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부터 바람이 강하게 불더니 비를 내리기 위한 하늘의 의식이었나 보다. 일요일 새벽부터 가늘게 내리던 비는 오후까지 계속되고 있었다. 운동기구에 앉아 창밖을 쳐다보고 있으려니 이렇게 의미도 없이 하루 종일 집안에만 있는 게 무료했다. 남편이 눈치를 챘는지 다음 주 친지 결혼식도 있으니 머리 손질이나 하러 가자는 남편의 말에 ㅎ대학가 거리에 있는 헤어숍에 갔다.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며 손질하는 성격이 못 되어 오랫동안 머리를 뒤로 넘겨 하나로 묶고 다녔었다. 여름에는 덥기도 하고 땀도 많이 흘러 묶고 다니는 게 제일이라는 생각도 있어 이번에야말로 머리스타일을 바꿔보리라 결심했다. 머리 염색할 때가 되어서 그런지 흔히 '날린다'는 말처럼 머리카락이 부스스해 잠자다 말고 나온 여자처럼 보였다.
헤어숍 한두 군데를 기웃거리다 어느 숍 문 앞에서 서로 고민하다 들어간 헤어숍 이름이 '하루'였다.
'하루' 언젠가부터 이 말을 참 좋아하게 되었다. 왜 좋아하게 되었는지는 생각이 나지 않지만 '하루'란 말만 들음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 밖에 세워놓은 배너(banner)에 안내된 가격도 생각보다 저렴해 맘에 들었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니 젊은 20,30대 젊은 남녀 디자이너들이 손님의 머리를 손질하고 있었다. 대학가니까 젊은 감각이 먼저이겠다 싶었다. 우리는 입구 옆에 마련되어 있는 테이블에 앉았다. 한쪽 벽을 밖이 잘 보이게 유리창으로 만든 게 맘에 들었다. 창 밖에는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대도 대학생처럼 보이는 젊은 남녀가 우산도 없이 씩씩하게 걸어가고 있었다. 조금 전 우산 하나만 들고 길을 나선 남편한테 투덜댄 게 괜히 미안해졌다.
거울에 비친 '하루' 헤어숍 내부
유리창을 통해 비 오는 거리의 풍경을 생각 없이 보는 걸 좋아해서 그런지 차례를 기다리는 동안 지루하다는 생각이 안 들었다. 버스가 물웅덩이를 지나며 튀기는 흙탕물이나 지나가는 이들이 쓴 우산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이 유난히 정겹게 느껴졌다. 길 건너 짧은 반바지에 맨살을 드러내고 슬리퍼를 질질 끌며 어디론가 걸어가는 여대생들의 모습도 한없이 예쁘게만 보였다.
이런 젊은이들의 모습을 보며 나 또한 살아있음을 깨닫는다. 정말 이렇게 밝고 신선한 모습들을 보는 게 얼마만인지. 근무지가 세종시로 바뀐 다음에는 집에서 가까운데도 이 거리를 찾는 게 쉽지가 않았다. 젊은이들의 힘 있는 목소리와 활기찬 모습은 늘 나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해주었다. 뭘 해도 예쁜 나이 인대 저들은 알고 있는지 궁금하다. 나 역시 그 시간대를 지나와서야 그때가 얼마나 빛나고 아름다운 시간이었는지 깨닫게 되었으니까.
자연에도 4계절이 있지만 우리의 인생에도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네 인생 중 최고의 봄날은 20대가 아닐까. 나 역시 그때가 가장 꿈을 많이 꾸는 나이였다. 20대 초 엄마와 집을 떠나 처음으로 친구들과 함께 했던 3박 4일간의 동해안 여행. 우리나라 바다 중 동해안의 바다가 가장 맑고 푸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휴가기간이 장마철과 겹쳐 출발하는 그 시간부터 완전 극기훈련 었지만 새벽녘에 도착한 원주역 근처의 허름한 여인숙과 기차역을 빠져나오는 여행객들의 사투리들은 지금까지도 내 눈앞에 내 귓가에서 맴돈다.
그 여행을 통해 운전면허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어 운전학원에 등록하였고 출근하기 전 이른 새벽에 일어나 운전학원으로 등원(登院)을 하였다. 곱게 모셔져 있는 장롱면허지만 면허증을 받아 든 그때를 생각하니 즐거워진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동안 내 차례가 되었다. 한 시간 넘게 머리 손질을 마치고 밖으로 나왔을 때는 비가 그쳐서인지 거리에는 젊은이들로 가득 차 있었다. 집으로 돌아올 때는 아파트 울타리 아래까지 늘어져 있는 넝쿨장미 아래서 십 년은 더 젊어 보이는 남편과 인증 숏을 남겼다.
지나가는 행인들이 우리를 위해 가던 걸음을 멈췄다. 우리 부부가 멋쩍은 얼굴로 사진을 찍자 말없이 웃고 지나갔다. 횡단보도에서 신호를 기다리고 있는 젊은 연인들도 우리가 부러웠었는지 그 자리를 떠나자 그들 포즈를 취하며 웃고 서 있었다.
남편이 찍어준 장미 넝쿨의 멋진 자태
남편도 모처럼 손질한 머리 모양이 맘에 들었는지 멋있게 찍은 사진을 카톡으로 전송해줬다. 환하게 웃는 미소 속에서 그 옛날 가수 신승훈이 불러 인기가수가 된 '미소 속에 비친 그대'가 생각났다. < 너는 장미보다 아름답진 않지만, 그보다 더 진한 향기가, 너는 별빛보다 환하지 않지만, 그보다 더 따사로워>
한 때 노래방에만 가면 첫 곡은 꼭 이 노래였는데. 신승훈이 대전 출신인 점도 좋았지만 뜨지 않았던 무명 시절에 라이브로 들은 가수는 이 가수가 처음이었다. 지금은 방송에서도 얼굴 보기가 어렵지만 지금도 옛날이 그리워지면 이 노래를 듣게 된다.
오후 시간 내내 헤어숍에서 보내야 했지만 우리는 다른 때보다 즐거웠다. 모처럼 맘에 드는 헤어숍을 찾은 덕분에. 문을 열고 집에 들어오자 방 안에서 꽃향기가 나는 듯했다. 넝쿨장미 아래서 포즈를 취하느라 한참을 서있었더니 바람에 묻어 함께 들어왔나 보다.
그들은 모르고 나이 먹은 우리는 아는 그 아름답고 화려했던 젊음의 시대와 접했던 오늘 하루가 있어 또 한동안은 설렘 속에서 살아가리라. 우리가 이 설렘을 함께 간직하고 있는 동안 최고의 봄날은 계속되리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