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새 벤치 주변은 아침 햇살로 인해 안갯속의 긴장감은 사라지고 빛의 열기로 가득했다. 불어오던 바람도 소리를 낮추고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첫 장을 넘기자 첫 줄에 그녀가 만년필로 굵게 쓴 '19991031'이란 숫자가 눈에 들어왔다. 나는 소리 내어 그 숫자를 읽었다. 무슨 의미일까.
오후의 햇살은 따뜻한데 피부에 닿는 바람은 찼다. 나는 찬바람에 몸을 웅크리고 은행동 거리를 걸었다. 이 거리에는 한 집 건너로 레코드 판매점이 있었기에 걸음을 옮길 때마다 다양한 노래를 들을 수 있었다. 오늘은 무슨 중요한 날인지 보이는 이들은 거의 젊은이들 뿐이었다.
문화의 거리가 끝날 즈음 나는 걸음을 멈췄다. 한 레코드 가게에서 들려오는 노래 때문이었다. 노래가 끝나고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사장인 듯 젊은 남자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문을 열자 그는 인사를 하려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말없이 내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사장님! 조금 전 노래 제목이 뭐예요?>
<고등학생?>
<네. 노래 제목 좀 알려주세요.>
<'사랑을 위하여'라고 해. 다시 한번 들어볼래?>
<네. 감사합니다. 전 밖에서 들을게요.>
밖으로 나온 나는 레코드 판매점 스피커를 통해 들려오는 노래를 듣고 서있었다. 노래의 첫 부분에 흘러나오는 음악이 너무 맘에 들었다. 내가 자리를 떠나지 않자 그 가게에서는 한 노래만 계속 틀고 있었다. 정신을 차리자 주변은 깜깜해져 있었다. 한 남자가 차에서 내리더니 나를 향해 걸어왔다.
<잠깐 얘기 좀 할 수 있을까?>
내가 주변을 두리번거리자 그 남자는 당혹스러워했다. 지갑에서 명함 한 장을 꺼내 나에게 줬다.
<나 이상한 사람 아니야. 정말 아니야.>
<그럼 여기서 얘기해보세요.>
그 사람은 나의 말투가 어눌하게 생각되었는지 다시 물었다.
<집은 어디지? 내 차로 가면서 얘기 좀 더하고 싶은데.>
<괜찮아요. 그리고 아빠와 약속이 있어서 기다리고 계실 거예요.>
<그럼 더 잘됐네. 나도 거기까지 같이 가도 될까?>
정말 이상한 사람이었다. 전혀 이상하지 않은데 이상한. 그 사람과 함께 아빠와 약속한 장소까지 걸어갔다. 난 그 사람이 누구인지 왜 그러는지 몰랐다. 아빠는 함께 걸어오는 그 사람을 보고 잠시 놀라는 듯하더니 빠르게 우리를 향해 걸어왔다.
<은채야! 이분은.....>
<아빠를 뵙고 싶다고 해서 함께 왔어요.>
내가 아빠에게 그 사람이 준 명함을 내밀자 그는 다시 지갑을 꺼내 정중하게 명함을 아빠에게 건넸다.
<차광석입니다.>
<사공명입니다.>
<혹시 이번에 귀국하신.....>
<네. 몇 년간 부모님을 찾아뵙지 못해 잠시 이곳에서 지내고 있습니다만 저희 딸은 무슨 일로..>
아빠는 내가 받은 그 사람의 명함을 나에게 돌려주며 그 사람에게 물었다.
<긴히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 시간 괜찮으시면 자리를 옮기셔도 되겠습니까?>
<죄송합니다만 오늘은 집안 행사가 있어 어렵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제가 다시 연락드려도 될까요?>
<무슨 일이신지는 모르겠지만 연락 기다리겠습니다.>
<시간 내주셔 감사합니다.>
그는 몇 번을 돌아보며 나를 쳐다봤다. 나를 쳐다보던 그 눈빛을 잊을 수가 없었다.
첫 장은 여기서 끝나 있었다. 첫 줄의 '19991031'이란 숫자는 아버지와 그녀가 처음 만난 날이었다. 언젠가 아버지 서재에 들어갔다 본 메모지의 숫자와 일치했다. 그런데 그날 두 사람은 그렇게 헤어졌던 게 아니었나.
- 'good evening'으로 이어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