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4월 15일은 대한민국의 제21대 국회의원 선거가 있던 날이었지만 나에겐 다른 날로 기억될 것이다.
평소와 다를 바 없던 평일의 따사로운 아침. 사전투표를 한 나를 빼고 부모님과 동생은 새벽에 투표를 하고 왔다. 투표를 마친 뒤 콩나물 해장국을 드시고 포장을 해서 가져온 건 내 몫이었다. 느지막하게 일어나 느적 거리며 식탁에 앉아 해장국에 밥을 한 그릇 말아 해치우곤 다시 내 방으로 들어와 조용히 내 할 일을 했다.
그런 하루였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코로나 바이러스로 가족이 집에 며칠을 머물고 있었기에 선거 날 쉰다고 해서 평일에 가족이 모여 있는 하루가 어색하진 않았다.
전날 일을 하다 늦게 잔 이유 때문인지 졸음이 밀려왔고 아직 장판을 틀어놓은 침대에 누워 낮잠을 청했다. 그렇게 점심이 지날 무렵 방 밖에서 나를 깨우는 어렴풋이 목소리가 들렸다. 어리둥절하며 일어난 나에게 아버지는 빨리 나갈 채비를 하라고 했다. 무슨 일이냐 물었더니 외할머니가 입원해 있는 요양병원에서 할머니가 위독하다고 연락이 왔다는 말에 정신이 퍼뜩 들어 부랴부랴 씻고 나갈 준비를 마쳤다.
할머니는 우리 집 근처에서 혼자 살고 계셨었다. 혼자서 주무시는 정도지 거의 매일 우리 집에 오셔서 계시곤 했는데, 낮에는 가족 대부분이 일을 나가서 할머니가 계셔도 저녁에 얼굴을 보는 정도였다. 작년 설 되기 얼마 전, 하루는 할머니가 하루 종일 연락이 안 된다는 어머니의 다급한 연락이 있었다. 연락은 잘 되던 할머니가 밤 7시가 넘어도 연락이 안 되어 걱정이 된 어머니는 할머니 집을 가봤고 문이 열리지 않아 119까지 불러 문을 열었다. 상황이 진행되고 있을 무렵 나도 할머니 집에 도착했고 쓰러졌던 할머니는 구급차를 타고 인근 병원으로 이송되고 있었다. 어머니는 머리가 아프다며 앉아서 쉬고 계셨고 옆에는 친가 쪽 삼촌이 와계셨다. 나는 난생처음으로 긴급한 119의 모습을 사건의 당사자가 되어 옆에서 볼 수 있었다.
할머니는 뇌경색으로 쓰러지셨고 어머니는 얼마 동안은 조금만 더 일찍 발견했다면 이렇게 악화되진 않았을 거라고 하시면서 자책을 하셨다. 병원에서도 조금만 더 일찍 이송되어 왔으면 가능성이 있었다는 말을 하니 더욱 그랬다. 그나마 갈 때마다 그렇게 좋아해 주시는 할머니의 모습을 보며 죄책감을 다잡아 보았지만 시간이 지난 지금 더 자주 찾아뵙고 잘해드리지 못한 마음의 응어리가 크다.
그렇게 1년 하고도 3개월 정도 되는 기간 동안 병원과 요양병원을 전전하며 병원 신세를 졌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있기 전에는 일주일에 1~2번은 꼭 병문안을 갔었는데, 갈 때마다 자신의 밝게 마주해주시면서도 누워만 있는 처지가 힘든지 눈물을 흘리는 할머니의 모습에 내가 해드릴 수 있는 게 없다는 사실에 마음이 쓰라렸다. 뇌를 다치셔서 말도 못 하고 답답해하시는 모습... 한쪽 팔과 한쪽 다리는 굳어버려 혼자서 걷지도 못하셨다. 의사는 고칠 수 있는 게 아니라고 했고 간간히 재활치료만 하면서 그렇게 시간이 지나갔다.
올 초 코로나가 전국을 덮칠 무렵. 할머니가 계신 요양병원은 보호자의 출입을 통제했다. 평소에도 우리가 가지 않으면 우울했던 할머니의 모습이 떠오르고 마음이 쓰였지만 일상생활과 코로나라는 위협은 잠시 할머니에 대한 생각을 한쪽으로 밀어냈다. 그러던 3월 경.
