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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살살 Feb 11. 2022

이것은 출간 블루 인가요

내 책들이 전소 된다면 좋을텐데

우체국으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죄송합니다. 고객님 우체국입니다. 남부터미널 방면으로 보내신 상품이 전소됐어요.”


나는 이전까지 죄송하다는 말로 시작하는 전화를 단 한 번도 받아본 적이 없다. 


“예? 전소요?”

“예, 고객님 죄송하다는 말씀을 먼저 드립니다.”

“그러니까 제 책이 다 불탔다고요?”

우체국 직원은 누구에게 발송하는 택배가 불탄 것인지, 내게 한 명, 한 명 그들의 이름을 일러주었다.

나는 그들의 이름을 찬찬히 받아적었다.


“고객님, 거기 들어있던 물품 가격을 좀 알 수 있을까요?”

나는 불타고 있는 책들에 대해 생각하는 중이었다. 어딘지 모를 곳을 또렷이 바라보는 여성의 옆모습이 벌건 불길에 휩싸이는 모습, 어두운 핑크빛 표지가 뜨거운 불에 닿자마자 처참하게 우그러지는 장면.

그리고 돌연 내가 보낸, 내가 만든 모든 책이 불탔다면 어땠을까 생각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그편이 조금 더 좋았겠다. 사실 간절하게 내가 만든 모든 게 불타기를 기다리는 중이었으니까.

그러니까 나는 불타 버린 내 책들은 0원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0원이라고 말하는 순간 뼈저리게 후회하고 말 거란 걸 안다. 


나는 돈에 대해 생각하느라 한참 대답을 못하고 멈춰 있었다. 이제 몇십 부의 책을 다시 제본하기 위해 인쇄소에 연락을 취해야 한다. 그리고 나름 2쇄인 책 원고의 성긴 부분을 고치기 시작할 것이다. 한번 손을 보기 시작하면 욕심이 생겨 이틀은 꼬박 원고에 파묻혀 지낼 것이다. 굿즈도 다시 제작해야 한다. 포장도 다시 해야 하는데, 그 수고로움까지 손해 배송을 해줘야 하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20만 원이요."

나는 대답했다.

"가격 증명을 부탁드려도 될까요?"

"흐음..."


나는 또 고민에 잠겼다. 내 책 가격 1,1900원과 굿즈의 가격을 증명하고, 택배 상자 안에 그것들이 몇 개씩 들어 있었는지 증명하면 될 터였다. 하지만 나는 우체국 직원의 질문은 본질적인 거라고 생각했다. 내 책에 대한 증명. 내 책의 가치에 대한 증명. 

내 책은 종이 쪼까리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중이었으니까.


책을 포장하고, 배송까지 끝낸 뒤 즉각적인 반응으로부터 회피하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세상에, 내 책을 받은 사람들에게 연락이 오기 시작한다.

세상에

돌이킬 수 없다. 

거의 울고 있는 나에게 보위는 자그마한 용기를 쥐여준다. 

"유진, 솔직히 말하자면 사람들은 너에 대한 기대가 크지 않아."


그렇다면 나는 더는 종이 낭비를 하지 않기로 한다. 불타지 않은 책을 훔쳐 아직 책을 받지 못한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것이다. 이름하여 최유진의 (사기)유료도서관.

나는 주문자들의 이름과 전화번호, 주소를 알고 있다. (주문자 중 누군가 이 글을 읽게 되면 나를 의심스럽게 보겠지만 안심하세요, 이건 모두 가상의 이야기입니다) 

나는 그들의 집에 한 곳씩 방문한다. 그들이 책을 읽고 있다면 책을 훔칠 수 없다. 밑줄이 그어져 있다거나 구겨져 있는 책도 훔칠 수 없다. 나는 그들의 책장에 아무렇게나 꽂혀 있는, 읽힐 가능성이 0에 수렴하는 깨끗한 책들만 몰래 훔친다. 

책들을 훔쳐다가 내 책을 받아보지 않은 사람들에게 보내주기로 한다. 


몇 주 뒤, 또 그들의 책장에 읽힐 가능성이 0에 수렴한 채로 꽂혀 있는 화니단로 여행자들을 발견하면 그것들을 전부 회수해 불태워 버린다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화니단로 여행자들의 핵심적인 장면은 모든 게 불타 버리는 순간이다. 불타고 있는 그 공간에서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교차하며 이야기가 겹겹이 쌓인다. 

불에 탄다는 건 있을 수도 없을 수도 있는 가능성이다. 될 수도 안 될 수도 있는 가능성. 나는 책을 다 만들고 난 뒤에야 이 모든 걸 가능성으로 남겨두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미련한 후회를 한다. 


이야기는 이렇게 끝난다. 나는 화니단로 여행자들을 한 권도 빠짐없이 찾아내서 다 불태운다. 다 불타고 마무리되는 이야기가 가장 완벽하다는 생각에 이른다. 


할머니는 책이 불에 타는 건 대박 날 징조라고 하였다. 조각가인 이모할아버지는 답장을 남기고 다시 톡방에 나타나지 않으셨다.

“예술가에게 고난은 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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