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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won Jul 12. 2016

일 안하는 사회가 그렇게 나쁠까?

커리어를 중심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당신에게 

샌프란시스코에 살면서 운전자가 필요없는 자동차와 상품을 배달하고 건물을 건설하는 드론을 개발하고 있는 친구들과 이야기를 하다보면, 공상영화에서 보던 미래가 멀지 않았구나 라는 생각이 들 때가 많습니다. 그런 기술들은 미래에 많은 직업들을 대체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당장 내 일상에는 어떤 영향을 줄지, 그러한 환경 속에서 내 미래의 아이들은 어떻게 키워야 할지 등의 개인적인 관점에서는 깊게 생각해보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이 기사를 읽기 전까지는 말이죠. 


아래 글은 the Atlantic에 기고된  Would a Work-Free World Be So Bad? 라는 기사를 번역하였습니다. 여기서 나오는 주장들이 정답이기 때문에 번역까지하면서 이 글을 공유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기사를 통해 직업 없는 미래에 대한 예측들과, 수렵채집의 원시사회, 그리고 과거 산업 혁명 이전의 가족의 모습까지 따라 읽다보니, 멋진 커리어를 갖기 위해 끊임없이 공부하고, 짜임새 있는 생활을 하기 위해 매일 아침 시간표를 짜고, 목표를 위해 가족 및 친구들과의 시간을 포기하곤 하는 우리들의 일상을 조금 더 넓은 관점에서 다시 바라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에게도 이 글이 어떤식으로든 생각할 기회를 주었으면 합니다. :) 




우리는 지난 수세기동안 일할 필요가 없는 미래를 추측해왔다. 오늘날도 예외는 아니다. 여전히 많은 학자들, 작가들, 그리고 운동가들이 미래에는 기술이 인간노동을 대체할 것이라고 경고한다. 그들 중 일부는 노동없는 세계가 불평등을 기반으로 형성될 것이라고 덧붙인다. 몇몇의 부유한 사람들이 모든 자본을 소유하고, 대중들은 빈곤한 불모지에서 살아남기위해 투쟁해야 할 것이라고 말이다. 


조금 덜 과대망상적인 추측을 하는 다른 그룹 또한 우울한 미래를 예상하기는 마찬가지다. 다만 이를 주장하는 이들은 이 황폐함이 사회의 "목적없음(purposelessness)"에서 비롯된다고 본다. 직업이 사람들에게 살아갈 의미를 주기 때문에, 그것을 빼앗겨 버린 사람들은 게을러지고 우울해 질 것이라는 것이다. 사실, 오늘날의 실업자들이 좋은 나날들을 보내고 있지 못하긴 하다. 갤럽 조사에 의하면 최소 1년간 실업상태를 경험한 미국인들 중 20%가 우울증을 경험했고, 노동인구층에서는 이 수치가 두배로 뛴다. 또 다른 연구결과는 고등교육을 받지 못한 중년층 사이에서 증가하고 있는 사망률, 정신건강 문제, 마약중독등의 문제가 보수가 좋은 직업이 부족하기 때문에 비롯된 것임을 보여준다. 이것이 아마도 왜 많은 사람들이 직업없는 미래에 대해 그토록 걱정하는 지를 설명해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조사결과만을 바탕으로 미래의 직업 없는 사회가 문제들로만 가득할것이라고 단정하기는 충분하지 않다. 그러한 예견들은 노동인들을 중심으로 지어진 현대 사회에서 실업을 경험할 때의 단점을 바탕으로 한 것이기 때문이다. 직업이 없어진 상태에서 미래 사회는 직업중심이 아닌 새로운 관점을 바탕으로 재형성될 것이고, 따라서 미래의 노동과 여가는 전혀 다른 모습을 띌 것이다. 사실 오늘날 "근로"의 장점은 잔뜩 과장되었을 수 있다. "많은 직업들이 지루하고, 수치스럽고, 건강에 해롭고, 인간의 잠재력을 낭비하고 있습니다." 갤웨이의 아일랜드 국립대학 강사 John Danaher는 직업이 없는 사회에 대한 책을 쓴 바 있다. "세계적으로 설문조사들을 통해 대다수의 사람들이 자신에 일에 만족하지 못하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대다수의 근로자들은 상대적으로 충분한 여가시간을 갖지 못하기 때문에, 자유시간이 주어지면 근무에서 비롯되는 지적, 정신적 피로를 풀는데에만 집중하는 경향이 있다. Danaher씨는 덧붙인다. "일이 많았던 하루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참 피곤하죠. 일할 필요가 없는 세상에 산다면 좀 다르게 느끼지 않을까요." 아마도 그가 직업 없는 세계에 산다면 평소 자신의 직업을 위해 사용하는 정신적, 육체적 에너지를 자신의 취미나 열정 프로젝트에 사용할 수 있지 않을까.


