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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석금 Apr 19. 2023

나만의 낭만이었을지.

아팠지만 찬란하였네.

지난주 토요일은 깨어보니 비가 오고 있었다. 하늘은 온통 잿빛인 채 우리가 알아챌 수 없는 깊은 속내를 감추고 있었다. 마치 그 아픈 시대를 살아간 고귀한 청춘들처럼......

화창한 날도 좋아하지만 여우비가 잠시 내렸다 그치는 거처럼 날이 밝으면서 비 오는 날을 정말 좋아한다.

그중에서도 한적한 시골길을 달리다 잠시 멈춰 차창을 통해 내리는 빗소리를 들으며 멍 때리는 것을 좋아한다. '비 오는 날의 수채화'라는 노래도 있지만 비속에서 산과 들을 바라보는 그 시간은 자연이 내게 허락한 선물 중의 선물이었다. 산 아래에서 중턱까지 옅은 비안개가 드리워져 있고 그 산아래 색색의 지붕과 짙어져 가는 시간이 그린 연녹색의 나무잎새와 붉게 물들어가는 꽃들을 보면 자연이 그린 이 풍경이야말로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토요일 오전이면 늘 약속이 잡혀 있어 한 시간쯤 외출했다 집으로 돌아오니 남편은 이미 준비를 끝내고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은 어느 쪽으로 가볼까?"

"논산에 드라마 '미스터 선샤인' 촬영지가 있다는데 우리 거기 가볼까요?"

"그런 곳이 있었어? 좋아. 그럼 오늘은 그쪽으로 방향을 잡자."

남편은 항해사가 된 양 들뜬 모습이었다. 우산 하나를 챙겨 들고 집을 나섰다. 굵게 내리던 비는 가늘어졌지만 우산에 부딪히는 빗소리는 맑고 투명했다. 내비게이션에 '논산 선샤인랜드'를 입력하자 자꾸만 고속도로로 안내했다. 국도를 이용하기로 정하고 지하 주차장을 나와 하늘을 바라보니 기분 또한 가벼워졌다.


주말이라 그런지 비가 오는데도 도로에는 차들이 많았다. 골목길을 이용하여 대전을 벗어나자 비로소 차와 차사이도 여유가 있었다. 아는 길이라 내비게이션을 껐다 중간에 켜서 그런지 우리는 가지 않았던 시골길을 달리게 되었다. 처음 달리는 길이었지만 맘은 즐거웠다. 선루프(sunroof)를 통해 들려오는 비와 크기가 다르게 맺힌 빗방울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꼬불꼬불 길을 따라 큰길로 나오자 눈에 익은 간판들이 하나 둘 보이기 시작했다. 논산훈련소 앞을 지나  3시가 지나서야 '선샤인스튜디오' 주차장에 도착했다. 논산은 남편의 고향이기도 하였지만 엄마가 계실 때 차 타는 것을 좋아한 엄마 덕분에 주말이면 가끔 들리던 곳이기도 했다.   


매표소에서 입장권을 끊고 안으로 들어갔다. 드라마 '미스터 선샤인'을 방영할 때도 재방송할 때도 정말 열심히 시청했는데 조금 더 일찍 이곳을 왔다 갔다면 재방송이라도 더 재미있고 의미 있게 볼 수 있지 않았을까 싶었다. 드라마 제목이 '미스터 선샤인'이라니. 처음부터 뭔가 아련하게 그리움 같은 게 느껴졌다. 드라마가 방영될 때는 보는 내내 감탄했다. 화려한 영상미에 지금도 떠오르는 배우들의 명대사까지. 배역에 빙의된 듯한 배우들의 연기를 보며 어느 때는 행복하다 또 어느 때는 가슴 시린 절절함에 함께 아파했던 거 같았다.

 

입구 오른쪽으로 살짝 경사진 길을 따라 걸어가자 유진 초이가 잠든 묘지가 보였다. 배우 이병헌이 열연했던 유진초이 실존인물 황기환 애국지사가 100년 만에 고국으로 귀환했다는 얘기를 남편에게 말하자 놀라는 눈치였다. 남편은 드라마 보는 걸 즐기지 않았기 때문에 드라마 정보에는 문외한이었다. '아! 실존 인물이었구나. 얼마 전에 뉴스에서 본 듯 해.'라며.


묘지를 지나자 글로리 호텔이 보였다. 점심 식사 때가 한참 지난 후라 배속에서도 항의가 빗발쳤다.

남편의 배에서도 내 배에서도 '꼬르륵'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글로리호텔 안으로 들어가자 커피와 간단한 쿠키 등을 팔았다. 커피와 샌드위치를 포장해 밖으로 나와 벤치에 앉아 속을 달랬다. 문득 꽃잎이 비처럼 흩날리던 어느 날 밤에 달빛을 받으며 걸어가던 세 사내가 떠올랐다. 한 여인을 사랑하며 또 거대한 우리의 귀중한 조국을 사랑하는.


몇 분만 지나면 이곳도 문을 닫는다. 급하게 드라마 속에 나왔던 한약방 - 홍예교 - 대안문 - 잡화점 - 한성전자 - 애신방 - 동매방 - 주점 - 한성전기 - 만물상 - 블란 셔 제빵소 - 경의선 - 한성외국인묘지를 마치 우리가 주인공이 된 듯 기쁘게 그러나 엄숙하게 걸음을 옮겼다.    


넝쿨장미가 제시간이 오기를 기다리쇠로 만든 울타리를 잎과 줄기로 휘감고 있었다. 장미꽃이 빨갛게 피어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우리는 넝쿨장미가 피는 계절에 다시 찾아오기로(see you again) 약속하고 주차장으로 향했다.


비는 이곳에 도착하며 바로 그쳤다. 이름도 나이도 얼굴도 모르는 우리의 선조들이 힘차게 걷고 뛰어다녔을 저 푸른 들판 위에 일곱 색깔 무지개라도 있었음 이 여정이 더욱 아름답지 않았을까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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