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버의 ‘나–너’를 따라 생각하다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외로움과 불안이 막연해진 세상에 살고 있다. SNS로 모두가 연결되어 있는 사회라는 말이 무색하게 세상은 분열되어 있고 혐오와 갈등으로 가득 차 있다. 개인의 삶을 볼 때도 끊임없이 바뀌는 세상 속에 어떻게 적응하며 살아가야 할지 막막하고 불안해진다. 이런 세상 속에 우리는 어떻게 삶의 감각을 되찾을 수가 있을까?
최근에 철학자 마르틴 부버의 『나와 너』를 읽으며 우리가 잊고 살았던 한 가지 감각을 다시 한번 떠오를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관계에 대한 감각이다. 부버는 우리 삶의 본질은 관계에 있다고 얘기한다. 부버가 말하는 ‘관계’는 단지 사람과 사람 사이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그것은 나무와의 관계, 강과의 관계, 자연과의 관계, 그리고 지금 내 앞에 놓인 한 잔의 커피와의 관계까지 포함한다.
이때 자연이나 사물과의 관계는 단순한 은유가 아니다. 세상 모든 것을 주체로 바라보는 순간, 그때부터 관계는 시작된다. 관계의 핵심은 상대방이 의식을 가지고 있는지의 여부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핵심은 상호성에 있다. 내가 자연 앞에서 잠시 걸음을 멈추고 휴식을 취할 때, 자연은 나에게 바람을 건네고 초록빛 풍경을 내어준다. 이를 통해 우리는 치유를 경험하기도 하고 철학자처럼 어떤 지혜나 통찰을 얻기도 한다. 그 순간 나는 자연과 어떤 인격적인 관계 안에 들어선다. 이런 관계의 감각을 통해 우리는 불안과 고립으로부터 벗어나 다시 세상과의 연결을 경험할 수 있다.
이 말이 어색하게 들릴 수도 있다. 우리는 관계를 중심으로 세계를 바라보는 훈련을 받아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연을 이해할 때 그것이 어떤 법칙과 원리로 움직이는지를 묻는다. 자연을 하나의 대상으로, 분석 가능한 대상으로 바라본다. 사람을 대할 때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 사람을 존재 그 자체로 마주하기보다는, 그 혹은 그녀가 나에게 어떤 이득을 가져다줄 수 있는지를 무의식적으로 생각한다.
이처럼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은 대체로 3인칭에 가깝다. 그것(It), 그(He), 그녀(She)라는 대상의 언어로 세계를 정리한다. 이는 설명하고, 규정하고, 거리 두는 언어다. 그러나 이 언어 안에서는 관계가 쉽게 사라진다. 대상은 이해할 수는 있어도, 마주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세상 모든 것을 향해 진심으로 ‘너’(You)라고 부르지 않는다. 오늘날 우리는 눈앞에 커피를 향해 “오늘 나에게 맛과 감각을 통해 또 뇌의 신경계를 통해 무슨 얘기를 하려고 하니?”라고 묻지 않는다. 모든 시간과 공간이 동시에 존재하는 양자역학적 우주를 향해 “너가 내 삶을 긍정적으로 이끌고 있음을 신뢰할게, 그리고 나는 내 현재에 집중해 내가 할 일을 할게”라고 말하지 않는다. 헤르만 헤세의 작품 『싯다르타』에 나온 것처럼 '강의 소리'를 들으려고 하지 않는다.
어쩌면 정확히 말해, 그렇게 부르는 법을 잊어버렸는지도 모른다.
부버가 말하는 ‘나–너’(Ich-Du)의 관계는 2인칭의 세계다. 설명의 세계가 아니라 응답의 세계다. 그 안에서 세계는 더 이상 정복하거나 분석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말을 걸고 말을 건네받는 상대가 된다. 관계를 중심에 놓는 순간, 세상은 다시 살아 있는 얼굴을 드러낸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자연, 우주, 진공, 도덕법칙, 진리 등 그 무엇과도 인격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다. (부버는 모든 것은 '너'로 통한다고 말한다) 그것들이 인간처럼 생각하거나 말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 앞에서 내가 열려 있고, 어떤 응답이 나에게 되돌아오기 때문이다. 관계는 그렇게 성립한다. 의식의 유무가 아니라, 마주함과 되돌아옴 속에서.
지금 같은 불안과 공허의 시대에 어쩌면 우리가 회복해야 할 것은 새로운 지식이 아니라 관점일지도 모른다. 세계를 다시 2인칭으로 부르는 관점, 존재들을 다시 ‘너’라고 호명하는 용기 말이다. 그 순간, 세계는 더 이상 고립된 대상들의 집합이 아니라, 관계로 엮인 하나의 장이 된다. 그리고 그 안에서, 나 역시 다시 살아 있는 존재로 돌아온다.
“모든 참된 삶은 만남이다.” (All real living is meeting.) - 마르틴 부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