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헛된 노력

2020年의 七月 자기반성

by 스타차일드

이 글은 며칠 동안 정리되지 못한 생각들을 담아낸 글이다. 나이가 서른이 되어서야, 나는 나를 숨길 수 있었다. 그리고 헛된 생각들이 나를 얼마나 괴롭혀왔는지를 알게 되었다. 그동안 내가 했었던 노력들은 모두 헛된 것이라는 말, 그리고 노력의 이유가 정말 잘못되었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나는 돈을 벌기 위해서 노력했다. 공부를 누구보다 잘하고 싶은 생각도 없었고, 남들처럼 유명해지는 것도 그렇게 좋아하지 않았다. 다만, 그것이 필요했다고 생각했다. '왜 스스로를 혹사시키면서까지 노력해야 하는 것이지?', '결국, 나를 위한 것이라면, 이 과정이 괴롭다면, 그것은 나를 위한 것일까?' 하는 생각부터 온갖 복잡하고 꼬여버린 생각들이 머릿속에 가득 찼다.


나는 남을 위해 인생을 살아가고 싶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에게 굳이 좋은 말을 해주고 싶은 마음도 없다. 나를 위해 다른 사람을 도울 순 있지만, 다른 사람을 위해 도움을 줄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내 허세와 내 가식과 내 양심을 지키기 위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그럴듯한 말로 꾸며내고, 도와주는 척이라도 해야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고 좋은 사람이라는 이미지를 줄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많이 변했고, 많은 생각들이 변해왔지만 단 하나, 변하지 않는 생각이 있었다. 이것은 확고하고, 앞으로도 그렇다고 믿을 가능성이 높다. 사람은 결코 평등하거나 공평하지 않고, 모든 사람은 행복할 수 없다는 것이다. 나는 사람이 모든 것을 잃었다는, 실패했다는 좌절감을 느끼는 순간에 많은 것을 깨다는 다고 생각했다. 나 역시도 많은 좌절감으로 둘러싸인 사람이었고, 그럴 때마다 소중한 것들을 조금씩 떼어내기 시작했다. 사람과의 관계를 정리하고 내가 그들에게 줄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구분하고, 내가 세상에서 가치 있어야 한다는 강박으로부터 벗어나게 하고, 노력 따위는 아무래도 좋다는 생각들까지도 말이다.


노력해야만 성공할 수 있다는, 그리고 그 성공에 대한 집착이 우리를 가난하고 외롭게 만든다는 것을 알지만, 그것이 변하지 않을 거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사람은 완전해지기 위해 불완전 속에서 살아가고 불완전하기 때문에 더 열심히 노력하고 행동한다고 믿어왔다.


그리고 그렇게 서른이 되었다. 서른이 되었고, 서른을 지나고 있다. 나는 사람이 싫어졌다. 추악한 모습을 엿볼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내가 글을 쓰는 것도 결국 나를 위한 일, 이 글을 누군가는 읽겠지만, 어떤 평가를 내리든 관심이 없어졌다. 예전 같았다면, 인스타그램의 댓글을 보듯 예민하게 바라봤을 텐데 말이다. 다른 사람의 호의를 무시하는 것도 어쩌면 일상이 되어버렸을지도 모른다. 귀찮은 상황이 발생하긴 싫어서 겉치레로 호의를 돌려주곤 있지만, 그 사람도 그럴 것이다. 겉치레로, 나에게 호의를 베푼다는 것이다.



모르는 것이 너무 많아 실험으로 가득 찬 인생과 삶


그렇다. 내 모든 생활과 노력들은 그저 하나의 실험과정이었을 뿐이다. 나에게 가족이 있는 과정들과 그래도 꽤 오랜 인연을 이어오고 있는 사람들과의 관계, 내가 최악의 절망에 빠졌을 때, 진심으로 나를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은 결코 없다는 것은 꽤 슬픈 일이다. 마음이 아플 순 있겠으나 나를 위해서, 오로지 나의 존재를 지키기 위해서 희생하는 사람은 가족조차도 없을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가족이 가슴 아픈 사연이며, 오래된 과거이자, 추억이고 소중히 지켜져야 할 시간이라고 여길 것이다.


때론 만들어지고, 때론 숨겨져야 했던 내 시간들은 어떤 보상도 받지 못할 거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나는 안다. 내 존재는 정신적인 측면에서 살펴보자면 때론 우울감을 동반한 현대 스트레스에 의한 과민반응 정도로 치부할 수 있을 거라는 것이다. 하지만, 의외로 나는 정상적이라고 불리는 사람들보다 꽤나 부지런하고 청결에도 예민하며, 작은 시간들을 쪼개 의미 있는 시간으로 채우기 위해 노력해왔다는 것을 나름대로 증명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니, 애초에 정상적이라는 개념에 대해서 관심이 없다. 나는 그저 내가 정상적인 범주에 들면 적어도 귀찮은 일이 없을 테니까, 그거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주 죽음에 대해 망각하고 거부반응을 느끼지만, 나는 죽음에 가깝다. 나는 언제든지 내가 죽어도 된다고 생각하며, 세상에서 가장 공평한 것은 죽음이라는 것을 안다. 어느 누구나 죽음이라는 형태로 되돌아간다. 살아있을 때 얻었던 모든 것들을 버리고 완전한 무의 형태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누구나 그 미래는 정해져 있다. 그렇기 때문에 너무 억울할 필요는 없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믿지는 않지만, 믿을 수밖에 없는 벗 그리고 배우자


