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와 아프리카 번역기 영어
전편에서 계속됩니다...
내가 이러려고 엄마에게 알파벳을 배우기 시작해서 초/중/고, 대학, 대학원에 이어 회사를 다니는 중에도 간간히 영어 공부를 했더랬지. 릴리안 할머니의 질문에 준비된 개엄마 인상을 심어주기 위해 성심 성의껏 답장을 썼다. 사실 할머니의 죽은 아들 이야기 구간에서 이미 눈물이 터져 나와 주체할 수 없이 슬퍼했던 참이었다. 자식을 먼저 보내고 그 자식의 자식 같은 강아지를 좋은 가정에 보내주려고 애쓰는 할머니의 마음을 내가 반의 반이나 헤아릴 수 있겠는가. 그 강아지를 데려와 자식같이 키우며, 손주 사진 보여주는 느낌으로 할머니에게 자주 연락드려야겠다고 생각했다. 마음을 담은 긴 영어 메일을 쓰다 보니 그 자체에도 재미가 느껴져, 할머니를 내 미래의 펜팔로도 생각했다. 나는 이미 멀미가 날 정도로 멀리 앞서 가 있었다.
할머니도 나만큼이나 빨리 답을 보내왔다. 내 메일을 읽고 나니, 우리 가족을 강아지를 보낼 가장 우선적인 후보로 생각하게 되었다고 했다. 그리고 강아지의 사랑스러운 특징들에 대해서 한참을 열거했다. 그러더니 나를 너무 만나보고 싶은데, 본인이 꽤 멀리 있어서 내가 올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했다. 나는 미국의 거리 개념에 대해서 조금은 익힌 터라, 물론이지. 두세 시간 정도 거리쯤이야 당연히 달려가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당신의 주소를 친절하게 알려 주셨는데, 잉??????
구글맵에 할머니가 알려준 주소를 찍어보니 비행기 타고 6시간 50분만 가면 된다고 친절하게 알려 준다. 차 타고 가려면 41시간을 쉬지 않고 달려야 한다네? 나는 분명히 우리 동네 Craigslist를 보고 연락했는데, 할머니 왜 거기 가 계세요?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아들 유품 정리를 위해서 잠시 우리 동네에 와 있던 거라 하셨다. 정리를 어느 정도 끝내고 3일 전에 집으로 돌아오셨다며 나만 괜찮다면 주변에 Pets transportation company를 이용하면 된다 하셨다. 할머니와 메일을 주고받으며 계속해서 고민되었던 부분이 있었다. 개. 알. 못이지만 딱 봐도 얘들은 비쌀 것 같은 애들인데 대체 할머니가 나에게 얼마를 달라고 하실까. '아' 다르고, '어' 다른 것 같은데 자꾸만 이 강아지를 나한테 '공짜'로 보내실 것 같은 애매한 Words에 헷갈려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슬픔에 빠져 있을 할머니에게 감히 현실적인 질문을 먼저 할 수가 없었다. 할머니는 내 불순한 마음을 읽으신 듯, 긴 편지의 끝에 내가 강아지의 이동 경비만 댄다면 따로 돈을 받고 싶지 않다고 하셨다. 당신의 아들이 '오늘' 살아있다면, 아마도 이 강아지를 다른 집으로 보내지 않았을 거라고 하셨다. 주르륵.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이후 할머니와 나는 20통이 넘는 이메일을 주고받으며 세세한 강아지 이동 계획을 세웠다. 갑자기 진짜 개엄마가 될 예정인 나는 질문을 하고, 할머니는 따듯하고 세세한 답변들을 보내 주셨다. 강아지가 오기 전에 나는 무엇을 미리 준비해 둬야 하는지, 강아지는 뭘 먹고 지내는지 또 마지막으로 강아지가 병원에 다녀온 것은 언제인지, 비행기를 타고 오는 건지, 그게 가능한 건지 궁금한 것들이 너무 많았다. 할머니는 걱정하지 말라며 나를 토닥이셨고, 강아지 이동 서비스를 이용하면 $280 정도가 필요한데 거기에는 강아지 입양 승인서를 필요한 여러 가지 것들이 포함된다고 하셨다. 나는 그래도 꼼꼼하게 이것저것 단계마다 구글링을 해 가며 이게 현실적으로 가능한 일인지, 비용은 적절한지 등등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할머니는 우리 집의 주소, 입양자 이름, 가장 가까운 공항 등등 서류에 필요한 정보들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그쯤 되자 나는 새 가족이 될 강아지 사진을 틈틈이 다시 보며, 사랑에 빠져가고 있었다. 강아지가 키우고 싶다고 요구한 적도 없었던 다섯 살 딸도 너무 귀엽다며 함께 설레어하고 있었다.
