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의 네 가지 원소를 통해 알아본 '나'에 대하여
언젠가 한 글쓰기 시험장에서 이런 질문을 마주하고, 기분 좋은 고민에 잠겼던 날이 있다.
문제 1. 당신이라는 우주를 이루는 4대 원소는 무엇인가요?
시험장에서 제대로 답하지 못했던 질문에 다시 한번 답해본다.
나라는 우주를 구성하는 4대 원소는 무엇일까?
대학 새내기 시절 나는 새내기라면 능히 그러하듯 몸치장에 관심이 많았다. 도전적이고, 통통 튀는 스타일의 옷을 주로 입었는데 동기들은 매일 아침 나에게 '최유진스럽다'는 칭찬을 해주었다.
나는 칭찬에 힘입어 점점 더 도전적인 스타일을 연구했다. 빈티지 꽃 치마와 힙한 나염 가디건을 매치해 보기도 했고, 나풀나풀한 꽃 미니 원피스에 둔탁한 로퍼를 매치하기도 했다.
그것은 사실 '최유진스럽다'기보다는 각종 쇼핑몰 코디를 적절하게 믹스매치한 스타일이었다.
나는 독특하지만 "예쁜"스타일이 좋았고, 옷과 어울리는 몸을 만들기 위해 살을 빼고, 화장했다.
얼마 후 나는 이건 '최유진스럽'지 않다고 단언했다. 그날 곧바로 미용실에 가서 아프로펌 머리를 했다. 흑인 머리 질감을 내는 파마였다. 2주 뒤 내 머리카락은 그야말로 '폭탄' 맞은 듯 거대하게 부풀었고, 머리카락은 빗질조차 할 수 없을 만큼 엉켰다. 머리를 감아도 두피까지 깨끗해진 느낌이 들지 않아서 답답했다.
그 무렵 나는 아프로펌 머리스타일에 어울리는 옷을 걸쳤다. 이태원 빈티지 가게에서 구매한 옷들을 조화롭지 않게 걸쳤는데 사람들은 내 머리 스타일과 옷 스타일을 보고 종종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내 스타일은 '독특함'과 '이상함'의 경계에 있었고, 그 사이에서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일이 재미있었다.
아프로펌 머리도 지겨워진 나는 아프로펌을 풀고, 새 스타일을 도전하기로 했다. 아프로펌을 풀 수 있는 방법은 없었고, 나는 머리카락을 반삭 길이로 잘라야만 했다. 나는 짧은 머리일 때도 똑같이 치마를 입었고, 가끔 화장을 했다.
그 무렵 사람들의 시선을 더는 의식하지 않는 나를 발견했다. 그제야 나는 나의 옷차림과 머리 스타일이 어떠하든 사람들은 크게 관심을 두지 않는다는 걸 온몸으로 받아들였다. 더 자유롭게 나를 꾸밀 수 있었다. 비로소 '최유진스러워'졌다.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들은 내 스타일의 변화를 발견하고 기분 좋은 칭찬을 해주곤 한다. 요즘 친구들은 나에게 '국어 선생님' 같네, 하고 말한다. 도전적인 패션과 독특한 머리 스타일 대신 단정한 단발 머리를 유지하고, 오래 입을 수 있는 옷을 걸친다. 가방에는 아주 많은 책을 넣고 다닌다. 요즘은 이런 것이 좋다. 아마도 다음 달에는 다른 스타일이 좋아질지 모르겠다.
모든 시절의 나를 '최유진스러웠다'고 말하게 된다. 최유진의 우주를 구성하는 첫 번째 원소는 '스타일'이다.
며칠 전 새벽에는 미소의 집을 지어주었다.
미소는 빌라 '미소공간' 근처에서 자주 출몰하는 고양이다. 그는 동거인과 내가 미소공간 앞을 지나갈 때면 우리에게 달려 나와 우리의 다리에 자신의 몸을 비비며 애교를 부린다. 동거인과 나는 그를 '퐉스'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미소의 애교는 우리에게만 향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미소공간을 지나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달려들어 애교를 부리고, 면목본동의 모두에게 사랑을 받는 '퐉스' 같은 고양이였다.
하루는 새벽 산책을 하는 중 미소를 발견하였다. 손끝이 얼어 버릴 만큼 추운 날이었는데 미소가 나에게 달려왔다. 그는 나의 손의 온기에 잠시라도 기대어 있겠다는 듯 내 손에 얼굴을 부볐다. 나는 곧바로 집으로 가서 커다란 상자에 신문 여러 개와 수건을 깔고, 담요를 덮었다. 뽁뽁이로 상자를 감싼 뒤 미소를 찾아 나섰다. 미소는 나와 만났던 그 자리에 그대로 앉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미소 공간의 주차장 너머에 미소의 집을 놓아주었다. 미소는 박스를 두어 번 툭툭 치자 박스 집 안으로 폴짝 뛰어 들어갔다. 나는 미소를 쓰다듬었다. 미소는 내 손에 또 다시 얼굴을 비볐다.
