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시간

방랑자.

by 금다요

햇살은 투명하고 날은 맑아 보였다. 불어오는 바람도 시원하고 숲을 지날 때에는 나뭇잎의 부딪히는 소리가 이곳까지 들려오는 듯했다. 그는 다리를 꼬고 앉아 책을 읽고 있었는지 무릎 위에 책 한 권이 펼쳐진 채 있었다. 정민이 나를 부르며 양팔을 올려 손을 흔드는 모습 때문인지 그도 무심하게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뽀얀 얼굴의 스치는 그의 표정을 읽을 수는 없지만 뭔가 맘에 안 드는 거처럼 보였다. 잠시 후 누군가 그의 곁에 앉았다. 인랑이었다. 나는 예상하지 못한 전개에 놀라 화면을 정지시키고 거실로 나왔다. 그리고 정원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문득 아침에 카페에서 만난 설민의 말이 떠올랐다.

'드디어 네가 바라던 데로 되었구나'

무심하게 흘려보냈지만 분명히 그들이 주고받은 대화내용도 마치 나를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거처럼 느껴졌었다. 인랑씨랑 아는 사이였다면 그에게 들었으리라 생각되지만 그래도 알고 싶어졌다. 이 영상이 왜 나에게 있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분명히 나도 정민이도 찍은 게 아니었기 때문에. 나의 오래전 기억이 뒤엉켜 두통을 부르고 있었다. 다시 방으로 들어와 정지된 화면을 진행시켰지만 인랑과 설국의 모습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그에게 전화를 했지만 통화를 할 수 없었다.


저녁 무렵 그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당신 전화 이제야 확인했어요. 내가 보고 싶어진 건가? 당신이 먼저 전화를 해주니 기분 좋네요."

그는 외모에서 풍기는 것과는 다르게 대화에서는 나보다 연상이고 싶어 했다. 알면서도 그런 그의 말투가 싫지 않은 것도 이상했다. 나는 웃으며 그에게 말했다.

"이쪽으로 와줄 수 있어요?"

"어딘데?"

"집이에요."

"흠. 지금 날 초대하는 건가?"

"네. 그리고 당신에게 보여줄 게 있어요."

"뭔데? 살짝 알려주면 안 될까?"

"직접 보는 게 좋을 거 같아요."

나의 단호함에 놀랐는지 그의 대답은 힘이 없었지만 그의 목소리는 한껏 들떠 있었다. 그와의 통화를 마치고 거실을 서성이다 방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영상을 휴대폰에 저장한 후 그의 전화를 기다렸다. 창밖은 점점 어두워지고 있었다. 여기저기 가로등이 하나 둘 켜지자 문 앞도 환해졌다. 휴대폰 벨이 울렸다.

"도착했어요."

문을 열고 정원으로 나가자 그가 양손 가득 뭔가를 들고 안으로 들어왔다.

"양손 가득 들고 있는 게 다 뭐예요?"

"당신 아직 저녁식사 전일 거 같아서."

그에게서 에코백 하나를 건네받았다. 거실로 들어온 그는 와이셔츠 소매를 반쯤 접어 위로 올리더니 주방을 찾았다.

"오늘은 가만히 있어요. 내가 다 할 거니까. 당신은 맛있게만 먹어주면 돼요."

"그럼 내가 너무 미안하잖아요. 그냥 옆에 서있기만 할게요."

그는 나의 등을 밀어 식탁 의자에 앉혔다. 그리고 야채를 손질하는가 싶더니 어느새 식탁 위에 샐러드와 파스타를 만들어 올렸다. 그가 처음으로 해준 요리이기에 휴대폰 카메라에 담았다.

"이제 그만 찍고 어서 먹어봐요. 당신 입에 맞아야 할 텐데."

"맛있어요. 언제 요리 배운 적 있어요?"

"직접 배운 적은 없지만 유학 갔을 때, 민 형이랑 가끔 먹었어요. 나는 얼큰한 걸 좋아하는데 형은 그때부터 카페를 할 생각이 있었는지 양식을 좋아하더라고요. 형이 우리 집에 왔다 가면 밥을 다시 해 먹어야 했어요."


그는 아침에 만났을 때보다는 한결 편안해 보였다. 거실로 나온 우리는 나란히 앉아 커피를 마셨다. 거실 가득 커피 향이 퍼져 나갔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창가로 걸어갔다.

"당신과 함께 이 집에서 식사를 하고 커피를 마시며 얘기를 나누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어요. 아침에 당신 태우러 와서도 생각했지만 집에 정성이 가득 들어가 있는 거 같아요. 여기서 밖을 보니까 야경이 한눈에 들어와요. 당신이 보여주고 싶은 게 뭔지 너무 궁금한데 그게 뭐죠?"


나는 휴대폰에 저장해 놓은 영상을 그에게 보여줬다. 그도 이 영상이 있었다는 게 뜻밖이었는지 놀라워했다.

"이런 게 있었다니 누가 찍은 거예요?"

"모르겠어요. 누군가 찍은 후 내 노트북인 줄 모르고 저장한 거 같아요. 그런데 어떻게 우리 학교에서 인랑씨를 만난 거죠? 인랑씨를 알아요?"

"그 형은 집안끼리 아는 사이였어요. 부모님들끼리 인연이 있어서. 형이 벤치에 앉아있는 나를 발견하고 다가와 잠시 말 몇 마디 나누었지만 금방 그 자리를 떠났어요. 나도 기다리고 있던 민 형이 와서 자리를 옮기게 되었죠. 그날 당신을 봤어요. 2층 계단 창밖으로 비스듬히 서서 얼굴을 내밀고 오랫동안 어딘가를 쳐다봤어요. 바람이 불을 때마다 긴 머리가 날리고 생각에 잠긴 듯 이따금 하늘을 바라보는 당신을 계속 쳐다보고 있었죠. 당신이 밝게 웃으며 누군가를 향해 손을 흔드는데 마치 나를 향해 흔드는 거처럼 느꼈어요. 당신에게 달려가고 싶었지만 며칠 후 유학길떠나야 했어요. 난 금방 당신을 잊을 거라 생각했지만 그날 이후로 난 당신 때문에 너무 힘든 시간을 보내야만 했어요. 학기가 끝나고 잠시 귀국해 학교를 다시 찾았을 때는 너무 늦었죠. 그날 집에 들어가지 않고 바로 출국해 한동안 돌아오지 않았어요. 그러다 인랑 형 조난사고를 알게 되었어요. 당신 때문에 힘들어하는 내가 안쓰러웠는지 민 형이 당신을 찾아냈죠. 그런데 소브루에서 우연히 당신을 만나게 된 거예요. 시간은 많이 흘렀지만 당신은 변하지 않았더군요. 금방 당신이란 걸 알 수 있었어요."

그는 씁쓸하게 웃었다. 그는 다가와 나를 안았다.

"당신이 너무 그립고 보고 싶었어요."

그의 말을 듣고 나자 나도 모르게 볼 위로 눈물이 흘렀다. 그는 말없이 다가와 나를 안았다. 그리고 등을 토닥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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