직업은 경제적인 안정감을 제공할 수 있다. 하지만 삶의 필수적인 요소들을 지탱하기 위해 직업이 필요하다는 것을 고려하면, 오늘날의 무직상태는 종종 많은 사람들을 사회의 방랑자처럼 느끼게 할 수 있다. "일하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은 기생충이나 거머리처럼 취급되곤 하죠." Danahar씨가 말한다. 아마도, 그러한 문화적 태도 때문에, 많은 사람들에게 그들의 자존감과 정체성은 그들의 직업 혹은 실업상태와 복잡하게 연관되어 있는 지 모른다. 


게다가 많은 현대 사회 커뮤니티에서, 무직상태는 굉장히 지루할 수 밖에 없다. 미국의 마을과 도시들은 애초에 여가시간을 위해 건설되지 않았다. 공공장소들은 집과 빌딩들 사이 작은 한켠에 겨우 자리를 잡고 있고, 성인들이 입장료 등 돈을 들이지 않고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거나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낼 방법을 찾을 수 있는 곳들은 결코 흔치 않다.



이러한 지루함의 근원은 사실 더 뿌리깊다. 보스턴 컬리지의 심리학 교수인 Peter Gray는 놀이의 개념에 대해 연구를 한다. 그는 사람들이 이미 어떻게 노는지를 잊어버렸기 때문에, 만약 직업이 내일 당장 없어진다면, 많은 이들이 무엇할지 갈피를 못잡고 우울함에 빠질것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어린아이들에게 일과 놀이의 차이를 가르칩니다. 일은 '하기 싫지만 해야만 하는 무엇'이라고 말이죠." 그는 이러한 가르침이 학교에서부터 시작되기 때문에 많은 아이들을 놀이시간으로부터 떨어져 나오게 만들고 여가시간을 무의미하게 보내는 어른으로 양성시킨다고 말한다. 


"은퇴를 한 많은 이들이 무엇을 해야할지 몰라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신만의 활동을 만들어낼 능력을 잃어버린 것이죠." Gray는 이런 현상을 어린 아이들 사이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고 지적한다. "그 어떤 세 살 아이도 짜여진 활동 계획표가 없다고 게을러지거나 우울해하질 않습니다." 


그러나 이런식이어야만 할까? 노동없는 사회는 그저 가상 실험이 아니다. 사실 인간 역사 속에서 이러한 사회는 이미 존재해왔다. 수렵 채집인들을 생각해보자. 그들에게는 보스, 월급도, 8시간의 근로시간도 주어지지 않는다. 약 만 년 전에, 모든 사람들은 수렵 채집인들이었고, 몇몇은 지금도 그러하다. 매사추세츠의 벤틀리 대학의 인류학자 Daniel Everett은 Piraha라고 불리우는 아마존의 수렵채집 그룹을 수년간 연구해왔다. Everett씨에 따르면, 우리는 수렵이나 채집 활동을 노동이라고 보는 반면, 수렵채집인 본인들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수렵 채집 활동을 재미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에게는 우리와 같은 노동에 대한 개념이 없습니다." 



Everett씨는 또한 덧붙인다. "그들의 대부분의 시간은 굉장히 여유롭습니다." 그는 Piraha 그룹의 일상을 묘사해주었다. 이 집단의 남자들은 기상 후에는 몇시간 동안 카누나 낚시를 하며 시간을 보내다가 바베큐를 해먹고, 수영을 가고, 집으로 돌아와 잡은 물고기들을 가족에게 건넨 후에는 저녁까지 논다. 그러한 최저 생활 수준에 여전히 걱정거리들이 존재할 것이다. 하지만, 인류학자 Marshall Sahlins은 그의 1968년 에세이를 통해 하루에 고작 몇시간 밖에 일하지 않아도 되는 수렵 채집 집단은 "근본적으로 풍요로운 사회"라고 주장한다. Everett씨에 따르면 Piraha의 성인들은 일주일에 평균 약 스무시간 정도 일을 한다. 그들 어깨로 넘어 감시를 하는 보스가 존재하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말이다. 한편, 노동청 통계에 의하면 미국의 부모인 근로자들의 평균 노동시간은 하루 9시간이다. 



Piraha집단의 여유로운 삶에도 오늘날 미국 사회의 많은 무직자들에게서 보여지는 우울증이나 무기력함이 존재할까? "제가 그곳에 있는 동안 한번도 우울증 비슷한 것이라도 경험하는 사람들을 본 적이 없습니다. 신체적으로 아픈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말이죠." Everett씨는 말한다. "그들은 즐겁게 살고 있습니다. 언제나 놀죠." 많은 사람들이 일을 인간의 삶의 주요 산물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오늘날 존재하는 형태로써의 일은 수천년 간 진행되온 문화 발달 과정에서 비교적 최신 발명품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그냥 할일없이 앉아있는 상태가 나쁜 것이라고 생각하죠. 하지만 Piraha사람들에게는, 그것이 가장 바람직한 상태입니다." 



