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노란새 Dec 08. 2020

내 나라에 살지 않는다는 것의 의미

가장 중요한 사람들은 의외로 생의 초반에 나타난다.


 이민 생활이 한해, 두해 넘어가니 나에게도 친구라 부를 수 있는 사람들이 대여섯 명쯤 생겼다. 주로 아이가 다니는 프리스쿨에서 오가며 만나게 된 아이 친구 엄마들이었다. 사실 아이가 친해진 친구의 엄마를 사귄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이 닿는 엄마들을 사귀고 아이들을 함께 놀리다 보니 아이들도 친구가 된 형상이었다. 생활이 단순해져서 일까. 한국에서 온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공통점 때문일까. 어렴풋이 생기기 시작한 향수병 때문일까. 20대가 된 이후에는 이렇게 친구들과 물리적으로 오래 함께인 적이 없었던 것 같았다. 우리는 아침에 아이들을 각자 내려주고 와서는 한 집에 모여 돈가스, 만두, 김치, 밑반찬들을 만들고 점심을 해 먹고, 각자의 차를 몰고 아이들을 데리러 갔다. 그리고 저녁을 먹기 위해 각자의 집으로 흩어질 때까지 공동 육아를 진행했다. 그렇게 거의 하루 종일 붙어 있었는데도, 저녁의 톡방은 또다시 시시콜콜로 쉴 틈이 없었다. 그렇게 농밀한 관계가 있어 타지 생활에 깊은 위안을 느꼈다.


 매일매일을 당연한  함께하며, 다른 나라에 살며 느끼는 크고 작은 아쉬움들을 나누던 친구들이  여름 방학을 맞이하니 뿔뿔이 흩어졌다. 누군가는 한국에서 부모님이 오셔서  주를,  누군가는 한국으로 여행을 가서  달을, 서로가 조금씩 빗겨서 일정을 잡다 보니  달은 끄떡없이 각자 바쁘게 지냈다. 그리고 개학. 약속하지 않았지만 우리는 다시 모였고, 길지 않은 공백 동안 묘하게 소원해졌다. 이상한 일이었다. 한국에서 지낼 때에도 친구들은 잘해야 1년에 한두  만나 그동안의 이야기들을 주고받으면 그만이었다. . 하면 . 하고 알아들으며, 그랬구나. 맞장구를 치며. 마치 어제 만나고 헤어진  서로가 풀어내는 이야기보따리를 따라잡는 것은 너무도 쉬운 일이었다. 미국에서 새로 사귄 친구들과 다시 만난 것은 기껏해야   만일뿐인데,  사이의 이야기들을 따라가기에 서로들 조금 버거워했다. 나중에 풀어낸 이야기지만, 한국 방문 중에 있었던 작은 일이 미국 생활에는  영향을 끼칠  있는 것이었다. 게다가 우리들은 모두 각자 다른 일정과 호흡을 가지고 미국 생활을 해내고 있었기 때문에 마음을 모두 미국에 가져오지는 않았던  같다. 누군가들은 3, 4 후에 한국으로 돌아갈 예정이었고, 누군가는 1년을 예정으로 미국에 왔다가 갑작스럽게 눌러앉은 상황이었다.  누군가들은  땅에 오래 붙어있어 보려고 영주권을 신청하고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모두가 '미국 생활' 같은 정도의 마음을 쏟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여행을  있는 사람들과 기약 없는 이민을  있는 사람들 사이에는 작은 틈도 금세 커질  있는 것이었다. 아니, 어쩌면 그건 핑계일지도 모르고. 딱히 이렇다  이유는 없었는지도 모른다.


 알고 보면 그녀들의 친구들은 대부분 한국에 살고 있다. 내 친구들도 대부분 한국에 살고 있다. 우리들은 미국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너무 소중한 친구들이었지만, 어쩌면 진짜 친구들이 되어 가는 과정이었던 것 같다. 우리가 편하게 친구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은 시간이 조금 더 쌓여있는 사람들 일지 모른다. 서로가 지금보다 훨씬 덜 단단하고, 미숙하고, 모양이 잡히지 않았던 시절에 만난 친구들. 수많은 소속을 거치며 함께 한 친구들. 서로의 발전과 실패, 꿈과 사랑을 나누며 시간을 쌓아온 친구들. 내가 아무 모양도 아니던 때에 만난 사람들은 시간이 갈수록 소중해진다. 나이가 들수록 친구라 부를만한 사람들을 만들기 어려운 것은 꼭 외국에 나와 살고 있기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자꾸만 단단해졌고, 모양이 잡혀 있었다. 그리고 나처럼 단단하게 모양이 잡혀 있는 어떤 이를 새로이 만나 서로를 알아가고, 이해하고, 좋아하고 의지하게 되는 일은 갈수록 힘들어진다. 나는 같은 공허를 느끼며 하루의 대부분을 함께 보내는 그 농밀한 관계 속에서도 어찌할 수 없는 외로움을 느꼈다. 그때의 그녀들도 마찬가지였을까? 지금 물어볼 수 있을 것 같아 다행이다.



 





 "이십 대 초반에 엄마는 삶의 어느 지점에서든 소중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어린 시절에 만난 인연들처럼 솔직하고 정직하게 대할 수 있는 얼굴들이 아직도 엄마의 인생에 많이 남아 있으리라고 막연하게 기대했다. 하지만 어떤 인연도 잃어버린 인연을 대체해줄 수 없었다. 가장 중요한 사람들은 의외로 생의 초반에 나타났다. 어느 시점이 되니 어린 시절에는 비교적 쉽게 진입할 수 있었던 관계의 첫 장조차도 제대로 넘기지 못했다. 사람들은 약속이나 한 듯 이 생의 한 시점에서 마음의 빗장을 닫아걸었다. 그리고 그 빗장 바깥에서 서로에게 절대로 상처를 입히지 않을 사람들을 만나 같이 계를 하고 부부 동반 여행을 가고 등산을 했다. 스무 살 때로는 절대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말을 주고받으면서, 그때는 뭘 모르지 않았느냐고 이야기하면서"

[출처] 언니, 나의 작은, 순애 언니 (최은영)





내 나라에 살지 않는다는 것의 의미는 생의 초반에 나타난 인생의 중요한 사람들이 대부분 내 나라에 살고 있고, 나는 외국에 살고 있는 것이다. 제일 중요한 사람들이 같이 살고 있을 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