할머니 병세가 악화되고 우울한 기색을 계속 비춰 병원에서 특별 면회를 가지도록 했다. 병실에는 가지 못하고 1층 상담실에서 가족이 함께 모여 할머니와의 짧은 만남을 가졌는데, 그때는 휠체어를 타고 오는 모습에, 그래도 건강해 보이셨고 코로나로 인해 만나지 못한다는 말에 대해 이해하는 눈치였다. 그렇게 짧은 만남을 뒤로하고 4월이 되었고 병원으로부터 15일 다시 전화가 왔다. 할머니가 위독하다고.
전화를 받고 할머니의 친한 친우 분을 모시고 함께 병원으로 향했다. 코로나로 모두가 올라갈 수 없어 한 사람씩 번갈아가며 병실로 갔다. 할머니 병실은 본래 사용하던 5층에서 위급한 환자만 모여있던 2층으로 옮겼고 독방에 홀로 누워 계셨다. 어머니가 다녀온 후 바로 내가 올라가서 봤던 할머니의 모습에 처음에 병실에 잘못 들어간 것 아닌가 싶을 정도로 얼굴이 바뀌어 있었다. 3월에 찾아뵐 때만 하더라도 생기가 있고 멀쩡했던 얼굴은 산소가 통하지 않아 붉게 물들어있었고 퉁퉁 부어 있었다. 그리고 숨이 쉬어지지 않아 산소 호흡기에 의존하면서도 숨을 거칠게 몰아쉬고 있었다. 처음 봤던 할머니의 모습에 그저 할머니가 살길 바라는 마음과 고통스러워 보이는 모습에 편하게 가시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공존했다. 눈물은 흐르고 마음은 답답해져 말은 알아듣는다는 간호사의 말에 몇 마디 말을 하고 다음 차례와 교대했다. 그렇게 모든 사람들이 할머니와의 면회를 마치고 오늘은 옆에 있는 게 좋겠다는 병원 측의 권고에 나를 제외하고 모두 할머니를 돌볼 채비를 하러 집으로 갔다.
병실에서 나 홀로 할머니를 보며 앉아있을 때, 점차 숨 쉬는 주기가 짧아지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심장 박동을 표시해주는 기계는 몇 초간 정적이 흐르다 다시 박동 수를 세고 다시 몇 초간 정적을 반복했다. 박동 수는 점차 줄어들면서... 그 옆에서 그간 할머니께 못다 한 말과 후회를 쓸어내고 있었다. 평생을 키워주고 사랑해주신 분께 그동안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 제대로 못 전한 것과 할머니의 생전 모습을 기억하기 위해 영상을 찍어둘 것이라는 후회, 마사지해드릴 걸, 용돈 드릴 걸, 좀 더 상냥하게 해 드릴 걸과 같은 후회가 계속 밀려왔다. 그러면서 눈에서는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리고 할머니의 팔을 붙잡고 사랑한다고, 가서 편하게 지내시라고 계속해서 말을 전했다.
시간이 흐르고 기계는 점차 박동 표시를 멈추었고 밖에서 간호사가 들어와 할머니의 상태를 확인하더니 의사를 불러왔다. 의사는 할머니의 상태를 보고 돌아가셨다는 말을 했다. 사망 시간을 정하는 건 드라마에서처럼 기계가 갑자기 삐- 하는 소리를 내는 순간처럼 정확하게 정하는 게 아니었다. 시계를 보고 나를 보고 간호사를 보더니 마치 사망 시간을 묻는 것처럼 말을 흐리더니 내가 3시 52분이라고 하자 의사는 시계를 보고 3시 55분이라고 사망 시간을 말해주었다. 그렇게 우리 할머니는 2020년 4월 15일 오후 3시 55분 82세 생일을 얼마 남기지 않고 유명을 달리하게 되었다.
할머니가 돌아가실 것 같은 때, 미리 집에 전화를 했다. 가족은 미처 준비를 다 하지도 못하고 부랴부랴 다시 병원으로 돌아왔고 왔을 때는 이미 돌아가신 뒤였다. 어머니가 힘들어할 거라고 예상했지만 예상보다 덜 힘들어하셨다. 1년이 넘는 기간 동안 마음의 준비를 하신 걸까. 마침 1층에 다른 분과 상담을 하기 위해 와 있던 장례 관계자분과 장례 이야기를 할 수 있었고 그렇게 우리는 할머니를 떠나보낼 준비를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