Gray씨는 수렵채집인들의 삶의 방식을 선진국 아동들의 자유분방한 모험에 비유한다. 다만 이 아동들은 언젠가는 그러한 아이스러운 행동들 버려야만 할테지만 말이다. 그러나 예외의 경우도 있었다. Gary Cross작의 1990년의 책 “1600년대 이후 여가문화의 역사”에 따르면, 18~19세기 이전의 미국의 자유시간은 굉장히 달랐다. 당시 많은 미국인들의 직업이었던 농부들은 일과 놀이를 그들의 일상에 잘 섞어냈다. 관리자나 감독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노동, 휴식, 이웃들과의 게임, 장난치기, 그리고 가족 및 친구들과 시간보내기 등의 다양한 활동을 유연하게 번갈아가면서 하루를 보냈다. 예를들어 프랑스에서는 1700년에 1년에 84일의 휴일이 주어졌는데, 이에 추가로 1년의 80일은 날씨조건으로 인해 농작일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Cross씨에 따르면, 이 모든 것들은 산업 혁명을 거치며 바뀌어 버린다. 산업혁명은 농장을 공장으로, 농부를 고용인으로 바꾸어버렸다. 공장 주인들은 더욱 엄격하게 계획된 환경을 만들어 일과 놀이를 철저히 구분시켰다. 그러는 동안에는 시계가 보급됨에 따라 삶의 속도가 더 빨라지게 되었고, 전통적으로 대부분의 경축행사들을 주관하던 종교적 지도자들은 여가를 죄와 연관짓기 시작했고, 소란스러운 축제를 설교로 대체해 버렸다. 



또한 노동자들이 도시로 이주를 하기 시작하면서, 가족들은 더이상 농장에서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없게 되었다. 대신, 남자들은 공장에서 일을하고 여자들은 일을 하거나 집에서 머무르고, 아이들은 학교에 가거나, 일을 하거나 집에서 머무르게 된 것이다. 평일동안 가족들은 점점 떨어져있게 되고, 이는 사회 전체가 유흥을 즐기는 방식에 영향을 끼치게 된다. 성인들은 “아이들같은” 게임이나 운동을 그만 하게 되었고, 거리는 조용해졌으며, 중산층의 가족들은 노동자계급의 주사위 게임이나 닭싸움을 혐오스러워하였고, 그것들을 끝내 불법이 되었다. 


노동자들의 많은 오래된 놀이 방식이 공장 굴뚝의 연기와 함께 사라지면서, 도시 생활에 맞춘 새로운 여가 활동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술집은 피로에 지친 노동자들이 술을 마시거나, 노래를 부르거나 춤을 추거나, 라이브쇼를 구경하는 은신처가 되었다. 만약 많은 미국인들에게 맥주와 TV가 여가를 상징하는 것이라면, 이것이 그 시작이다.



때때로 선진 사회들은 소수 특권층을 위해 수렵채집 부족들만큼이나 놀이로 가득찬 라이프스타일을 만들어냈다. 역사적으로, 땅을 소유함으로서 수입을 유지했던 귀족들은 재정적인 위기를 겪는 일이 거의 없었다. Baruch대학의 역사 교수인 Randolph Trumbach에 따르면, 18세기 영국의 귀족들은 친구들을 만나거나, 절 짜여진 식사를 먹거나, 살롱을 열거나, 사냥, 편지쓰기, 낚시, 교회가기 등으로 나날들을 보냈다. 그들은 또한 적지않은 시간을 무보수로 정치활동에 참여했다. 아동들은 춤을 배우거나, 악기를 다루거나, 외국어를 배우거나, 라틴어를 공부했다. 러시아의 귀족들은 종종 학자, 작가, 예술가가 되곤 했다. 17세기의 어느 귀족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우리는 먹기 위해 앉고, 놀기 위해 일어나죠. 쾌락을 빼면 신사라 할 수 있나요?”  



