편에는 두 개의 방이 나란히 있었다. 천우는 오른쪽 방을 가리켰다. 나는 그 방에 캐리어를 밀어 넣었다. 우리는 이사를 기념하며 또 다시 브리즈로 향했다.
폰은 머리가 젖은 상태로 요란하게 가게 문을 열고 들어왔다. 운동을 막 끝내고 온 모양이었다.
폰은 매일 오후 6시에 체육문화센터에서 운행하는 셔틀버스를 탄다. 20분쯤 버스를 타고, 마을 한 바퀴를 빙글 돌았다. 우사단 초등학교 앞에서 버스가 정지하면 수영복을 입고, 수영모를 달랑거리며 손에 든 아이들 여럿이 버스에 올라탔다. 열랑 마트 앞에서 버스가 멈추면 친근하게 대화를 주고받으며 세 명의 아줌마가 올라탔다. 그렇게 버스에 사람들이 하나 둘 채워지다 보면 어느새 버스는 체육문화센터에 도착해 있었다.
폰이 수영을 배우기 시작한 이유는 특별히 없었다. 그는 매일 같은 시간 해야 할 일이 필요했다. 삶의 패턴을 되찾고 싶었기 때문이다. 막 여행에서 돌아온 뒤 시차 적응을 하지 못한 사람의 생활패턴이 폰의 일상이었다. 그는 브리즈에서 일을 하며 보내는 시간과 브리즈 바깥에서 보내는 시간의 간극 사이에서 어지럼증을 느꼈다. 브리즈는 그를 현실 밖으로 밀쳐냈다.
태국에 살 때 그는 빠이에서 관광업에 종사했다. 거창하게 말하면 관광업이었지만 사실상 2박 3일간 관광객들을 데리고 트레킹 코스를 도는 일이었다. 일을 할 때도 산을 타고, 집으로 돌아갈 때도 산을 타고, 시장에 갈 때도, 번화가에 갈 때도 산을 탔다. 빠이에서 사는 동안 폰은 너무 많이 움직여서 습관적 무기력이 찾아오지 않았다. 하지만 한국에서의 갇힌 생활은 폰을 이틀에 한번 무기력의 늪에 빠지게 했다. 폰은 무작정 문화센터에 가서 매일 수강할 수 있는 강좌를 찾았다. 기타, 수영, 에어로빅, 스피닝 매일 열리는 강좌가 많았다. 폰은 그중에서도 가장 저렴한 수영 강좌를 등록했다.
도대체 오늘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
폰은 상기된 채 우리의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폰은 수영장 락커룸에서 팔과 다리 전체가 눈에 띄게 붉어진 남자를 봤다. 그는 아예 바닥에 주저앉아 온몸을 긁어대고 있었다.
도와드릴까요? 폰이 물었다.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고, 폰은 그의 맞은편에 앉아서 그의 몸을 꼼꼼히 긁어주었다. 폰은 깔끔하게 왁싱 된 그의 성기 주위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이런 건 어디서 하나요? 폰이 물었다.
바로 이것 때문에 이렇게 몸이 가려운 거예요. 그가 대답했다. 폰은 고개를 끄덕이고, 손톱을 세워 더 열심히 그의 몸을 긁어주었다.
가려움증이 나아지지 않자 남자는 폰에게 자신의 가방을 꺼내달라고 말했다. 남자는 가방 안에서 투명한 액체가 담긴 통을 꺼냈다. 그는 폰에게 통을 건넨 뒤 그것을 자신의 몸에 꼼꼼히 뿌려 달라고 말했다. 폰은 액체를 남자의 다리에 뿌렸다. 쉰 냄새 같은 게 락커룸 안에 가득 찼다. 몸에 액체가 닿자 붉은빛을 띠던 남자의 살갗에 부글부글 기포가 끓었다. 조금 뒤 남자는 몸이 전혀 가렵지 않다고 했다. 남자의 다리는 핏기 없이 허연 색이었다.
염산이 없으면 좀처럼 가려움증이 낫지를 않아. 남자가 말했다. 폰은 염산이 뭔지 알고 있었다. 사람을 죽일 수도 있는 독한 액체였다.
당신을 본적이 있어. 남자가 말했다.
그럴 리가요. 오늘이 이곳에서 수영을 한 첫날인데요. 폰이 말했다.
남자는 폰을 브리즈에서 봤다고 했다.
놀러 갈게요. 브리즈로. 남자는 폰의 귓바퀴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정말 이상한 일이지?
폰은 흑설탕 조림 견과류 통조림 캔을 땄다. 그리고 진득한 뭔가가 눌어붙은 브리즈의 탁자를 걸레로 한참동안 닦았다. 브리즈의 더러운 탁자를 누군가 닦기도 한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천우는 진토닉을 시켰다. 나는 모스코뮬 한 잔을 부탁했다. 폰과 우리뿐인 적막한 브리즈의 오후가 어색했다.
크히스는? 폰에게 물었다.
오늘은 개태랑 바다에 간대. 폰이 말했다.
천우는 크히스가 쓴 책을 읽어본 적이 있었다. 커피머신을 판촉하는 회사에 다니는 두 남자가 회사 창고에서 우쿨렐레를 발견하게 되고, 그 우쿨렐레가 말을 하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룬 소설이었다.
괴상해. 내가 말했다.
크히스와 개태가 사귄다면 개태는 크히스의 소설에 등장하겠지? 천우가 말했다.
나는 소설가들의 그런... 음흉함 같은 걸 참을 수 없어. 폰이 말했다.
브리즈랑 화니단도 크히스의 소설에 등장할지 모르지. 내가 말했다. 우리 사이에서 크히스가 공공의 적이 된 기분이었다. 하지만 크히스는 미워할 수 없는 면들이 있었다.
천우는 매일 아침 오렌지 화분에 물을 주며 하루를 시작했다. 나는 매일 아침마다 브리즈에 출근했다. 그곳에는 폰과 사장 언니, 사오와 마이, 크히스와 개태가 언제나 있었다. 그들과 함께라면 브리즈에서는 늘 새롭고, 재밌는 일들이 일어났다.
점점 칸을 잊었다. 하지만 나는 이들과 함께 하기 위해, 이들과 하루를 보내기 위해, 천우의 집에 오래 머물거란 사실을 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