며칠 안 되는 시간 동안 내가 그렇게까지 멀리멀리 갈 수 있었던 것은 대체로 정신줄을 꼭 붙들고 매사를 냉정히 판단하는 남편이 많이 아팠기 때문이었다. 평소 잘 아프지 않던 사람이 미국에 와서 처음으로 몸살을 앓고 있었다. 타이밍이란. 그는 당시 약을 먹고 잠들었다가 일어나서 죽을 먹고 다시 잠드는 일과를 며칠 째 반복하고 있었다. 나는 그 아픈 사람이 잠시 눈을 떴을 때마다 열을 올리며 내가 지금 벌이고 있는 일들을 설명했다. 그때마다 나는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던 것 같다. 그가 3일 정도 아프고 일어났을 때, 나는 이미 할머니와의 작당모의를 끝낸 뒤였다. 우리는 이제 할머니가 알아본 이동 서비스 업체에 돈을 보낸 후 강아지를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거였다. 업체는 구글링을 해보니 버젓이 홈페이지까지 갖고 있는 곳이었고, 적당해 보였다. 카드 결제가 되지 않아, 업체에서 소개한 은행에 돈을 보냈다. 그 사이 서로 확인하기 위해 업체 사장과 짧은 통화도 마친 상태였다.
이제 주사위는 던져졌고, 내일 저녁시간쯤이 되면 나는 개엄마가 된다. 할머니는 다음 날 강아지를 아침 일찍 공항에 데려갈 계획이라고 하셨다. 남편의 요청으로 우리는 강아지가 출발하기 전에 짧게 영상통화를 하기로 했다. 며칠 앓고 일어난 남편은 이것저것 꼬치꼬치 물어보다가 이내 기력이 달리는 듯 나와 딸의 설렘에 적당히 동참해주었다. 아직 뭐가 필요한지 잘 모르니 급한 대로 강아지 집과 사료 작은 것, 개 밥그릇을 사러 다녀왔다. 가족 모두 들떠 있었다. 다음 날 아침, 할머니는 예정보다 조금 일찍 강아지가 출발했다면서 3시간의 시차를 이유로 전화 대신 짧은 동영상을 첨부한 메일을 보내오셨다. 동영상의 배경은 공항의 검역 방 같은 곳이었는데, 케이지 안의 강아지를 알아보기란 쉽지 않았다. 등골이 서늘해졌다. 뭐지 이 느낌.
어차피 강아지가 도착하려면 그날 저녁 시간은 되어야 했고, 설렘에 더해진 알 수 없는 서늘한 기분은 나를 지난 며칠 간의 상황들을 돌아보게 했다. 강아지들의 사진 한 장에 사랑에 빠지고, 할머니의 슬픈 사연에 마음이 녹아버린 나의 숨 가쁜 며칠 간의 행적들. 할머니가 하필이면 왜 나를 선택했을까. 이 모든 게 너무 빨리 진행된 건 아니었나. 할머니랑 통화를 한 적이 있었던가. 할머니의 메일은 좀 딱딱한 거 아닌가. 왜 그 업체는 카드 결제를 안 해줬지. 왜 아침에 전화하신다더니 안 하셨지. 한번 의심하기 시작하니 끝도 없이 허점이 보였다. 오전 내내 찜찜한 생각들을 떨칠 수 없어서, 남동생에게 전화를 했다. 동생은 나보다 몇 년 먼저 미국으로 유학을 와서 졸업을 하고 자리를 잡아 보스턴에 살고 있던 참이었다. 그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면서 모든 것이 확실해졌다. 사기를 당한 것 같다고. 유학생 신분으로 시작했으니 동생은 여러 가지로 미국 맨 땅에 헤딩하며 자리 잡은 셈이었다. 이민 햇병아리 내 입장에서는 그 정도면 산전수전 다 겪은 선배였다. 그런 동생도 어색한 목소리로 사기가 맞는 것 같다고 했다.
