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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깥 Jul 04. 2016

불쌍한 미디어, 어떻게 하지?

<미디어 씹어먹기> by 브룩 글래드스톤


  어떤 의미에서 미디어는 불쌍하다. 책에서 소개하는 미디어의 역사를 봤을 때 (혹은 경험적으로) 그 존재 가치는 사회적으로 인정받으면서도 항상 공격받고 욕먹는 대상이었다. ’전선위의 참새들’이라는 비유가 인상깊었다. 내가 떠올린 비유 포인트는 책에서 쓰인 것과는 물론 다르다.


미디어는 언제나 위험한 경계선을 위태롭게 타고 있는 것 같다. 그 경계선은 故 리영희 선생의 책 제목처럼 ‘우상과 이성’을 오가는 경계선이다. 미디어는 본질적으로 이 사회에서 당연하게 생각하고 신봉해온 우상들을 파헤치고 그 허구를 폭로한다.


권력과 자본이 만들어낸 우상을 비판할 때는 자연스럽게 권력과 자본으로부터 억압받고 공격당한다. 때로는 미디어 스스로 우상이 되기 위해 거짓 보도와 선동을 하는 과오를 범했고 이는 역사 속에서 비판받아 왔다. 때로는 사실을 바탕으로 우상의 허구를 폭로했음에도 공격당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우상에 대한 비판은 상당부분 대중이 믿고 싶어하는 환상을 깨고 불편한 현실을 마주하게 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미디어는 필요하다고 느끼지만 의심하고 외면하고 싶은 존재이기도 하다.  




  따라서 쏟아지는 비를 피하기 위해 미디어가 객관성, 공정성이라는 우산을 펴고 그 안으로 들어간 것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책에서 지적하듯 저널리즘에서 객관성이 셀링 포인트였던 것은 사실이다. 퓰리처의 NewYork World가 penny paper로서 60만부(당시 뉴욕 인구는 300만 명 정도로 추정)가 팔렸을 때, 증권가 찌라시였던 NewYork Times가 월터 리프만 등이 주창하는 객관주의를 적극 도입함으로써 승승장구할 수 있었다. 


그러나 현대로 들어오면서 여러 흐름으로부터 리스크를 최소화하기 위한 방편으로 객관성과 공정성이라는 말을 오남용된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이는 ‘객관’이라는 단어가 일본식 번역을 거치면서 그 의미가 달라진 탓도 있는 것 같다. Objectivity의 뜻을 풀이해보면 독일어 ‘Ding an sich’가 나온다. 이 말은 물(物) 그 자체, thing in itself를 의미한다. 따라서 객관적 보도란 현상 그 자체가 무엇인지 보여주는 것이다.


그런데 客觀 즉, 손님의 관점에서 본다는 뜻으로 전달되면 그 본질과 차이가 생긴다. 이에 대한 지적이 ‘공정성 편향성’이라는 말로 책에서 설명되고 있다. 미드 ‘뉴스룸’에 무척 직관적인 예시가 등장한다.

공정성 편향이란 공화당 하원 전체가 의회장에 나타나서 지구가 평평하다고 주장하면서 결의안을 제출할 때, 미디어가 “공화/민주 양당이 지구의 모양에 대해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고 있다”고 보도하는 행태




  우산 속에서 편하게 지내던 미디어는 새로운 도전에 직면하게 되었다. 기술 발전에 따른 새로운 미디어의 등장으로 사실만을 전달해서는 살아남기 어려운 환경에 처하게 되었다. 이제 어떤 사건의 발생을 접할 수 있는 창구는 너무나도 많아졌다.


흔히 회화의 역사로 비유하는데, 사물을 있는 그대로 그리는 사실주의 화법은 카메라의 등장으로 무너졌다. 있는 그대로를 보여준다는 관점에서 카메라를 이길 수 없으며, 그 관점을 계속 따르는 것은 회화 스스로의 가치를 떨어뜨리게 된다. 마찬가지로 새로운 미디어 환경에서 기존 문법과 관습을 이어가는 것은 미디어 스스로의 가치를 떨어뜨릴 위험이 있다.


이러한 배경에서 ‘경험있는 기자들이 사건 발생 장소로 가서 증언을 수집, 기록을 뒤지며 뉴스원을 발굴하고 사안을 확인, 재확인하는 활동’이라는 ‘퀄리티 저널리즘’에서 ‘현안에 대한 지식, 이해, 설명, 의견’이 중시되는 ‘위즈덤 저널리즘’이라는 새로운 흐름이 목격되고 있다.




  어젠다 세팅과 뉴스 가치로 대표되는 선형 미디어 시대가 종말되었다는 강정수 박사님의 견해에 동의하지만 미디어가 인플루언싱 머신이라는 점은 변하지 않는다. 특히 해석과 설명의 영역이 강화되고, 정보가 넘쳐나는 상황에서 큐레이션이라는 방향을 보면 그 역할이 축소되었다고 보기 어렵다. 미디어 소비자의 선택권이 강화되어 양자 간의 권력 관계가 비슷해졌다고 보는 것이 더 적합해 보인다.


이러한 환경에서 미디어가 진정한 의미의 객관성과 공정성을 확보할 수 있는 길은 다양성이라고 생각한다. ‘진리의 논박은 허위를 억제하는 최선의 그리고 가장 확실한 방법’이라는 존 밀튼의 말처럼 어떤 현상의 진실에 대해 다양한 해석과 설명이 제기되고 토론과 검증이 이루어지는 공론장이 필요하다. 물론 에코챔버와 필터버블이라는 현재 온라인 공간의 치명적 단점은 극복해야 할 부분이다. 한때 SNS를 통해 카이로의 봄을 이끌었던 와엘 고님(Wael Ghonim)의 생각에서 단점을 극복할 수 있는 힌트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동시에 우리는 어떻게 하면 예의바름을 증진하고 사려깊음을 보상하는 소셜미디어의 체험을 설계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도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보다 선정적이고 좀더 확실히 한쪽 편에 치우치고, 때로는 분노하고 공격적인 글을 올리면 더 많은 사람이 보게된다는 사실을 저는 확실히 압니다. 분명히 더 많은 주목을 받게 될 겁니다. 

하지만 글의 품질에 대해 더 초점을 기울이면 어떻게 될까요? 여러분은 어느 쪽이 더 중요한가요: 여러분이 올린 글을 읽은 사람의 수인가요, 아니면 여러분이 쓴 글을 읽고 영향을 받은 사람의 수인가요? 늘 의견을 퍼뜨리는 것만 하기보다는 대화에 참여하도록 이끌 수는 없을까요? 아니면 자신이 동의하지 않는 견해를 읽고도 거기에 답하는 사람에게 보상을 해줄 수는 없을까요? 또한 우리의 생각을 바꾸는 것이 사회적으로 더 받아들일 만한 것이 되도록, 나아가 그런 사람에게 보상이 주어지는 방향으로 만들 수는 없을까요?


http://book.daum.net/detail/book.do?bookid=BOK00016836544B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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