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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won Sep 16. 2021

[우정] 서로의 그릇이 되어 마음을 담아줘요

대학 친구 두명이 내가 한국에 잠시 있는 동안 머물고 있던 부모님 집에 소포를 보내왔다. 한국 방문 기념선물이었다.


한 친구는 미국에 돌아가서 남편과 따뜻한 커피 나눠 마시며 시차적응을 잘 하라는 메시지와 함께 커피잔 셋트를, 다른 한 친구는 계속 치열하게 생각하고 글을 써 나가라는 마음으로 핸드메이드 노트를 보내주었다. 나에게 뿐만 아니라 서로에게도 선물을 나눴다고 한다.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두 친구는 무엇인가를 담을 수 있는 도구를 선물로 했다. 글을 담는 노트와, 커피를 담는 커피잔. 나는 그 선택이 본인들의 심성을 꼭 닮았다고 생각했다.




친구들은 단 한번도 나의 미국에서의 삶을 지레 짐작하지 않았다. 미국생활과 한국생활을 비교하려 하지도 않았다. 그녀들은 대신 반짝이는 두 눈으로 나를 응시하며 "요즘 네 마음은 어떻니?"라고 묻곤 했다. 그 질문과 만남의 분위기가 너무나 담백해서 어릴적에는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그녀들은 내 마음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을 만들어 주고 있었다. 친구들의 질문은 한국을 방문할 때마다 느끼는 죄책감과 설렘과 피곤함과 흥분이 뒤섞인 그 알싸한 감정을 잠재우고, 서로에 대한 변함없는 우정을 확인하기라도 하듯 공유하고 있는 추억을 레파토리처럼 읊어볼 필요도 지운채, 바로 마음 속 깊이 걸어 들어와 내가 현재 어떠한 삶을 살고 있는지, 요즘 어떠한 것에 설레거나 밤잠을 설치는지 돌이켜보게 만들어주었다. 질문에 대한 나의 대답을 더듬더듬 조심스레 담고 있노라면 정신없이 살아온 미국에서의 삶이 조금은 정리가 되는 듯 했고, 내가 정말 고향에 돌아와 휴식을 취하고 있구나 실감이 났다.


대학 졸업 이후 우리 셋은 다른 길을 걸었다. 한 친구는 대기업에서 승승장구하고 있고, 한 친구는 세계를 누비고 있고, 나는 미국에 정착했다. 20대의 시간이 앞으로의 더 드넓은 삶의 방향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그 당시의 우리는 알지 못했던 것 같다. 강의 상류 같은 지점에서 배를 띄웠지만 각자 다른 갈림길을 택한 셈이다. 어른의 삶이라는 게 살면 살수록 더 헷갈리고, 내 앞에 높인 길이 제일 거칠어 보이고, 그렇게 마음이 버거워 지는지라, 다른 사람에게 질문하는 법조차 잊어버린 채 부서진 소통을 하게 되기 쉬워지는 것 같다. 저 멀리 타인의 삶을 망원경의 왜곡된 렌즈를 통해 바라보며 내가 걸어온 길에 견주어 다른 길을 걷고 있는 상대를 평가하면서 말이다. 나는 오랫동안 그 과오에서 자유롭지 못했고, 그런 식으로 나를 불편하게 하는 사람들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친구들은 나라는 사람을, 나의 과거를, 오롯이 우리의 대화 속에서 기억하고 있었다. 내가 '블랙박스'라고 칭할 만큼 잊고 있었던 나의 과거 발언들까지 생생하게 읊을 뿐 아니라, 나의 과거 의견 혹은 질문에 대한 답변을 몇 년이 지나고 나서야 들려주기도 했다. 내가 특별한 말을 해서였다기 보다는, 그녀들이 특별한 마음으로 들어주어서였다. 오랫동안 가슴 깊이 새겨둘 만큼의 애정과 열린 마음으로 나의 말을 경청해 주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은 엄청난 행운이자 복이 아닐수가 없다.




노트든 커피잔이든 너무 예쁜 선물을 받으면 선뜻 쓰지 못하고 그것을 사용할 수 있을 특별한 기회를 기다리기 마련이지만 (우리 모두 몇년 째 공백으로 남아있는 노트 몇 권쯤 가지고 있지 않던가) 나는 미국에 돌아오자마자 친구들에게 받은 이 두 선물을 일상의 가장 가까운 곳에 두었다. 아침마다 친구의 커피잔에 좋아하는 커피를 담으며 친구의 노트북에 하루의 작은 다짐을 적어 내려가는 새로운 습관도 들이게 되었다. 신기하게도 안마시던 블랙커피에 빠지게 되었고, 평소에 귀찮아하던 손으로 적는 일기가 좋아져서 하루에도 몇번씩 노트를 열어보게 된다.


무엇보다도, 친구들의 선물을 바라볼 때마다 나 역시 "지금 네 마음은 어떻니?"라고 묻게 된다. 빛나는 눈으로 상대의 고백을 담아내던 친구들을 기억하며 나도 그녀들처럼 타인에게 더 많이 질문하고 더 신중하게 들어보자 다짐한다.






Cover Image: Photo by Alina Vilchenko from Pexe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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