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동아이의 답을 듣기도 전에 부모의 욕심은 커져만 갑니다.
삼 남매의 우애는 유난한 편이었다.
강의 북쪽과 남쪽에 흩어져서 대학을 다니고 있던 시절에도 우리는 오후가 되면 서로의 위치를 파악하곤 했다. 그리고 그중 가운데쯤에 모여 지하철을 함께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서로의 연애 상대가 함께 있으면 그 또한 함께 만나서 오후의 한 자락을 함께 보내곤 했다.
우리는 대가족에 걸맞게 방이 많은 집에 살고 있었지만 돌아가신 할머니가 남겨주신 아주 작은 텔레비전이 있는 내 방에 모여 함께 텔레비전을 보며 뒹굴곤 했다.
철이 들고나서부터 부모님께 늘 가장 감사하게 생각한 것은 두 동생을 낳아주신 것이었다.
실상 여동생과는 어렸을 때부터 죽도록 싸워댔다.
내 몫은 치열하게 지키던 자비 없는 내 성격과 어디 가서도 뒤지지 않았던 동생의 어마어마한 고집은 매일매일 무력 충돌이 일어나기에 최적의 조건이었다.
중학교 때였던가. 여느 날처럼 한 마디도 서로 지지 않으며 죽일 듯이 싸우는 여동생과 나에게 엄마가 비장하게 말씀하셨다.
"이제부터 아무도 숨 쉬지 마! 그냥 우리 셋이 같이 영원히 숨을 참자"
내 배에서 나온 두 사람이 서로를 잡아먹을 듯이 싸우는 광경이 엄마에게 얼마나 힘든 일이었을지 그때는 알지 못했다.
그런 동생이 고등학교 때 홀연히 유학을 떠나고, 사실은 적군이 아니라 동지가 사라졌음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남동생에게는 크게 관심이 없었다.
Oops baby로 7년 터울을 가지고 태어난 그 아이는 동생이 아니라 내가 키우지 않는 내 아이 같았다. 내가 중학교에 진학했을 때 동생은 초등학교 입학 전이었고, 내가 대학생이 되었을 때에는 초등학생이었다. 늘 부족한 점이 보였고, 한없이 어리게 느껴졌던 남동생과는 여렸을 때 이렇다 할 추억이 많지 않았다.
그 애가 나름 듬직해진 것은 늦게 태어난 것을 만회라도 할 태세로 남들보다 2년 먼저 대학에 입학한 후부터였다. 간신히 막내와 대학을 같은 시기에 다니는 것은 면했지만, 사회 초년생이나 대학 신입생은 서로 통하는 것이 많았다. 억지로 귀가 시간과 귀갓길을 맞추며 유별난 우애를 발휘했던 것도 아마 그쯤부터였다.
가족이 남보다 못한 경우도 많다지만 나에게 있어 가족이란, 동생들이란 내 든든한 지원군이다.
살다가 혹시 내가 벼랑 끝에 몰렸을 때, 내 손을 잡아줄 사람이 세상에 제법 여러 명 있는 셈이니 그걸 생각하면 마음이 참 뻐근하게 뿌듯하다. 상상하기도 싫지만 언젠가 부모님이 더 이상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때에도 나와 피를 나눈 형제들이 그분들을 기억하고 함께 그리워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벌써부터 위안이 된다.
내 아이는 외동이다.
아이의 돌이 지난 후 1년 동안은 치열하게 고민을 했다. 내가 부모님께 제일 감사한 것을 아이에게 줘야 하나 말아야 하나. 안 그래도 4년을 노력해서 귀하게 찾아온 아이였다. 얼마나 큰 의미인지 모르고 마냥 삶의 정상 범주에 들고 싶어서 원했던 아이였다.
세상 모든 것을 아이에게 줄 수 있다고 해도 더 주고 싶은 게 내 마음이었다. 그중에서도 제일 주고 싶은 건 나와 남편의 무한한 사랑이었다.
아이가 둘이 된다고 해서 사랑이 반으로 줄어드는 것은 아니지만, 나 자신과 남편의 몫도 충분히 남겨놓고 싶었다. 그래서 아이의 독립적인 모습, 6개월에 혼자 앉아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20분,을 확대 해석하며 동생에 대한 생각을 접었다.
인류 최초의 살인 이야기는 카인과 아벨이라는 형제가 주인공이다.
형제자매는 한 부모의 재화와 재능을 나눠서 물려받는 대상이다. 부모의 사랑을 놓고 평생을 경쟁해야 하는 관계이기도 하다. 유전자 몰빵이라고 형제, 자매가 지나치게 잘나서 평생 그의 그늘에서 살아가는 사람들도 많다. 부모가 아무리 그러지 않으려고 노력해도 '평생을 비교하며' 키워내는 것이 그들에게서 나온 자식들이다.
