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빗장을 풀고 사람들을 만나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새 관계에서 묘하게 마음이 서늘해지는 사건이 이어지니 내가 이상한 건가 싶어졌다. 과연 그 사람은 나를 배려하고, 나와의 관계를 소중히 하는 게 맞나 싶은. 그런 묘한 물음표가 쌓이니 피하는 게 맞나 싶어졌다. 시시콜콜 미묘한 일들이라서, 세상 베프 남편에게 이야기하면 핀잔만 들을 것이 뻔했다. 내 일상을 제일 많이 공유하고, 나란 인간을 적어도 20년 이상 알아온 친구에게 연락을 해서 고민 상담을 가장한 험담을 시작했다. 어쩌면 답은 정해져 있었을 대화가 한 시간 넘게 이어졌다.
나는 일련의 사건들에게 번호를 매기고, 사건의 경중을 조심스럽게 나눠서, 가장 약한 일화부터 친구에게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어우! 처음부터 너무 이상해!"
내 딴에는 친구에게 편견을 심어주지 않기 위해서 가장 덜 찜찜한 일부터 이야기하기 시작한 건데 친구의 반응은 처음부터 격하게 나의 찜찜함을 응원했다.
그러니 이런저런 사건들을 이야기할수록 이야기 속 주인공은 이상한 사람이 되어가고, 나와 내 친구의 공감대는 커져만 갔다. 1시간 20분의 긴 통화 끝에 그 관계에 너무 마음을 쓰지 않는 것으로. 약간의 거리를 두는 것으로. 사람을 만나는 것보다는 취미나 일에 마음을 쓰는 게 낫다는 것으로 결론이 나고야 말았다.
여행지의 수영장에서 이름도 성도 모르는 아이를 만나서도 친구가 될 수 있던 시절이 있었다. 엄마 친구의 딸을 몇 달 만에 만나 고작 반나절을 놀았는데도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눈물을 훔치던 시절이 있었다. 학년이 바뀔 때마다 생기던 무수한 베프 무리들과 눈물로 다음 학년을 맞이하던 시절이 있었다. 책상 서랍 속에 쌓여가던 우정의 편지들과 교환 일기가 내 보물이던 시절이 있었다. 그리고 학교와 동아리, 동호회, 심지어 조인트 미팅에서 처음 만난 사람들과도 인생을 논하며 금세 친구가 되던 시절을 지나왔다. 일로 엮여 매일을 지지고 볶던 회사 생활에서도 우정은 싹텄었다.
언제부터 나의 상식이란 게 이렇게 단단해져 버렸는지, 내 상식에서 조금만 어긋나는 사람을 만나 사소한 일만 몇 가지 겪어도 마음이 덜컹 닫혀버린다. 나도 선을 넘지 않고, 상대도 선을 넘어오지 않는다. 선을 넘고는 후회와 눈물로 사과하고 다시 단단해지는 그런 관계가 삼십 대만 해도 있었던 것 같다. 사십 대가 되고부터는 가까워질 듯하다가 서로가 영문도 모른 채로 멀어진다. 더 이상 멀어지는 이유를 서로에게 설명하지 않는다. 그리고 안전한 곳으로 돌아가 그나마 나의 상식을 알아주는 친구들에게 돌아간다. 지인들은 쌓여 가지만, '친구'는 쉽게 만들지 않는다. 사실 있는 친구들도 유지하며 살기가 녹록지 않다.
'끼리끼리'는 과학이라는데, 결국 나는 오늘도 상식이 가장 많이 겹쳐서 끼리끼리 같은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는 '친구'에게 정해진 답을 듣고야 말았던 건 아닐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나의 친구'라는 이름표가 붙인 자리들에는 나의 상식으로 이해하며 좋아할 수 있는 사람들을 놓고 싶다.
그리고 그들에게 이해받고 사랑받고 싶다.
비록 그게 끼리끼리라 할지라도.
'끼리끼리'가 과학이라면 아마도 나같은 어른들을 위한 편안한 과학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