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읽던 노트를 들고 벤치에서 일어나 테라스 끝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호수를 내려다봤다. 호수 위에 비친 나무들의 나뭇잎도 곱게 단풍이 들어있었다. 호수 위에는 곧 어디론가 떠나야 할 여행객들이 먹이 저장을 위해서인지 부지런히 물속에 잠겼다 떴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나는 난간에 반쯤 기대어 다시 노트를 펼치고 다음장을 넘겼다.
나는 집으로 돌아와서도 명함을 준 그 사람이 궁금했다. 아니 아버지에게 나에 대하여할 얘기가 뭐였는지 궁금했다. 스코틀랜드에서 태어나 엄마를 따라 일 년에 한두 번씩은 한국에 들어왔지만 이곳에 아는 사람은 없었다. 그 사람이 너무 궁금해 참을 수가 없었다. 벽에 걸려 있는 시계는 9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망설이다 명함에 있는 전화번호를 눌렀다. 신호가 가고 중저음의 남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쉽게 용건을 말하지 못하고 더듬거리자 그 사람도 생각지 못한 전화에 당황했는지 잠시 말을 잇지 못하고 침묵이 흐른 후 목소리가 들려왔다.
<혹시 은채?>
깜짝이야. 그 사람은 내가 전화하리란 것을 알고 있었는지 바로 나의 이름을 불렀다.
<네. 저희 아빠에게 하시려던 말씀이 뭔지 궁금해서 전화드렸어요.>
<그래. 전화로는 말하기가 어려운데. >
그 사람은 나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있었다.
<그럼 끊을게요. 실례했습니다.>
전화를 끊겠다는 나의 말에 놀란 듯 그 사람이 먼저 제안을 했다.
<지금 은채가 있는 곳이 어디지? 알려주면 내가 지금 그곳으로 갈게.>
<몇 시까지 오실 수 있나요?>
<음. 지금 출발하면 10분 정도 소요될 거 같아. 현채 있는 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거든.>
그 사람은 정말 10분 후 집 앞에 도착했다. 나는 모두가 잠든 것을 확인하고 살짝 집 밖으로 나와 그 사람이 기다리는 차에 올랐다. 그 사람에게는 영화배우 마릴린 몬로가 즐겨 쓴 향수 샤넬 넘버 5의 향이 은은하게 배어 있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 사람 또한 이 향을 좋아한다고 하였다. 그 사람은 호기심이 가득한 나의 표정을 금방 알아챘다.
<여기서 멀지 않은 곳에 호수가 있는데 그쪽으로 가도 될까?>
내가 쉽게 대답을 하지 못하자 그 사람은 나를 안심시키기 위해 약속을 했다.
<은채가 듣고 싶어 하는 질문에 대답만 하고 바로 올 거니까 걱정하지 마.>
<좋아요.>
그 사람과 난 달빛이 가득한 호수 벤치에 앉았다. 주변에는 산책을 나온 이도 있었고 데이트를 하기 위해 이곳을 찾은 연인들도 눈에 띄었다. 그 사람은 금방 말을 잇지 못하고 물소리가 들려오는 호수만 바라봤다. 호수는 물결이 찰랑거릴 때마다 진주알을 뿌린 듯 반짝거렸다. 그 사람의 얼굴 또한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나는 처음으로 어떤 두려움에 온몸을 떨고 있었다.
나는 오랫동안 아버지 곁에 있었으면서도 그녀가 말한 그날의 아버지와 만나는 건 처음이었다. 언제나 당당하고 자신만만한 남자였기에 나에게는 낯설기도 하였지만 아내와 일찍 사별한 한 남자가 처음 만난 어린 소녀 앞에서 갈등하는 모습이 안쓰러웠다. 나 역시 그녀에 대하여 궁금해졌다. 이 노트를 보낸 이유가 무엇인지. 그리고 나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하고 싶은 걸까.
환청인 듯 아닌 듯 전화벨이 울리고 있었다. 나는 급히 수화기를 들었다.
- 가을에 온 손님으로 이어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