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Movie us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디귿 Jun 28. 2020

설국열차: beyondness

“제자리를 지키고 칸들이 꼬리를 물고 이어져 그 모든 게 합쳐서 무엇이 되나? 열차야. 각기 있어야 할 자리를 엄격히 지키고 있는 사람들의 숫자를 합치면? 그게 인류야. 열차는 세계 우리는 인류야”

.

.

“이제 자네는 전 인류를 이끄는 성스러운 임무를 얻었어. 자네는 저들을 구원할 수 있어.”


차이가 차별을 만들어내는 사회


온난화를 막기 위해 살포한 CW-7으로 인해 지구는 빙하기가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얼어붙은 세상을 17년 동안 달리는 긴 열차가 있죠. 쉬지 않고 달리는 열차에는 살아남은 생존자들이 앞 칸과 꼬리 칸으로 나누어 살아갑니다. 앞 칸은 표를 구입해서 열차에 오른 사람들, 꼬리 칸은 혹독한 추위를 피해 표 없이 열차에 올라탄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의 격차는 17년 동안 크게 벌어졌습니다. 달리는 열차라는 사실만 빼면 얼어붙기 전 세상에서 살던 것과 다를 바 없이 살아가는 앞 칸 그리고 그런 앞 칸을 꿈꾸며 살아가는 꼬리 칸은 먹는 것부터 매우 차이가 납니다. 스시도 먹을 수 있는 앞 칸과 다르게 꼬리 칸은 무엇으로 만들었는지도 모르는 단백질 블록만을 먹고 살죠.


꼬리 칸 사람들도 가만히 있던 건 아니었습니다. 7인의 반란, 맥그리거 폭동 등 밖으로 나가거나 앞 칸을 향해 나아간 사람들이 있었죠. 그들의 끊이지 않는 도전은 영화의 주인공 커티스에게까지 이어집니다. 이미 실패한 전례가 있기에 그들은 더욱 은밀하고 조심스럽게 준비했습니다. 그리고 앞 칸에서 그들을 돕는 정체불명의 조력자가 단백질 블록 안에 메시지를 써 보내주니 더욱 철저하게 준비할 수 있었습니다.


경비병들의 총에 총알이 없다는 걸 알아챈 커티스가 반란의 방아쇠를 당겼습니다. 반란은 시작되었고 반란이 혁명으로 번지기까지 촛불을 휘두르며 쉬지 않고 뛰어갔지만 그들이 가는 길에는 수많은 희생이 뒤따랐습니다. 급수 칸 앞에서 폭도 진압을 위해 모인 복면인들과의 전투는 매우 잔혹하고 그들의 죽음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그들이 어울려서 싸우는 동안 열차의 간부 메이슨은 히죽 거리며 마치 재미있는 스포츠 경기를 보는 것 마냥 구경하고 있었고 그 와중에 커티스를 잘 따르던 에드가도 죽었습니다.


곳곳에 뿌려지는 피와 날 선 도끼에 맞아 눈을 부릅뜬 시체, 꼬치 꿰듯 꽂힌 꼬리 칸 사람들의 비명 없는 외침을 보며 그들의 전투가 잔혹하다는 걸 무척 생생하게 느낄 수 있게 합니다. 그리고 동시에 한 생각이 들게 하죠. 서로 죽고 죽이는 이 싸움이 누굴 위한 것일까요?


그들은 자신들의 신념을 위해 싸울 뿐입니다. 자신들의 권리를 쟁취하기 위한 꼬리 칸과 앞 칸의 권리를 지키기 위한 복면인들은 각자의 신념이 있지만 그 신념을 유발하는 ‘차이와 차별’에 대해 생각해봐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는 이 영화의 주제의식과 맞닿아 있기도 하고요.


질서를 지키려는 자와 무너뜨리려는 자

앞 칸의 주요 인물들은 질서(order)를 중요시합니다. 질서는 영화 속 영문 표기에도 나온 것처럼 order, 다른 의미로는 명령이며, 이 명령은 신성한 엔진을 수호해야 한다는 신념에서 나오는 절대적인 것입니다. 영화 초반 메이슨이 “앞 칸이 머리면, 꼬리 칸은 신발이다.”라며 신발을 가리키며 이건 ‘무질서’ 또는 ‘죽음’이라고 표현합니다. 반대로 말하면 질서는 ‘생명’이 되죠. 즉, 질서(명령)는 열차를 지키기 위한 것임을 명시하는 겁니다. 그런 메이슨의 신념은 앞 칸의 다른 사람들에게서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피아노를 치며 윌포드를 찬양하는 노래를 부르며 황홀감에 눈을 부르르 떠는 교사와 그를 따라 노래를 부르며 ‘윌포드는 위대하다! 엔진은 영원하다!‘고 외치는 아이들의 모습은 어릴 때부터 광기 어린 '절대적인 명령(질서)'을 주입하는 독재자의 그 모습과 비슷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영화  속 절대적인 명령은 ‘열차가 달려야 한다.’는 명제입니다. 이 명제 안에서 누구나 역할이 바뀔 수 있습니다. 길리엄을 추억하던 윌포드의 모습은 자신도 길리엄도 열차를 수호하기 위한 같은 역할임을 말하는 듯합니다. 이는 그들의 역할이 열차를 위한 것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것이죠. 윌포드가 자신의 자리를 커티스에게 물려주겠다고 말하는 대목에서 윌포드 역시 열차를 달리도록 해야 하는 자신의 위치가 언제든지 바뀔 수 있음을 시사합니다. 

