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그의 모습이 더 이상 보이지 않자 차 창을 내렸다. 시간이 이른데도 피부에 와닿는 열기로 다시 창을 올려야만 했다.
'얼마후면 저 들판의 벼들도 카페 마당에 있던 감나무도 노랗게 익어가겠지.'
가슴속 깊은 곳에 꽂혀있던 내 슬픔의 조각들이 하나씩 떨어져 나가는 기분이었다. 그래서일까! 집으로 돌아가는 이 길이 짧게만 느껴졌다.
"윤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생각은. 그냥 너랑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오늘따라 짧게 느껴진다는 생각이랄까! 고마워 정민아!
영랑 씨 만나고 나니까 무겁게 짓눌렸던 내 맘이 조금은 가벼워지는 거 같아."
"정말이야?"
"음."
"영랑 씨한테 가면서 너한테 듣기로 한 감상평은 이거로 충분해. 네 맘이 편해졌다니 이보다 더 좋은 감상평이 어디 있겠니! 윤설의 어제와 다른 오늘을 늘 바라왔다는 거 알지? 앞으로는 내가 전화하면 즉각 즉각 집밖으로 나오는 거야. 알았지?"
"알았어. 그런데 그냥 가려고?"
"음. 오늘은 여기서 헤어지자."
정민의 차는 집 앞에서 바로 굉음을 내며 어디론가 달려갔다.
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모든 게 달라져 보였다.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 그동안 무겁고 암울했던 집안 공기를 다 날려버린 거처럼 새롭게 다가오고 모처럼 편한 맘으로 정원 의자에 기대 하늘을 바라봤다. 내 지난 시간 속의 인랑은 강렬했던 그 여름, 소나기가 그친 후 만난 오색 무지개가 아니었나 싶었다.
얼마나 앉아있었을까. 시간은 흐르고 정원에도 어둠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의자에서 일어나 걸었다. 내 안에서 뭔가가 요동치고 있었다. 나는 집으로 들어갔다. 현관에 들어서자 깜깜했던 거실이 환해졌다. 괜히 거실을 어슬렁거리다 방으로 들어와 창문을 열었다. 휴대폰 벨이 울렸다.
"윤설입니다."
"이제야 통화가 되네요."
"누구시죠?"
"어제 우리 소브루에서 봤잖아요."
갑자기 훅 들어온 그의 말에 순간 가방 속의 쪽지가 생각났다.
"어떻게 저를 기억 못 하시죠? 제가 금방 잊히는 그런 얼굴은 아닐 텐데."
그의 말을 듣는 순간 미안하기도 했지만 웃음이 먼저 터져 나왔다.
"제가 뭐든 잘 잊어요."
"그건 좀 맘에 안 들지만 지금 만날 수 있을까요? 오늘 못 보면 한동안 만날 수 없을 거 같아서요."
"이미 제 이름도 제 휴대폰 번호도 알고 있으니 다시 연락 줘요."
그는 실망한 듯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도저히 시간을 낼 수 없다는 얘기죠? 그럼 부탁 하나만 할게요. 설국이란 내 이름은 꼭 기억해 줘요."
"기억할게요."
그와의 전화를 끊고 나자 약간의 흥분 같은 게 느껴지며 웃음이 피식피식 흘러나왔다. 오랜만에 침대에 누워 누군가를 생각하게 되었다.
날이 밝았다. 벌써 창 너머로 햇살이 방안 가득 비치고 있었다. 침대 위를 정리하고 거실로 나오자 긴 시간 동안 쌓여 있던 먼지들이 눈에 띄었다. 현관문을 열어놓은 채 정원을 걸었다. 얼굴에 닿는 바람결이 부드럽게 느껴졌다. 얼마 전 심은 주목나무의 잎도 제법 생기가 흐르고 있었다. 어디선가 피아노 선율이 작게 들려오고 있었다. 그동안 들리지 않았던 그리고 보지 않았던 소리와 풍경들이 눈에 들어오고 있었다. 휴대폰 벨이 울리고 정민의 목소리가 들렸다.
"윤설! 나 생각났어."
"뭐가 생각났길래 일어나자마자 전화를 걸었는데?"
"네가 봤던 쪽지의 그 설국."
"네가 그 애를 어떻게 아는데?"
"드디어 윤설에게도 궁금한 게 생겼네."
"설국이란 사람을 정민이 네가 어떻게 아는데?"
"전화로 말하기는 좀 그렇고 저녁때 집으로 갈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