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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토모 Apr 27. 2020

2020년 4월 15일 할머니를 기억하며(2)

장례는 빠르게 진행되었다. 시신은 장례 지도사분이 모셔 간다고 했고 우리는 바로 장례식장으로 향했다. 가족이 함께 맞이하는 장례는 이번이 처음이었고 개인적으로도 장례를 준비하는 건 처음이었기에 모든 게 낯설었다. 장례에는 수많은 절차가 있고 많은 돈이 들어갔다. 처음 장례식장에서 관계자분과 상담을 할 때, 하나씩 필요 물품을 체크하면서 늘어나는 돈의 액수에 잠시간 슬픔이 싹 들어갈 정도였고, 3일 간 할 일이 많겠구나 생각했다. 


수건, 치약, 칫솔, 담요 등 사소한 물품부터 음식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돈이었다. 다행히 집이 가까워 사소한 물품들은 집에서 조달해올 수 있었다. 장례식을 부모님이 준비하는 사이 나는 동생과 함께 집을 왔다 갔다 했다. 첫날은 준비만 하고 조문객은 적었다. 친척 몇 분이 오시거나 가까이 있던 몇 분만 다녀갔셨고 부모님의 손님이었기에 거의 장례식 준비만 하면서 첫날이 지나갔다. 


둘째 날 새벽부터 일어나 씻고 조문객을 맞을 준비를 했다. 항상 빈소는 비우면 안 되므로 나와 동생이 번갈아가며 자리를 지켰다. 낮부터 문상객이 오기 시작했고 우리는 조문객이 올 때마다 함께 맞절을 했다. 그때마다 조문객들이 할머니를 어떻게 생각할지 할머니는 저분들에게 어떤 분이었는지 의미를 생각했고 그 관계 속에서 살아있는 할머니를 생각하니 눈물이 났다. 아직 살아있는 것 같은데, 다시는 볼 수 없는 할머니의 부재가 조문객을 맞을 때마다 크게 느껴졌다. 


세상 어딘가에 살아있어 언젠간 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과 고인이 되어 다시는 볼 수 없다는 생각의 차이는 매우 크다. 등을 긁어주시던 할머니, 집에 가면 누고? 하며 반겨주시던 할머니, 텔레비전을 켜 두시고 집안 곳곳을 다니시며 일을 하던 할머니, 길 가다 우연히 마주친 할머니... 이 모든 모습을 내 생전에 다시는 볼 수 없다는 뜻이다. 함께 할 수 없다는 것, 당연한 것의 부재는 말할 수 없이 큰 상실감을 일으켰다.


이튿날은 조문객을 맞이하며 정신없이 보냈다. 코로나로 인해 많은 분들이 오진 못했더라도 먼 곳에서 조문 인사와 조의금을 보내왔다. 그리고 오신 분들은 함께 눈물을 흘리고 접대실에서 밥을 맛있게 먹어주었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조문객들과 웃는 낯으로 말을 하는 모습에 안도감을 느꼈다. 슬퍼하는 것만이 고인을 보내드리는 길은 아니다. 고인도 남은 이들이 슬퍼만 한다면 발걸음이 안 떨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남은 이들도 빨리 고인을 보내드려야 일상이 본래대로 돌아온다.


서울에 계신 할머니의 동생, 우리는 ‘서울 할아버지’라고 부르는 분도 오셨다. 고인과의 추억을 얘기하면서도 이제 주위에는 남은 사람이 없다고 하시는 할아버지의 말씀에 아픔이 느껴졌다. 그러곤 내 주위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남아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할아버지는 우리와 함께 고인을 보내드리기 위해 1박을 했고 화장하는 순간까지 우리와 함께 하셨다.