사람은 사람이 살아가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중요한 것들을 나열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사람이라는 것이 처음엔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렇다. 훗날 어떻게 될진 모르겠지만, 나는 지금 내가 사랑할 수 있는 것들을 사랑할 수밖에 없다. 사랑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사랑할 수 있는 것이 없어진다.


나를 사랑해보라는 말에 대해서 어떻게 행동을 해야 하는지 오랫동안 고민했다. 나에게 좋은 옷과 음식을 마련하고 내 즐거움을 우선적으로 생각하며, 나를 위해서만 생각하는 것이 나를 사랑하는 방법일까? 혹은, 인위적으로 '나는 가장 사랑스러운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나를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걸까? 아니, 그렇지 않다.


나를 사랑하라는 말에 대해서 나는 이 형편없는 말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현혹시키는지 알 수 있게 되었다. 오히려 그 말을 들었을 때, 나는 코웃음을 쳤다. 실체 없는 그 말에 사람들은 무엇을 느끼고 어떻게 시간을 보내야 하는 것인가에 대한 내용은 전혀 없었다. 나를 사랑하라, 그리고 이웃을 사랑하라, 마치 성경 구절에 나올법한 이러한 이야기들은 행동양식이 없다.


말의 범주가 넓을수록 구체적인 내용은 왜곡되어 버린다. 그러면, 나를 사랑하기 위해서 또는 나의 쾌락을 위해서 범죄를 저질러도 좋은가? 정말 나를 위해서라면 타인에게 해를 입혀도 좋은 것일까? 나를 위해서라면 어떤 악행도 괜찮은 것일까? 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괜찮다는 말이라면 이 세상에서 이기적으로 살아가는 방법에 많은 공감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서른, 추악한 내면을 보고 가혹한 인생을 살아가다.


나에겐 여전히 어려운 단테의 작품들의 구절을 읽어보면서 지옥이 따로 없다는 생각을 종종 한다. 그렇다. 살아가는 것은 때론 지옥이다. 풋풋했던 첫사랑의 아련함도 실망과 절망으로 다가오는 일이 흔하다. 누군가의 죽음이나 마음의 배반은 사람을 우울감에 빠지게 만들기도 한다. 가장 의지하고 믿었던 사람이 떠나가는 것은 이 시대에 너무 흔한 일이 되어 버렸다.


관계를 끝난 것은 상실의 시작이다. 지금이야말로 우리는 상실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듯하다. 오래된 과거에 살지 않았으니, 굳이 과거 이야기를 꺼낼 필요도 없다. 지금 이 순간, 내가 잘 알고 있는 시간들에 대해서 관찰하고 묘사하고 표현하고 싶었다. 그게 조금 알아가는 재미가 있어서다. 마치, 퍼즐을 맞추든, 안개를 걷어내는 궁금했던 것들, 가려져있는 것들이 선명하게 보이는 것이다. 나는 거기서 쾌감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나라의 정서에 따라서 이것은 악취미로 평가받기도 한다. 사람이 살아가는 공간에서는 정해진 규범이 있었다. 그래서 생각조차도 자유롭게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자유로운 생각들이 외부로 드러나는 순간, 그 사람은 마녀사냥을 당하는 경우를 많이 볼 수 있다. 정해진 규범과 사고방식이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우주의 별처럼 헤아릴 수 없어, 결코 알 수 없다.


젊은 날에 나는 살아남기 위해서 조급증과 강박증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는 나 혼자만의 모습이 아닌 많은 사람들의 모습에서 엿볼 수 있었다. 정말 많은 사람들이 여유가 없었고 나와 같은 비슷한 실수들을 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살아남기 위해서, 돈을 벌기 위해서, 남들보다 더 나아지기 위해서 경쟁하고 자신을 혹사시켰으며, 삶의 즐거움과 여유를 찾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서른이 되어서야 섹스의 의미를 알았다. 단순히 쾌감을 위해서 필요한 것이 아니라, 사람과의 관계를 확인하기 위해서도 정말 중요한 것이라는 걸 알았다. 그것을 이해하기까지 그것을 이해하지 않으려고 한 사람들에게 속았고, 그들도 피해자라는 것을 알았다.


