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바람은 불고.
알람이 울리지 않았는데 눈이 떠졌다. 온통 검다 못해 잿빛으로 변해버린 밤의 수호자가 되어 내 방안을 지키고 있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이 고요함이 싫어 왁자지껄한 도시로 나갈걸 후회할 때도 있었지만 그때뿐이었다. 시간의 흐름과 계절의 변화를 가장 먼저 느낄 수 있는 이곳이 좋아 떠나는 것을 망설이고 있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부터 한두 번은 꼭 잠에서 깼다. 아무리 물에 젖은 솜뭉치처럼 지쳐 돌아와도 같은 시간이 되면 어김없이 눈이 떠졌다. 오늘도 알람 시간보다 두 시간 정도 일찍 깨었다.
창밖은 깜깜했지만 큰길은 가로등 불빛으로 인하여 주변이 환했다. 처음에는 자야 할 시간에 깨어 있는 게 신경 쓰이고 힘이 들었다. 그러나 이제는 몸도 적응했는지 혼자 깨어 있음을 즐기고 있다. 그 어떤 잡음 없이 온전히 자연의 소리를 듣고 느낄 수 있어 좋았다. 심지어 가슴속 깊은 곳에서 뭔가가 몽글거리며 설레기까지 하였다. 다시 잠들 수 없을 거 같아 진하게 커피를 내려 테라스로 나갔다. 따뜻한 커피잔에서 피어오르는 김과 향이 섞여 덜 깬 나를 유혹했다.
어제 오후, 비서실 김 과장이 건네준 특급이라고 찍혀 있던 노란 봉투가 생각났다. 외부 약속 때문에 서류가방에 넣어둔 채 잊고 있었다. 테이블에 잔을 내려놓고 방으로 들어갔다. 노란 봉투에는 보낸 이의 이름도 주소도 없었다. 갑자기 맘이 변해 퀵으로 보낸 듯싶었다. 봉투 안에는 색이 살짝 바랜 노트 한 권이 들어있었다. 노트 표지를 넘기자 반으로 접혀있는 메모지 한 장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메모지를 주운 후 테라스로 나갔다. 반쯤 남아있던 커피는 차갑게 식어 버렸고 날은 희미하게 밝아 있었다. 차갑게 식어버린 커피를 버리고 따뜻한 커피를 채워 테라스로 나갔다. 메모지의 내용은 길지 않았지만 오랜 시간이 흘렀어도 잊히지 않았던 눈에 익은 필체였다.
잘 지내고 있을 거라 믿으며 그동안의 안부를 물어요.
오늘 아침, 제일 먼저 한 일이 거울 속의 나를 본 거예요. 거울 속에 있는 내가 너무 낯설어할 일도 잊은 채 멍하니 앉아 있다 창밖에서 들려오는 새들의 지저귐에 놀라 정신을 차렸습니다. 정말 시간이 많이 흘렀어요. 이제는 되었다 싶어 용기를 내봅니다. 은채.
메모지를 내려놓고 노트를 펼쳤다. 그녀에게 이 노트를 주었을 때는 줄만 가득한 노트였는데 지금은 그녀의 글씨가 가득 채워져 있었다. 고개를 들어 숲을 바라봤다. 점점 주변은 밝아오고 희미했던 사물들이 가깝게 다가오고 있었다. 나뭇잎에 맺혀 있는 물방울 때문인지 잎의 색이 선명하게 보였다.
아침 햇살은 나무들이 길게 늘어선 숲을 찾아오고 그런 숲을 바라보고 있는 내 얼굴에 닿는 느낌도 따뜻해지며 가깝게 느껴졌다. 이렇게 밤의 긴장감이 사라지고 있었다. 세차게 불었던 바람도 이제는 소리를 낮춘 채 나를 지켜보고 있다.
첫 장을 넘기자 첫 줄에 만년필로 쓴 '19991031'이라는 숫자가 눈에 들어왔다. 나는 소리 내어 그 숫자를 읽었다. 무슨 의미인지는 몰라도 어떤 날을 적어놓은 거처럼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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