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감은사지 동·서 삼층석탑

慶州 感恩寺址 東·西 三層石塔

by 탑돌이

해가 뉘엿뉘엿 저무는 오후에는 그림자가 아름답게 드리우는 감은사지 삼층석탑을 추천하고 싶다. 멀리서는 살짝 까맣게도 보이는 쌍둥이 탑은 앞서 지는 해를 바라보며 굳건하게 서 있다. 통일신라 신문왕 때 건립된 것으로 알려진 감은사지 삼층석탑은 원래 감은사라는 절 안에 있던 탑이었으나 다른 것들은 소실되고 탑만 남았다고 한다. 본디 왜병 진압을 위해 지은 절이기에 호국보훈의 의미가 가득하다고도 볼 수 있겠다.


감은사지 삼층석탑 근처 전경


감은사지는 경주의 다른 관광지와는 다르게 주변에는 아무것도 없다. 굳이 이것을 보러 여기까지 와야 하나 싶지만 문무대왕릉을 향하는 길에 이 감은사지가 있어서 중간에 잠깐 들르기 좋다. 탑 근처는 논밭과 가끔 들리는 개 짖는 소리가 우렁찰 뿐이다. 겨울이면 다소 황량한 이 풍경이, 노을이 질 때면 오히려 충만감으로 가득 찬 느낌을 준다. 겨울 논에는 벼도 이삭도 없지만 마치 풍작인 것처럼 황금색으로 가득 물든듯했다.


감은사지 삼층석탑


멀리서 봤을 때는 굉장히 상태가 좋아 보였는데 막상 가까이서 보니 부서진 곳이 많아서 아쉬웠다. 석탑 뒤로 보이는 나무들은 바람에 흔들릴지언정 다음 해에는 또 색색의 잎을 피우는데 반해 굳건해 보이는 돌은 풍파를 이겨내지 못한 것 같이 보였다. 괜히 아쉬운 마음이 든다.


우리나라에 남은 석탑 중에서는 가장 큰 이 탑은 신라 신문왕 때 완공되었으나, 그 형태는 백제의 탑과 유사하며 목탑 양식을 계승하고 있다고 한다. 돌 하나를 조각하여 만든 것이 아니라 여러 석재를 조립해서 완성하였다고 한다. 또한 이 탑은 쌍탑가람배치의 형태를 띠는데 가람배치(伽藍配置)란 일종의 공간 배치 및 활용 규약이다. 가람배치에 있어 중요한 것이 금당과 탑이어서 탑은 신앙뿐 아니라 사찰 전체의 배치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 감은사의 위용을 이 두 탑을 보며 상상해 보면 좋을 것 같다. 뾰족한 첨탑 또한 당시 감은사와 잘 어우러지는 미적인 한 요소였을까?


감은사지 동서 삼층석탑


굳이 이 돌들을 보러 뭐 하러 여기까지 와야 하나 싶을 때는 탑 뒤에 서서 가만히 지는 해를 바라보는 것을 추천한다. 친구처럼, 또는 가족처럼 나란히 자리한 두 탑 너머로 펼쳐지는 산 능선이 아늑하고 평화롭다. 희한하게 뻥 뚫린 동해 바다보다도 가슴이 트이는 느낌이 든다. 겨울에도 관광객들이 넘실거리는 시내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다른 지역에 온듯한 따스한 생경함이 자리한다.


문무왕은 이 절이 건립되기 전 눈을 감았는데, 유언으로 본인이 죽으면 바다의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킬 것이니 화장하여 동해에 묻어달라 하였다고 한다. 그 유지를 받들어 무덤으로 만든 곳이 문무대왕릉이고 그 은혜에 감사한다는 뜻으로 이 절의 이름을 감은사(感恩寺)로 정하였다는 설화가 전해져 내려온다. 어쩌면 내가 느꼈던 따스함도 보은의 마음에서 온 것이 아니었을지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감은사지 삼층석탑 뒤 마을


탑 근처의 작은 민가에서 개가 우렁차게 짖는다. 사람이라곤 우리뿐인데 저 먼 곳에서도 우리를 향해 짖는 걸까? 건립시기는 명확하지만 언제 무너진 것인지는 불명확한, 호국보은의 대표적인 절 감은사. 문무왕은 사후에 용이 되어 감은사의 배수로를 통해 동해에서 이곳 육지까지 왔다 갔다 할 수 있었다고 한다. 죽어서도 지키고 싶던 신라의 땅은, 천 년이 훌쩍 지난 지금도 대한민국으로 남아 있다.


국민이 없이는 국가도 없다. 문무왕 또한 이 땅을 지키고자 한 마음보다는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을 지키고 싶었을 것이다. 불안정한 시국이 지속되고 있다. 차마 위로의 말을 건네기도 어려운 참사도 있었다. 2025년에는 내가 이 나라의 국민이라는 것이 자랑스러운, 그리고 더 이상 불안으로 떨지 않을 한 해가 되었으면 좋겠다.


<참고문헌>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https://www.heritage.go.kr/)

keyword
작가의 이전글경주 분황사 모전석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