다만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했던가요. 앞 칸 사람들 역시 자기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이지만 그 자리가 차이와 차별을 만들고 차별로 꼬리 칸과 앞 칸의 대우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앞 칸 사람들은 단지 꼬리 칸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로 아이들을 멸종된 열차의 부품 대용으로 사용해버리죠.


부품을 대체하는 꼬리 칸의 모습은 우리가 사회를 구성하는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회사에 자신이 없어도 누군가는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되고 나이가 들고 쓸모가 없어지면 더욱 젊고 튼튼한 부품으로 바꿔 버립니다. 내가 그 자리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소위 말해 갈려나간다고 표현할 정도로 일을 해야 합니다. 이곳에서 문제가 발생하는 겁니다. 앞 칸은 늘 권리를 누려왔고 꼬리 칸은 권리를 얻기 위해 늘 투쟁해야 했습니다. 그 온도 차이를 볼 수 있는데, 앞 칸 사람들은 생존이 아닌 보다 높은 삶의 질에 대해 고민(커티스와 일행이 열차를 지나가면서 보는 모든 장면들이 그렇습니다)하지만 꼬리 칸 사람들은 늘 단백질 블록 하나만을 먹으며 매 순간 생존을 위해 걱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꼬리 칸 사람들은 앞 칸 사람들을 부러워하고 꿈꾸며 그들을 향해 반란의 횃불을 들게 되는 거죠.


그러하기에 앞 칸은 더욱더 꼬리 칸을 강하게 억압합니다. 그리고 그 억압을 열차 내 무질서를 통제하기 위한 장치로 사용하죠. 윌포드는 늘 소요를 일으켰습니다. 그동안 실패했다던 7인의 반란, 맥그리거 폭동은 그들의 작품이었고, 영화의 주 내용이 되는 꼬리 칸의 반란 ‘커티스 대혁명’마저도 윌포드와 길리엄이 합작해서 만든 큰 계획에 불과했습니다. 하지만 늘 변화는 사소한 것에서부터 생겨나는 겁니다. 윌포드와 길리엄 그 누구도 작은 변수들이 모여 질서를 어지럽히게 될 것이라곤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변수는 커티스 대혁명에서 조금씩 쌓여서 큰 결과를 만들어냈습니다. 횃불을 들고 싸우거나 니느웨를 구원한 인물과 같은 이름을 가진 요나의 신비한 능력, 내내 골칫거리였던 크로놀이 폭탄으로 사용된다거나 자신의 팔이 잘리는 걸 무서워했던 커티스가 아이를 구하기 위해 팔을 희생하는 행동 등 변칙적인 요소들이 묶여 기적을 만들어 냈습니다. 하지만 잘 생각해보면 우연 같았던 모든 변수들이 결코 우연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걸 꿈꾸었기에 변수들을 발생시킬 수 있었던 거죠. 예로 남궁민수는 감옥에 갇히기 전부터 열차 밖을 상상했습니다. 마약 하는 것처럼 하면서 크로놀을 챙겼고, 그중 좋은 질의 크로놀을 골라내 폭탄을 제조했죠. 그 결과 열차는 무너지고 비로소 밖으로 나갈 수 있는 길이 만들어진 것입니다.


열차 안 혹은 열차 밖

윌포드는 열차를 세계라고 했지만 그 세계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세대가 잉태되었습니다. 그들은 마치 아담과 이브처럼 아무것도 없는 하얀 열차 밖 세상으로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비교적 차별받는 황인과 흑인의 조합이라고 한다면 지나친 생각일까요. 그들의 조합은 하나의 거대한 질서인 열차를 벗어나게 되었고 북극곰을 보며 열차 밖에도 사람이 생존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들이 열차 밖의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갈지는 알 수 없습니다만 우리의 삶을 생각해보면 좀 더 쉽게 유추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내가 거대한 사회의 질서를 벗어나게 된다면, 거대한 흐름에서 튀어나간다면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열차 안의 삶과 열차 밖의 삶. 어떤 삶을 지향해야 할까요? 새하얀 설원에서 엔딩을 맞은 영화처럼 그 답은 스스로 내려 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배틀쉽: 해상 전투씬은 잘 만든 영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