서로가 없는 세상은 상상할 수도 없고 서로에 대한 사랑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지만, 우리 세 사람은 모두 '혹시 내가 외동이었다면' 가능했을지 모르는 수많은 기회들에 대해서 한 번쯤은 생각해본 적이 있다. 자라면서도 앞으로도 무엇이든 1/3로 나눠야만 한다.
그렇게나 서로 죽일 듯이 싸웠다고 하지만, 여동생과 나는 평생의 둘도 없는 친구였다. 특히 부모님께 함께 혼났을 때나 부모님의 부부싸움을 바라볼 때는 아군도 그런 아군이 없었다.
지금도 부모님에 대한 걱정이나 감사, 결정이나 판단을 하는 때는 삼 남매가 가장 똘똘 뭉쳐지는 순간이다.
언젠가 우리 부부가 왔던 곳으로 돌아갈 때.
혼자 남겨질 아이를 생각하면 마음이 미어질 때가 있다.
외동아이를 키우기로 결정한 후에 후회를 마음에 품은 적이 거의 없다. 혹시 동생이 있었다면 상상해 본 적은 있겠지만, 내 결정에 아쉬움과 후회를 담아 시간을 되돌리고 싶었던 순간은 아직 없었다.
하지만 영화나 드라마에서 부모의 장례식에 마음 아파하는 자식을 볼 때면, 미래에 내 새끼 마음이 미어질까 봐 내 가슴은 찢어지는 느낌이 든다.
그래서 내 안의 부모 욕심은 원대하다.
혼자서도 단단한 아이가 되었으면 한다.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혼자서도 뭐든지 할 수 있고,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서도 즐거울 수 있는 사람이면 좋겠다. 누군가 항상 옆에 있어야만 하는 사람에게는 꼭 초라한 순간이 찾아온다. 누군가 항상. 옆에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모든 것을 초월하는 절대 선과 힘에 대한 믿음이 있었으면 좋겠다.
서류상으로 10년은 족히 냉담하며 1년에 한두 번 찾아갔던 성당에 최근 다시 나가기 시작했다. 이번에도 자연스러운 끌림이 있었지만, 아마도 나는 아이를 생각하지 않았을까 싶다. 빈약한 뿌리로 아직은 남의 나라도 내 나라도 아닌 느낌으로 이곳에 살고 있으니 더 늦기 전에 내 땅을 찾아주고 싶었다.
아마도 이 모든 내 바람을 읽으시고 그분께서 우리 가족을 다시 품으로 불러주신 게 맞는 거겠지.
좋은 배우자와 평생의 친구를 딱 한 명이라도 만나면 좋겠다.
많을 필요도 없다.
나의 바닥까지도 기꺼이 보여주고 위로받을 수 있는 존재.
좋은 일이 있을 때 축하받고, 그의 좋은 일을 진심으로 축하할 수 있는 친구.
엄마와 아빠에게는 할 수 없는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이 늘 곁에 한 명은 있으면 좋겠다.
평생 가져갈 마음 둘 취미가 있으면 좋겠다.
무아지경으로 시간을 보내고, 그 시간만큼 위로를 얻을 수 있는 나만의 힐링처.
지금은 그게 아이에게 책 읽기 인 것 같다. 밖에서 하는 취미도 하나쯤 가졌으면 싶어서 이것저것 시켜보며 엄마의 욕심 펼치는 중이다.
쓰고 보니 이건 꼭 외동이 아니더라도 모든 사람들의 삶에 있으면 좋을 바람들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아이에게 형제가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라 그냥 자식에 대한 기도 같은 것이네.
내 바람과는 상관없이 아이도 언젠가 나에게 고마운 일이 생길 것이다. 그게 꼭 '동생들을 낳아 주신 것'일 필요는 없는 것이, '가장' 고마운 것은 내가 그녀에게 미칠 다른 어떤 영향도 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동생들이 없다면 다른 무엇인가가 '가장' 고마울 테지.
내가 가보지 않은 길이라 외동아이가 부모에게 가장 고마운 것은 무엇일지 알 수 없는 일이다.
그저 나에게 '가장' 원망스러운 일이 '동생을 낳아주지 않은 것'만 아니면 좋겠다.
혹시라도 그녀가 그걸 원망으로 삼을 때쯤엔 내가 생리학적으로 동생들을 낳아줄 형편이 아니 될 테니까.
내 선택을 후회하지 않는 것은 내 몫이고 난 또 그걸 제법 잘하는 사람이다.
그럼에도 이 선택은 아이에게 미칠 영향이 너무 크네.
그럼 여기서 하나 추가.
자기가 '가진' 것을 소중히 하는 사람이 되면 좋겠는데.......
이래서 부모 욕심은 끝이 없다고 하나보다. ;(
[ 표지 사진 출처 ] https://www.baby-chick.com/the-pros-and-cons-of-having-an-only-chil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