언젠가 한 번, 미소에게 츄르를 줬던 날, 그는 내 뒤를 졸졸 쫓아와 우리 집 앞까지 왔다. 나는 미소에게 가라고 훠이 훠이 손짓을 했는데 미소는 움직이지 않고 그대로 서 있었다. 언젠가 나는 미소와 함께 살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날이었다.
사소한 하루들이 모여 영원이 된다. 나의 우주에는 가장 커다란 질량으로 '하루들'이 그 자리를 차지한다.
나에게는 친구가 많지 않다. 하지만 몇 없는 나의 벗들과 나는 내밀한 관계를 맺는다. 나의 친구들은 내 의식 깊이 자리 잡고 있어 내 모든 선택과 사유에 영향을 미친다.
가끔은 스쳐가는 타인과도 내밀한 관계를 맺곤 한다. 주로 '글'로 엮일 때 그러하다. 함께 글 모임을 하거나 글 선생과 학생 관계로 만날 때, 글로 소통할 때면 나는 지난한 과정을 뛰어넘어 그에 대해 아주 많은 것들을 알게 된다. 혹은 나에 대해 많은 것을 보여준다.
얼마 전에는 '당신만의 이야기를 만들어 드립니다' 프로젝트를 통해 한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익명의 그는 자신을 '니언'이라 불러달라고 했다. 니언은 구글폼에 있는 질문들에 천천히 답을 해나갔다. 당신의 키와 체형, 당신의 목소리, 당신의 옷차림, 그리고 당신의 초능력. 니언은 자신의 초능력이 '달을 걷는 꿈을 꾸기'라고 하였다.
나는 구글폼의 파편적 답변을 통해 그를 상상하고, 그에게 딱 맞는 그만을 위한 이야기를 만들어야 했다.
내가 만든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니언이 사는 달에는 친구들이 많았다. 그리고 따뜻했다. 어느날 달을 걷던 '니언'이 발을 헛디뎌 우주를 유영하게 되었다. 니언은 우주를 걷는 법을 배우기 시작했다. 우주는 춥고, 외로웠다. 니언은 눈을 감고 달을 걷는 꿈을 꾸기 시작했다. 구글폼을 통해 만난 니언은 그런 사람이었다.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 꿈속에서도 사람을 그리워하는 사람.
나도 니언과 같다. 신문 첫 면을 장식하는 끔찍한 범죄 기사, 쓰레기장이 된 지구 사진, 빙하가 다 녹아 버린 북극 사진을 마주할 때, 나를 포함한 인간들의 잔인한 면면을 마주하면서도 나는 사람이 좋다. 스쳐가는 타인과의 소통, 친구와 연인, 가족과의 대화들은 나를 구성한다. 따라서 '사람들'은 나라는 우주의 세 번째 원소다.
며칠 전 처음 들은 노래가 있다. 장희원의 <나무에 걸린 물고기>라는 음악이었다.
난 향긋하지 않은
난 푸르지 않은
난 꽉차지 않은
난
나무에 걸린 물고기구나
장희원의 목소리는 언젠가 내가 크게 좌절했던 순간을 떠올리게 하고, 그 순간의 나를 위로해준다. 나는 언젠가 또 크게 좌절할 순간을 위해 노래의 가사를 노트에 조그맣게 여러 번 적어두었다. 난 나무에 걸린 물고기구나, 난 나무에 걸린 물고기구나.
또 얼마 전에는 도마의 노래 <소녀와 화분>에 흠뻑 빠져 며칠동안 이 노래만 반복 재생해 들었다.
화분에 꽃이 웃을 만큼 맑은 날
왠지 나만 울적한 얼굴을 짓네
그때 한 소녀가 내게 친절히 다가와
슬픔을 집에 가두지 말고 풀라고 하네
슬픔은 골목 끝에서
내가 부르면 다시 다가오고
슬픔은 저기 시장통에 구경 갔다가
밥 짓는 냄새에 돌아오지
도마는 슬픔을 말하는 대신 슬픔 그 자체가 되어 노래를 부른다. 그의 목소리를 듣고 있으면 나는 슬픔을 알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나는 이 노래의 가사도 통째로 외워 버렸다. 나중에 슬픔이 오면 그에게 밥을 주고 배불리 먹은 슬픔을 기쁘게 보내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지, 그리고 배고픈 슬픔을 마중 나갈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지 다짐하며.
그밖에도 수많은 음악, 소설 속 문장들, 연극 무대의 장면들과 영화 속 장면들은 내 우주를 구성한다. 나는 위로가 필요한 순간, 극복이 필요한 순간, 사랑이 필요한 순간, 해답이 필요한 순간, 빨랫대에 잘 널어둔 나를 위한 문장 중 하나를 적절하게 찾아낸다. 그래서 나의 일상 대부분 순간, 나의 문장들이 영향을 미친다. 문장들에 기생해 나의 우주를 꾸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