셋째 날은 아침부터 분주했는데, 고인이 된 할머니의 마지막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고운 옷에 편안하게 눈을 감은 할머니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두 눈에 담았다. 시신을 관에 옮겨 담아 천으로 덮은 뒤 관을 덮었다. 그리고 시신을 모시고 마지막으로 제를 올린 뒤 가족들과 남아있는 할아버지, 할머니의 친우 한 분, 어머니의 친척 한 분, 동생의 친구 한 명이 함께 화장을 위해 이동했다. 몸체가 긴 리무진에 할머니의 시신을 싣고 우리 가족도 함께 리무진에 올라탔다. 셋째 날은 급작스럽게 거센 비가 내리고 있었고 우리는 비를 맞으면서 이동할 수밖에 없었는데, 다행히도 비를 맞을 일은 거의 없었다. 다만 내가 들었던 할머니의 영정 사진이 비에 젖을까 노심초사했다. 


화장을 위해 간 그곳엔 우리 말고도 많은 사람들이 고인의 화장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목 놓아 우는 사람, 담담하게 앉아 있는 사람, 피곤한지 눈을 쓸어내는 사람 등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는데, 우리는 화장을 위해 1시간이 넘는 시간을 대기했다. 화장을 하는데, 1시간 40분인가 걸린다고 했던가. 그 시간 동안 점심을 먹었고 점심을 먹은 뒤 나는 잠시 소화를 시키겠다며 우산을 쓰고 잠시 밖으로 나갔다.



밖은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고 반대편에는 수많은 무덤이 보였다. 한때 이곳에 참 많이 왔더랬다. 외할아버지 그러니까 할머니의 부군이 오래 계셨던 곳이었고 명절마다 할머니와 함께 이곳을 찾았다. 그때 할머니의 기분은 어땠을까. 지금 내가 느끼는 감정보다 더 아프셨을까. 그리우셨을까. 어릴 때 돌아가신 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굉장히 흐릿하지만 돌아가신 할머니에 대한 생각은 너무 선명하다.


할머니 화장이 끝나고 납골함에 할머니의 뼛가루가 담겨 나왔다. 남은 우리는 다시 장례식장에 돌아와서 상복을 반납하고 다 함께 집으로 왔다. 할아버지와 동생 친구는 계속 함께 했는데, 함께 저녁을 먹으러 가서 저녁까지 먹고 동생 친구는 보내고 할아버지는 부산 내 친구 집으로 가셨다.


다음날은 가족끼리 식사를 하러 나섰다. 냉면이 먹고 싶다던 어머니의 말에 근처에 종종 갔던 냉면 전문 가게로 가서 냉면을 먹었다. 그곳은 몇 년 전 어머니와 할머니와 내가 함께 갔던 곳이기도 한데, 어머니도 그때 기억을 하고 있었다. 당시 할머니는 갈비탕을 시키셨는데, 갈비탕에 갈비가 얼마 없어 투덜거리시며 탕을 휘젓던 모습이 생각났다. 엄마도 그 생각을 했다며 마주 보며 웃음을 지었다.


이후 부조금 등을 정리하고 찾아와 주신 분들에게 감사 인사를 드리고 절에 들려 할아버지와 함께 위패를 모셨다. 그리고 할머니의 혼백을 태워서 하늘로 올려 보내고 지금은 할머니의 생일과 49제를 기다린다. 


우리는 일상생활로 복귀했고 할머니의 영정 사진은 아직 집 한쪽에 보관되어 있다. 나는 밤에 잠이 잘 오지 않아 불 끄면 절대 보지 않던 휴대폰도 피곤해서 잠이 들 때까지 불 끄고 계속 붙잡고 있는다. 덕분에 아침에 매우 피곤하고 눈이 아프지만 아직은 그럭저럭 살만하다.


늘 우리 가족을 위해 배려해주시고 희생하시며 늘 우리를 자랑스러워하셨던 할머니. 그럼에도 그 마음을 다 돌려드리지 못해 죄송스러운 마음만 들지만 살아가기 위해 마음을 다잡고 있다. 할머니가 원하시는 모습은 내가 잘 사는 거라고 자위하면서... 그리고 가족의 소중함을 더 느끼게 된 지금 가족에게 더 충실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기회가 될 때마다 우리 가족의 모습을 영상으로 많이 남겨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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