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좋고, 물 좋고, 정자 좋은 곳

100점 만점에 98점 워킹맘

by 노란새

본의 아니게 결혼은 평균 연령에 하고, 아이는 늦게 가졌으니 내 주변엔 육아 선배들이 정말 많았다. 이렇게 힘든걸 다들 어떻게 하고 있는 거지? 내 경우엔 일과 육아 사이 양다리의 물리적인 힘듦보다는 정신적인 힘듦이 특히 어려웠던 것 같다. 진심으로 워킹맘의 삶이란 것에 의문이 들었다.

“언니는 아들 둘 낳아 기르면서, 회사 일까지 어떻게 그렇게 야무지게 잘 해내는 거예요?”

“나? 야~ 말도 마. 지금은 애들 컸으니 망정이지, 애들 어렸을 때는 난리였다. 부산에 살고 계시는 친정 엄마, 시엄마 두 분이 번갈아 가며 올라오셔서 2주씩 애들 봐주시고.. 그마저도 어려울 때면 내가 애들 싸매고 주말에 부산까지 내려가서 애들 두고 올라오고.. 미친년처럼 살았어. 그 기간 동안 내가 번 돈은 0이었어.”

“그럼 대체 **책임은 어떻게 매일 야근하면서도 잘 다닌데요?”

“걔는 입주 이모님 계시잖아.”

“자기는 애 셋인데, 어떻게 회사를 나올 수 있는 거야?”

“몰랐어? 난 회사에 쉬러. 오는 거야~ 애들은 전문가 이모님이 봐야지!”

모두 하나같이 물리적인 어려움을 타인의 시간으로 해결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회사에 나오는 이유는? 커리어, 자기 발전, 자아실현. 이런 고차원적인 욕구를 이유로 대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대부분 심플하게 돈. 그리고 육아가 적성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였다. 돈이 필요하고, 일이 차라리 쉽다는 단순하고 명쾌한 이유가 그녀들을 갈등 없이 회사에 나오게 하고 있었다.






20대에는 방황하며 지내느라 돈을 별로 벌지 못했다. 그러나 아이가 태어났을 때의 내 월급과 보너스는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S전자 M사업부. 특히 나는 복직하고 얼마지 않아 운 좋게 부서마저 ‘선행 디자인’ 조직으로 이동을 했다. 제품 출시 일정이나 실적 압박에 약간 자유로운 상태로 근미래 세상에서 돈이 될 만한 아이템을 발굴하는 폼 나는 일을 하는 곳이다. 그리고 아이는 친정 엄마가 봐주셨다. 당시 엄마는 약한 빈 둥지 증후군을 겪고 계셨고, 일 하는 딸을 모른 척할 수 없으셨던 거다. 1년만. 딱 1년 어린이집 갈 때 까지는 아이를 도맡아 봐 주시겠다 하셨다. 엄마는 주중에는 비좁은 우리 집으로 오셔서 육아와 살림을 책임져 주셨다. 거기에 비교적 시간이 여유로우신 아빠마저 본업과 육아 지원군을 병행해 주셨다. 내가 8개월까지 모유수유를 하며 오롯이 키웠음에도, 아이는 내 복직을 너무 쉽게 받아들였다. 무던하고 착한 아이였다. 아이를 맡아 키우신 지 얼마지 않아, 부모님은 번갈아가며 우리 집 앞 헬스장에 다니기 시작했다.


금요일 저녁 부모님이 집으로 돌아가시고 나면, 오롯이 우리 세 식구는 주중에 쌓인 애틋함과 감사함으로 아이와 부대끼며 행복하게 지냈다. 남편은 대한민국 평균 매우 바쁜 직장인이었지만, 오래 기다린 아이를 귀히 여겼고 가정적인 사람이었다. 그리고 아이가 두 돌이 지나면 회사 어린이집에 갈 예정이었다. 선배들의 중언에 따르면 우리 회사 어린이집에 아이가 다니기 시작하면 없던 애사심도 샘처럼 솟아나 폭발하기에 이른다고 했다. 그런 어린이집도 보내고 싶다고 보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입소 대상 어린이들을 로또를 방불케 하는 긴장된 분위기 속에서 추첨을 통해 뽑았으니 아이도 나도 운이 좋았다. 산 좋고, 물 좋고, 정자 좋은 곳은 없다지만 여기가 거기였다. 대한민국 워킹맘으로 이 정도면 객관적으로 100점 만점에 98점은 되는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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