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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깥 Jul 04. 2016

나의 저널리즘 언어
'유호무문(龥呼無聞)'

유호무문(龥呼無聞)


龥 부를 유 / 呼 부를 호 / 無 없을 무 / 聞 들을 문


이 말을 처음 접한 건 커뮤니케이션이론 강의에서였다. 박승관 교수님께서 한국 사회의 소통 위기를 지적하며 언급하셨다. 뜻을 풀자면 '아무리 울부짖고 하소연해도 그 목소리가 어디에도 들리지 않는' 상황이다.


국가의 의견 체계가 절대군주 1인에게 독점적으로 장악되어 언로가 폐색됨으로써, 일반 백성들의 울부짖음과 하소연이 어디에도 들려지지 않는 ‘유호무문龥呼無聞’(율곡, 1987)의 상황도 이와 유사하다.

한국 사회와 소통의 위기: 소통의 역설과 공동체의 위기_박승관


얼마 전까지 나는 가장 큰 문제가 '무문無聞'에 있다고 생각했다. 누군가의 간절한 외침이 사회에 전달되고 들리지 않는 것, 그리고 그 '누군가'는 대체로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가 된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적, 감정적으로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들이 약자이고 소수자이기에 사회의 확성기는 그들의 목소리를 조명하지 않는다. 확성기가 닿지 않는 목소리는 널리 전달되지 못한다. 그들의 말은 소리없는 아우성이 되고, 약자와 소수자로 남을 수밖에 없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그래서 언론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주목받지 못하는 목소리에 확성기를 대어 비판과 반성, 대안적 움직임과 다양성이 사회에 흘러들게 하는 것이다.


작년 12월 초에 봤던 면접 에피소드가 떠오른다. 당시 받았던 질문 중 하나가 '최근 일주일 간 본인이 가장 주목한 이슈가 무엇이며, 뉴스 서비스로 어떻게 기획할 것인가?'였다. 다른 면접자가 앞 차례에 故 김영삼 대통령 서거를 언급했다. 나 역시 그 이슈를 소위 Top으로 올려야 한다는 것에 동의했지만 같은 대답을 할 수는 없었다.


불현듯 페이스북에서 분노하며 봤던 이슈가 떠올랐다. KTX 승무원 해고 문제 파기환송심에서 서울고등법원이 원고(KTX 승무원 측) 패소 판결을 내린 것이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당시에도 나의 상식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판결이었다. 9년 간의 긴 싸움에서 승무원들이 겪었을 고통은 이루 말할 수도 없을 것이다. 아무튼 그 순간에 '유호무문'과 이 사건이 묘하게 연결되어 떠올랐고, 면접 질문에도 답할 수 있었다.


대법원의 파기환송 결정 이후, 세 살 난 아이의 엄마였던 한 분의 해고 승무원이 세상을 떠났다. ©KTX 해고승무원 페이스북 페이지



어떤 글을 만나고 생각이 달라지다


올 초에 한겨레21 안수찬 편집장님의 글을 읽었다. 안 편집장이 사회팀장 시절 사회 기저의 빈곤과 그 악순환에 대해 취재하고 쓴 글이다.


한국에서 가난한 사람들은 투명 인간이다. 그리고 그들의 삶을 지탱하게 해주는 빈곤 노동은 투명 노동이다. 우리는 가난(한 사람)이 없는 것처럼 행동한다.


'원자화'된 빈곤의 존재감은 미미하다. 목소리를 내지 않는다.


그들은 스스로 고립되어 지낸다.


©poverty by Luis Felipe Salas @flicker


위 대목에서 나는 뒤통수를 맞은 것 같았다. 어쩌면 '유호무문'에서 본질적인 문제는 무문無聞이 아니라 유호龥呼가 이루어지지 않는 것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널리즘에 대한 사명을 잃지 않은 소수의 기자와 언론이 아직 존재한다고 믿기에 만족스럽지 않더라도 무문無聞은 조금씩 정화될 수 있다고 본다. 하지만 그 역시 힘든 상황에서도 목소리를 내고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안 편집장의 글에서처럼 만약 이 땅의 약자와 소수자가 목소리 내기를 포기한다면? 스스로 고립된다면? KTX 해고 승무원들이 매주 일요일과 월요일, 서울역과 부산역에서 하고 있는 1인 시위를 그만둔다면? 이들의 뜻을 전하는 연대가 사라진다면?


상상하기 싫어진다. 격하게 표현하면 재앙에 가까운 사회가 될 수도 있다는 불안감이 밀려온다.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유호무문을 새롭게 보기 시작하면서 저널리즘의 깊이와 범위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보다 적극적인 액션의 필요성을 느꼈다. 크게 세 가지 정도의 액션을 고려할 수 있겠다.


1) 직접 미디어 콘텐츠 제작

2) 언론, 창작자와의 협업

3) 미디어 생태계 조성


이 중에서 1)번을 할 수 있는 입장은 아닌 것 같다. 그럴 능력도 없고. 현 직장과 하는 일, 관심사를 고려했을 때 2)와 3)이 그나마 내가 취할 수 있는 액션일 것이다.


물론 지금의 나로서는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일단은 기초체력을 쌓는 데 집중하고 있다. 세상을 배우고 고민을 정리하고, 네트워크를 쌓고 고민을 공유하다 보면 새로운 접점이 생기고, 그 접점들이 만나 선이 되고 면이 되고 공간이 되어 점차 실체를 갖춘 액션으로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디지털과 모바일 흐름에 맞는 새로운 저널리즘을 위해 뼈를 깎는 혁신이 필요함을 강하게 외친다. 그러나 그 본질은 여전히 저널리즘 자체에 있다고 굳게 믿는다. 그리고 나의 저널리즘 가장 중심에는 유호무문이 있다. 해석은 조금 달라졌지만 결국 시작과 끝은 '유호무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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