각종 사회적 문제에 대한 해결책은 개인에게 찾기 어렵다. 마찬가지다. 나는 인간적인 것과 인간적인 삶, 사람다운 삶에 대해서 의구심이 많았다. 공장 찍어내듯 비슷한 사람들이 넘쳐나는 세상에서 나는 그저 돼지 등급을 매기듯, 사람도 그렇게 보였을 뿐이었다. 적어도 거리를 둘러보면 몇몇을 제외한 많은 사람들은 전부 비슷했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별처럼, 멀리서 보면 그저 다 비슷하게 반짝반짝 빛나고 있을 뿐이었다. 각각 개인의 인생을 들여다보지 않으면 특별한지 알 수 없다. 특별한 것은 굳이 들여다보지 않아도 더 밝게 빛날 테지만, 그 외의 존재들은 대부분 배경이 된다.



사랑받지 못한 사람, 애정을 갈구하다.


나는 많은 사랑을 받지 못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고독하게 살아가고 있으니 말이다. 물론, 과거에는 꽤나 많은 사랑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사람을 만나는 것에 익숙하고 낯가림 없이 쉽게 대화할 수 있고, 나의 주장을 펼칠 수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내가 사람을 멀리하게 된 이유는 그 속이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추악한 모습들이 너무 잘 보였다. 순수한 마음이라곤 없었다. 사람에게 그것을 기대한 것은 아니지만, 그런 사람들과 가까이해서 내게 좋을 것이 없다는 생각 때문에 나는 사람을 걸러냈다. 사람을 가려서 사귀곤 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나라는 사람이 사랑을 받는다고 해서 그것을 온전히 사랑으로 느낄 수 있을까에 대해서 의문이 들었다.


의심이 많은 사람은 사랑을 사랑으로 보지 않는다. 나는 모든 것에 대가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사랑을 받았으면 그에 합당하는 무언가를 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으면 끊임없이 요구해오기 때문이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내가 아쉬울 것이 없는 사람들을 주변에 두는 것이 편할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로 특별히 원하는 것도 없고, 기대하는 것도 없으니, 사이가 틀어질 일도 없고 갈등이 생길 이유도 없었다. 그런 관계들은 생각보다 질기고 오래갔다.


내가 알고 있는 세계의 사람들은 마음이 외로워 몸을 주고, 돈도 주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었다. 생활에서 쾌락을 찾지 못해 무언가를 갈구하듯 계속해서 찾아다니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을 보면서 안쓰러운 모습과 그들처럼 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들은 스스로가 행복하고 만족스럽겠지만, 보는 사람의 마음에서는 안쓰럽고 볼품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들 인생이기에, 나는 간섭할 권리도 이유도 없었다.



방황하는 사람들은 많다.


생각보다 방황하는 사람들은 정말 많았다. 자신이 뭘 잘하는지도 모르고, 자신보다 뛰어난 사람들은 정말 많고 흥미마저 잃어버린 사람들은 결국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살아가게 된다. 어차피 노력해도 안되니까, 그냥 포기해버리는 것이다.


나도 안다. 노력해도 천재를 이길 수 없다. 노력해도, 뛰어난 사람은 이길 수 없다. 노력은 자신을 위한 것이다. 그나마 자신의 상황에서 조금이라도 더 나아지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천재를 이길 필요는 없다. 더 잘나질 필요도 없다. 굳이 경쟁할 필요도 없다. 하지만, 그래도 사람이기에 배가 아프고 질투와 자괴감에 빠지는 것이다.


나도 안다. 안다고, 그렇지만, 그것이 너무 사랑스러운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 같다. 모순적인 말이지만, 그럴 때 가장 사랑스러운 모습인 것 같다. 노력하고, 좌절하고, 그리고 다시 일어서고 그런 모습을 보는 것이 열정마저도 느낄 수 없이 모든 것이 무미건조한 인생보다는 더 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현실이 대충 어떤지, 세상 굴러가는 것이 어떤 모습인지 조금이라도 엿보게 되면 생각하는 것이 조금 많이 달라진다. 조금 둘러보니까 알겠다. '그렇게 노력 많이 안 해도 되겠더라', '노력하는 것보다 그냥 살아간다는 생각으로 살아가는 것이 모든 것을 나아지게 하더라'와 같은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내가 그 사람을 몰랐다면, 그 사람이 천재였는지도 몰랐을 거고, 그 사람의 미래조차도 알지 못했을 것이고, 그 사람의 존재조차도 몰랐을 것이다. 사람은 아는 만큼 보이지만, 모르는 만큼 까마득하기 때문에 그 사람의 존재마저 지워버리는 것이다.


내가 열등감을 느끼는 존재, 비교되는 존재를 내 머릿속에서 지워버리는 것이다. 살아가면서 그런 사람들은 계속해서 바뀔 것이고 나의 상황과 비교해서 계속해서 나에 대한 평가를 내릴 것이다.


그런 기준을 지워버리는 것이다. 그러면, 경쟁하지 않아도 되고 조금은 세상이 즐거워진다. 그래서 내가 요즘은 조금 즐거운 기분이 드는 것 같기도 하다. 이런 방황스러운 글을 쓰면서도, 나는 내 마음에 정착한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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