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 소설 <화니단로 여행자들> 1장, 제5화
고시원에서도 짐을 뺐다. 캐리어가 두 개가 되었다. 두 개의 캐리어를 끌고, 한 달만에 브리즈에 다시 왔다.
또 왔네.
폰은 아무렇지 않게 나를 반겨주었다.
크히스에게는 더이상 내가 필요하지 않은 것 같았다.
폰은 크히스가 며칠 전부터 한국인 경호원 한 명과 함께 다니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경호원은 브리즈 내부에서조차 긴장을 놓지 않고, 크히스의 뒤에 바짝 서서 크히스를 보호했다.
나는 그 경호원을 알고 있었다. 브리즈 아래로 이어진 내리막길로 내려가면 낡은 고시텔이 나오는데, 그곳은 내가 한 달 간 머문 곳이었다. 그는 고시원의 총무로 일하던 사람이다. 그가 아마추어 복싱 선수라는 사실은 사장 언니를 통해 알게 되었다. 복싱 경기는 매달 1일에만 있었고, 한 경기를 뛸 때마다 많아야 오만원을 벌었기 때문에 그의 주된 수입원은 총무 일자리였다. 아무튼 크히스 덕분에 개태는 한동안 편하게 돈을 벌 수 있게 되었다. 그는 늘 쓰리버튼의 검정색 양복을 차려입고, 크히스를 제외한 그 누구와도 말을 섞지 않았는데 그의 직업 의식은 유난스러워 보일 정도로 투철했다.
크히스와 개태가 연인 사이일 거라고, 브리즈 안의 모두는 의심했다. 둘은 매번 서로에게 귓속말을 했고, 사랑이 가득한 눈빛으로 서로를 바라봤다. 무엇보다 크히스는 경호원이 필요할 만큼 유명인이거나 위험에 노출된 특별한 상황에 처해있지 않았다. 둘은 비좁고, 냄새 나는 화장실까지 함께 들어가곤 했다. 화장실에서 나올 때면 개태의 표정이 미세하게 들떠 보이기도 했다.
내가 없는 동안 브리즈는 여전히 굴러가고 있었네. 내 말에 폰은 고개를 끄덕였다.
매일 재밌는 일이 일어나지 않으면 브리즈가 아니지.
사장 언니는 화장실 너머에 있는 창고 문을 열어주었다. 나는 먼지 쌓인 창고 안에 내 캐리어 두 개를 밀어 넣었다.
이제 어디서 머물 계획이야?
글쎄. 며칠 간은 브리즈에서 먹고 잘 계획인데...
이년아... 사장 언니는 내 머리를 톡 때리며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는 어렵지 않게 브리즈에서 며칠간 잠을 잘 수 있게 되었다.
내가 무릎을 바닥에 대지 않고 완벽한 자세로 팔굽혀 펴기를 할 수 있게 된 날, 반삭의 여자가 브리즈에 왔다. 나는 반삭의 여자를 보고 반가운 마음이 들어 그 자리에서 엎드려 곧바로 팔굽혀 펴기를 시도했다. 대부분의 것들로부터 저항할 수 있는 안정적인 근력을 키우고 있다는 것을 그녀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그녀는 팔굽혀펴기를 하는 내게 다가와 내 뺨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나는 반삭의 여자 옆자리에 앉았다. 브리즈에 온 그녀를 반기는 내 모습이 폰 같았다. 상관없었다.
여자는 감자튀김이 나오자마자 그것을 게걸스럽게 입안에 집어넣었다. 족히 며칠은 굶은 사람처럼 보였다.
반삭의 여자는 긴 머리 여자가 말도 없이 사라졌다고 했다. 아마도 다시는 볼 일이 없을 거라고 말했다.
반삭의 여자와 긴 머리 여자는 함께 살았다. 긴 머리 여자가 짐을 빼니 집이 텅 빈 것 같았다. 반삭의 여자는 긴 머리 여자와 같이 살 때 행복했다. 죽기 전의 인간은 가장 행복하다는 세간의 말이 진실이라면 반삭의 여자는 곧 죽을 사람처럼 행복했다.
둘은 일곱 달을 함께 살았다. 찰나의 벅찬 감동을 위해 또 다시 사랑을 하고, 죽음과 같은 이별을 겪겠냐 묻는다면 그녀는 고민 없이 그렇게 하겠다 답할 것이었다. 반삭의 여자는 긴 머리 여자가 떠난 뒤 잠깐 죽어 있었다. 오늘에야 가까스로 깨어났다.
이제 다시 살아야 해.
반삭의 여자는 말했다.
감자 튀김을 다 먹은 여자는 내게 할 일이 있느냐고 물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화니화분 꽃 플라워>라는 거대한 간판이 붙은 꽃집은 화니해변 공장 지대 근처에 위치해 있었다. 여자는 분갈이흙이 필요하다고 했다. 분갈이흙은 그 종류가 다양하고, 필요 이상으로 대량으로 팔았다. 꽃집 사장은 도매만 취급하지만 특별히 소량만 판매할테니 편하게 보라고 말했다. 나는 그녀를 따라 분갈이흙 하나하나 세심하게 만져보고, 냄새를 맡고, 흙에 혓바닥을 가져가 맛을 음미했다.
여자는 파란색 오렌지가 가운데에 그려진 미니 화분 하나와 퍼라이트 분갈이흙 약간을 그곳에서 구매했다. 그녀는 주머니에서 작은 공을 꺼냈다. 그때 내가 본 것은 그녀의 손가락 네 개였다. 그녀의 손가락 하나가 사라진 건지, 원래 없었던 건지는 물을 수 없었다.
여자는 공에 붙은 흙먼지를 털어냈다. 그녀는 그것을 가만가만 애만졌다. 그녀는 새 화분 안에 퍼라이트 분갈이흙을 가득 채웠다.
보온효과가 있고, 통기성도 좋으니 공이 자라나기에 최적의 환경일 거예요. 꽃집 사장이 말했다.
여자는 손에 쥐고 있던 공을 애면글면 화분에 심었다. 그리고 흙 위에 가만히 손을 올리고 있었다. 나는 그녀의 네 개의 길고 가는 손가락을 유심히 쳐다보았다. 여자는 내 손을 끌어다 흙 위에 올렸다. 흙 위에 손을 얹고 있으니 미약한 박동이 손바닥을 타고 전해지는 것 같았다.
여자와 나는 오렌지가 그려진 화분을 품에 안고, 다시 브리즈에 돌아왔다.
여기에 뭘 키우는 거야?
내가 물었다.
대단한 공을 키우고 있어.
여자가 대답했다.
정말 소중한 공인가봐.
내가 말했다. 그녀는 내 말에 흡족하다는 듯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화니단에 살 곳이 필요하다고 했지?
반삭의 여자가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누굴 찾는다고 하던데...
반삭의 여자는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내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응.
그게 누구야?
칸.
칸?
응. 칸. 칸을 알아?
반삭의 여자는 칸이란 이름을 오래 곱씹었다. 그리고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아주 오래 길을 헤매다 집을 찾은 사람의 표정이었다. 여자의 얼굴을 제대로 본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우리 집으로 와.
반삭의 여자가 말했다. 그녀는 말을 하는 동안에도 공을 심은 화분을 양팔로 끌어안고 있었다. 그녀는 알을 품은 암탉처럼 화분을 따뜻하게 보호했다.
나는 어쩐지 그녀와 함께 살고 싶었다. 그녀는 따뜻한 사람 같았다. 그녀가 좋았다.
여자의 이름은 천우였다. 비를 품은 이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