직업 없는 사회가 모든이들에게 그러한 호화로운 라이프스타일을 제공해 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Gray씨는 어느정도가 되었건 유흥의 시간을 사람들의 삶에 추가하는 것은 바람직하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놀이는, 그 17세기 어느 귀족의 의견과는 반대로, 쾌락 그 이상이기 때문이다. 놀이를 통해 성인들 뿐 아니라 아이들 또한 어떻게 전략을 세우는지를 배우고, 새로운 정신적 유대관계를 맺고, 그들의 창의성을 표현하고, 협동하고, 나르시즘을 극복하고, 사람들과 더 잘 어울릴 수 있게 된다. “수컷 포유동물들은 대개 서로 근접하게 사는 것을 어려워하죠.” Gray씨는 조화를 강조하는 놀이의 특징들이 왜 놀이가 수렵 채집 사회의 중심이 되었는가를 설명할 수 있다고 말한다. 또한 비록 오늘날의 성인들이 어떻게 노는지를 잊어버렸을지라도, 그는 이들이 충분히 회복할 수 있을 것이라 덧붙인다. 손자 손녀들과 시간을 함께 보내며 놀이의 개념을 다시 배우는 장년층을 예로 들으면서 말이다. 



우리는 종종 직업이 없는 미래를 상상할 때, 현재의 노동과 여가에 대한 짐작들을 미래에 투영시키곤 한다. 하지만, 그 미래는 오늘날의 개념의 노동과 여가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만약 자동화가 많은 부분의 불필요한 인간 노동을 대체한다면, 그러한 사회는 오늘날의 사회와는 전혀 다른 관점으로 존재할 것이다. 


그렇다면, 직업이 없는 미국은 어떻게 될까? Gray씨는 다음과 같이 상상한다. 먼저 무엇보다, 학교가 굉장히 달라질 것이다. “제 생각에 앞으로 현재의 학교 시스템은 완전히 실패할 것 같습니다. 현재 교육 시스템의 최고의 목표는 사람들에게 일하는 방법을 가르치는 것이지요. 아무도 자신들이 겪은 것을 자신의 아이들에게 물려주고 싶지 않을 것입니다.” 대신, 교사들은 학생들이 가장 호기심있어 하는 것을 중심으로 교육과정을 계획할 것이다. 혹은, 어쩌면, 학교 제도 자체가 사라질지 모른다. 


한편 Trumbach씨는 교육이 미래에는 노동자보다는 리더가 되는 법을 가르치는 데 더 힘을 쓸 것이라고 본다. 철학이나 수사학같은 것들에 중점을 두면서 말이다. 그는 또한 종전의 귀족들과 같이 시민들이 정치나 공공 사회 문제에 더 많이 참여 할 것이라고 본다. “만약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여가시간을 나라를 운영하는데 사용한다면, 그것은 사람들에게 목적의식을 줄 수 있을 것입니다.” 


사회 생활 또한 많이 달라질 것이다. 산업 혁명 이래로, 어머니들, 아버지들, 그리고 아동들은 대부분의 깨어있는 시간을 따로 떨어져 보내야만 했다. 직업이 없는 미래의 세상에서는, 나이대가 다른 사람들이 다시 함께 어울릴 것이다. “우리는 덜 외롭게 지낼 것입니다.” Gray씨는 어찌보면 약간은 낙천적으로 상상을 한다. “한 어머니가 아기를 가지면, 이웃 모두가 그녀를 도우려 할거에요.” 많은 연구가들이 행복은 얼만큼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가와 깊은 관련이 있음을 밝혀낸 바 있다. 직업 없는 사회가 가능하게 해줄 이러한 종류의 사회적 관계는 많은 미래학자들이 우려하는 사회의 무의미함을 대체해줄 수 있을 것이다. 


보편적으로, 일이 사라질 때, 사람들은 더욱 그들의 열정을 따르고, 예술에 참여하고, 친구들을 만날 것이라고 Gray씨는 믿는다. 아마도, 여가는 힘든 일 후에 피로를 푸는 시간이 아니라, 더욱 다양하고 풍부한 삶의 무언가가 될 것이다. “더이상 지금의 우리처럼 자기중심적이지 않아도 될지 몰라요. 아마도 미래에는 우리가 더욱 인간다워지지 않을까요.” 







1. 이 글은 the Atlantic의 Would a Work-Free World Be So Bad? 를 번역하였습니다. 저는 전문번역가는 아닙니다. 다만, 개인적으로 번역기사를 읽을때 딱딱하고 어색한 번역 말투때문에 내용을 쉽게 이해하기 어려웠던 경험이 있어, 이번 번역 과정에서 일부 원문에 의역을 가하거나 표현을 가감하여 부드럽게 읽히는 것에 중점을 두었습니다. 여전히 매끄럽지 못하다거나 오역이 있었다면 너그러이 양해해주시길 바랍니다. 기사에서 보여지는 내용들에 대한 팩트체크를 하고싶다면 이 링크를 통해 원문을 확인해보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2. 위의 메인에 실린 그림은 Pieter Brugel the Elder의 1567년의 작품으로, 사람들이 일이 없는 세상에서 나태함에 빠진 신화속의 어느 땅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독자님과의 소통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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