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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란새 Dec 09. 2020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에서 다시 시작한다는 것

In USA,  you can be a new man. 


 낯선 나라의 공항에 내리면 긴장감과 함께 묘한 자유로움을 느낀다. 긴 비행시간 동안에 굽혀져 있던 내 무릎만큼 튀어나온 바지의 모양이나, 푸석해진 내 피부와 떡 진 머리카락 같은 것을 기꺼이 유심하게 살펴봐 주는 이는 아무도 없다. 내가 연예인도 아니고 한국에서라고 나를 알아봐 주고 말을 걸어주는 것은 아니지만, 다른 나라에서라면 우연히라도 “어머, 여기 웬일이세요? 잘 지내셨어요?” 할 만한 사람을 만날 가능성이 제로에 가까워지는 것이다. 마음은 조금 더 말랑말랑 해 지고, 행동은 조금 더 대담해진다. 약간의 긴장감과 살짝 주눅 든 마음마저도 기분 좋다. 동양에서 온 작은 여자인 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잘 몰라서) 10살은 어리게 봐준다. 게다가 우리는 지상에서 오로지 우리만 쓰는 아름다운 언어를 가지고 있지 않은가. 동행자에게 내 날것의 생각을 주변 의식하지 않고 쉽게 말할 수 있는 그 점 또한 정말 매력적이다. 나를 아는 이가 아무도 없다는 사실이 주는 자유로움은 우리가 여행을 떠나는 백가지 이유 중에 하나일지 모른다.


 미국에 오니 모든 것이 새로 시작이었다. 내 나라를 떠날 때의 나는 시간이 켜켜이 쌓인 그곳에서 somebody 였었는데, 문화와 역사가 근본적으로 다른 이 곳에서의 나는 완벽한 nobody이다. 사람이 태어나서 그냥 자기 이름 하나로만 불리고, 존재 자체만으로 만 인정받는 시기는 길지 않다. 아니 어쩌면 태어나는 순간부터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수식어는 달고 태어나는지 모른다. 살면서 켜켜이 쌓인 내 시간이 내 소속을 만들어내고, 내 이름 앞에 붙는 수식어들을 채워간다. 어떤 형용사들. 어떤 명사들. 한국에서 태어나 35년을 살면서 나도 나름 (내 본질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손쉽게 나를 설명할 수 있는 소속들이 제법 있었는데 말이다. 모든 것이 새로 시작이다. 내 이름 석자. 그마저도 성과 이름의 순서가 바뀐 낯선 이름으로 나는 불린다. 그마저도 낯선 발음으로 나를 소개한다. 한국에서라면 '하얀'이라는 나의 흔치 않은 이름을 소개하는 순간부터 처음 만나는 상대와 이야기의 시작을 트곤 했었는데 말이다. 이 곳 사람들은 내 이름이 가진 순수한 의미를 상상조차 하지 못한다. 나는 철저한 익명성 속에서 미국에 사는 제2의 수줍은 자아를 가지게 되었다. 어차피 미국은 'a new man'이 되기 위해서 모인 사람들이 만든 나라가 아닌가.


 나는 보통 적극적으로 리드하는 스타일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그림자 같은 사람은 아니었던 것 같다. 직업 특성상 사람들의 행동과 생각을 리서치하고, 많은 사람들과 커뮤니케이션해야 했으니 외향적인 성격에 가까웠다. 그런 내가 미국에 와서는 자꾸만 분위기를 파악하려고 애쓰고, 실수할까 두려워한다. 여행이 자유로웠다면, 생활은 주눅이 든다. 내 안에 이렇게 소심하고 겸손한 자아가 살고 있었는지 내 나라에 살 때는 미처 몰랐다. 물론 좋은 점도 있다.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 말이나 행동 이전에 생각을 참 많이 하게 된다. 왜 저렇게 말할까. 왜 저렇게 행동할까. 왜 이런 일들이 생겼을까. 새로 생긴 제2의 수줍은 자아는 생각을 참 많이 한다. 내가 경험하지 않은 문화와 내가 모르는 역사를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내가 당연하다고 여겼던 것들을 뒤집어서 다시 생각해보곤 한다. 자꾸만 겸손해진다


 한국에는 열심히 사는 사람들이 참 많았다. 사소한 것부터 남들과 비교하고, 남들만큼은 해야 직성이 풀리는 작고 바쁜 나라. 정도 많고 오지랖도 넓어서 서로에게 참견도 많이 해야 하는, 우리가 남이 아닌 그런 나라. 그 나라를 떠나 살게 된 미국이라는 나라는 태생적으로 '서로 다름'을 인정해야 이뤄질 수 있었던 곳이었다. 노력한다고 같아질 수 없는 수많은 조건들의 다양한 사람들이 살고 있다. 하얀 피부를 가지고 태어났는데, 노력한다고 피부색을 바꿀 수는 없지 않은가. 그리고 다 같이 비슷해 지기에는 땅이 넓어도 너무 넓다. 내가 고작 5년 미국에 살아보고 미국이 어쩌고 하고는 있지만, 사실 미국에서 태어나 자란 사람들조차도 미국에 대해서 종합적으로 이야기 하기에 이 곳은 넓어도 너무 넓다. 그래서 원한다면 얼마든지 아웃사이더로 고요하게 숨어서 계속 살아갈 수 있다철저하게 주변인으로 살게 되는 것. 물론 이 또한 시간이 지나면 의지와 상관없이 조금씩 인사이드로 들어가게 되어가겠지만 말이다.


 영어. 부끄럽게도 미국에 온 지 5년이 지났지만 나는 나를 영어로 표현하는데 여전히 매우 서툴다. 도저히 한국말을 하는 나와 영어로 말하는 나의 간극을 좁힐 수가 없다. 한국에서는 기획자, 리서쳐로 살았었으니, 나는 말로 밥 벌어먹고 살던 셈이다. 그래서 더 영어로 나를 표현하는 것이 어렵다. 회사 다닐 때, 일로 만난 미국이나 유럽 사람들과 영어로 커뮤니케이션하는 것과는 다르다. 일을 표현하는 딱딱하고 건조한 영어가 아니라, 나를 표현하는 부드럽고 풍부한 영어를 하고 싶은 말도 안 되는 욕심 때문이다.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 안 되는 게 당연하다는 내려놓기가 그렇게나 어렵다. 그리고 겪을수록 영어가 언어가 아니라 문화임을 알아가서 더 그렇다. 모난 돌이 정 맞는 한국 문화에서는 못 배운, Great America의 뻔뻔함이 내 제2의 자아에게는 아직 없다. 아니 그냥 이거도 다 핑계일지 모르고. 그냥 어렵다. 미국에 먼저 와서 15년을 살아낸 친구가 그랬다. 영어 실력은 미국 땅을 처음 밟을 때랑 달라진 게 없는데 눈치 하나는 엄청나게 늘었다고. 그러고 보면 나. 눈치는 조금 늘고 있네?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에서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한다는 것은 내 안에 나도 몰랐던 제2의 자아를 갖게 되는 것이다. 제2의 자아와 제1의 자아가 결국 만나게 될지는 두고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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