나는 한 시간을 넘게 대성통곡했다. 아직 30대인 내가 70대 시골 할머니나 당할 것 같은 사기 행각에 걸려들었다. 마을회관에 모여 공짜 밥을 얻어먹고, 옥장판 하나씩 가지고 나오며 뿌듯해하는 시골 할머니와 내가 다를 것이 뭐란 말인가. 태어나서 엄마가 그렇게나 많이 우는 모습을 본 적이 없는 다섯 살 딸이 내게 와서 위로를 했다.
"엄마, 나 강아지 없어도 괜찮아."
눈물이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나 자신이 부끄럽고 싫어서 땅 속으로 들어가 영원히 나오고 싶지 않았다.
지금도 확실하게는 구별할 수 없는, 할머니의 '아' 다르고 '어' 다른 메일. 이 땅에 태어나 영어가 모국어였다면 분명히 이상하다고 생각했을 수많은 클루들이 그 속에는 숨어있을 것이다. 퉁퉁 부은 눈으로 찾아보니 할머니가 보낸 사진들의 메타 데이터들, 이동 대행업체의 홈페이지, 내가 돈을 보내준 은행(대표적인 아묻따 해외 송금 업체라 사기에 많이 이용되는 곳이었다.) 등은 모든 것이 가짜였다고 말해주고 있었다. 그럼에도 나는 마지막까지 나에게 그 공을 들여서 고작 $280을 뜯어가려고 했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 정도로 노력해서 고작 그 돈을 가져가는 거라면 사기꾼 너 인정. 따위의 자기 위안적 사고를 하며 매우 늦은 점심을 먹으러 갔다. 남편은 나의 기분을 풀어주려 노력하며, 저녁에 집으로 벽돌 한 장 배달되어 있는 거 아니냐며 놀렸다. $280짜리 벽돌 한 장. 그리고 네가 쓴 열 몇 통의 메일로 영어공부 한 셈 치자 고도했다. 그렇게 울다가 웃다가 하며 점심을 먹고 나오는데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덜덜 떨리는 마음으로 남편에게 전화기를 넘겨주었다. 주차장 한쪽 구석에서 심각하게 전화를 받던 남편이 화가 난 표정으로 돌아왔다. 강아지를 태운 비행기가 중간에 환승을 하는데, 매우 중요한 서류가 미비 상태라 다음 비행기를 탈 수 없다고 했단다. 그래서 그 서류를 마련하는데 들어가는 비용이 얼마 얼마... 대놓고 화내는 성격이 아닌 남편은 그냥 전화를 끊었고, 이후 며칠 동안 나는 각종 모르는 번호로 걸려오는 전화에 시달렸다. 할머니가 다급하게 메일을 수차례 보낸 것은 물론이고. 결국은 마지막에 '나는 이미 경찰에 너희를 리포트했다.'라고 떨리는 목소리로 얘기하고 전화를 끊는 것으로 사건은 마무리되었다. 사실 그 전화 끊고는 갑자기 그들이 내 이름, 전화번호, 주소까지 모두 알고 있다는 사실이 소스라치게 무섭게 느껴져서 아이를 태우고 남편 회사 주차장에서 퇴근하는 남편을 기다렸던 경험은 이 부끄러운 이야기의 별책 부록이다. 릴리안 할머니는 나에게서 고작 $280을 뜯어내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 $280부터 뜯어내고 단계별로 더 뜯어내려고 했던 것이었다.
나중에 안 사실인데, 보통 이런 사기꾼들은 아프리카에 기지를 두고 활동한다네?
아프리카 번역기 영어도 구분 못해 며칠 동안 눈물을 낭비하던 나는 결국, 그때 그 강아지 꼭 닮은 다른 강아지를 가족으로 맞이하여 개엄마로 3년째 살고 있다는 부끄러운 Happy end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