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전한.
풀잎마다 이슬이 맺혀 투명하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는 내 앞에 낡은 휴대폰 하나를 올려놨다.
"비밀번호는 0110이에요."
그가 카페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휴대폰을 들었다. 잠금장치를 풀자 바탕화면에 폴더 하나가 눈에 띄었다.
날이 따뜻하다. 마치 너를 만난 그 봄처럼
걷다 보면 가끔은 푸른 초원에 이르기도 한다.
너와 함께였다면 이 추위도 덜 탔을까!
이곳은 춥다는 말로는 표현이 부족함을 깨닫게 된다. 멀리 있는 봄이 그리워진다.
거센 눈보라에도 따뜻한 커피 한 잔 덕분에 미소를 찾았다.
잘 지내고 있겠지.
이 밤 이 산의 고독한 외침이 너를 그리워하는 내 목소리인 거처럼 여겨진다.
아! 앞으로 15일.
텐트를 날려버릴 듯 무섭게 화를 내던 눈보라가 동이 터오며 잠잠해졌다.
새끼발가락이 부어오르더니 점점 감각이 없어져 간다.
어젯밤 꿈에는 너의 미소 때문에 잠을 설쳤지만 짧은 순간 너를 만나 행복했다.
인랑, 그가 남긴 짧은 메모지만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휴대폰을 내려놓고 무심히 하늘을 바라보다 두 눈을 감았다. 지나온 시간은 밤처럼 깜깜했지만 지금 이 눈을 뜨면 더 이상 지나온 시간에 얽매여 있지 않기를 바라며 조심스럽게 두 눈을 떴다. 사방이 환한 빛으로 내 눈 속에 머물렀다. 바람은 고요하고 내 맘도 한없이 평온해졌다.
"윤설!"
정민이 2층 테라스에서 불렀다. 정민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카페에 들어갔던 그도 다시 마당으로 나와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정민 씨! 내려와요."
"네."
정민이 테라스에서 사라졌다. 그는 내가 건넨 휴대폰을 만지작 거리다 쟈켓 주머니에 넣었다.
"윤설 씨! 이 말이 위로가 되지는 않겠지만 더 이상 그곳에 머물러있지 말아요. 분명히 인랑이도 그걸 바라고 있을 거예요. 그리고 현지에서 소식 오면 다시 나갈 거예요. 그때까지는 이곳에 있을 거니까 언제라도 오고 싶어지면 찾아주세요. 이렇게라도 만나서 정말 반가웠어요."
그와 얘기를 나누는 동안 날은 환하게 밝아있었다. 정민이 마당으로 나왔다.
"영랑 씨! 우리 일찍 움직여야 할 거 같아요."
"금방 만든 샌드위치와 내린 커피 있으니 담아줄게요. 가면서 먹도록 해요."
그는 카페에서 샌드위치와 커피가 들어있는 바구니를 들고 나왔다. 그리고 악수를 청했다.
그의 따뜻한 온기가 전해졌다.
"언제라도 또 와요."
"네. 고마웠습니다."
우리 차가 시골길을 벗어날 때까지 그는 그 자리에 서서 우리의 뒷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정민이 백미러로 그를 쳐다봤다.
"정민아! 영랑 씨는 어떻게 만난 거야?"
"졸업식 때 학과사무실에 와서 널 찾았는데 너랑 연락이 닿지 않으니까 절친인 나한테 전화를 한 거지."
"그랬구나."
"그때는 면도를 하지 않아서 수염은 길게 자란 데다 우리가 만났던 그 사람일 거라고는 생각 못했을 걸.
그 후 몇 번 더 널 만나게 해달라고 했는데 너한테 전하기가 쉽지 않았어."
"음."
"어제 만난 애들 중에 연락이 왔는데 내가 맘에 든다네. 연상인 줄 알면 어떤 표정일까 궁금하네. 같이 갈까?"
"아니. 알면서 그런다."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 나는 가방을 열고 어제 받은 쪽지를 펼쳤다.
"누구 전화번호야. 설국? 누구야 이 사람?"
"지금도 이런 일이 생기는구나. 잊고 살았네."
처음으로 기분 좋게 웃었다. 일어날 수 없는 뜻밖의 대사건이 나에게 생긴 것이다. 나도 모르게 혼자 중얼거렸다.
"좀 귀엽네. 내 나이 알면 후회할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