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메이션 <들장미 소녀 캔디>의 '앤서니'와 '테리우스'를 본 순간 천둥번개가 나를 내리치는 바람에 방영하는 날을 기다리다 지쳐 매일매일 캔디 노래를 흥얼거리는 지경에 이르렀다. '사관과 신사'를 본 후에는 리처드 기어가 입은 하얀 제복에 반해 훗날 톰 크루즈가 주연한 '탑건'을 여러 번 봐야 했다.
몇십 년이 지나 가장 순수하고 찬란했던 그때를 생각해보면 지금도 웃음이 나온다. 엉뚱하고 내 나름대로 멋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뭔가 고픈 시절의 탈출구였었다. 매번 짝사랑으로 끝나 가슴이 아팠지만 그래서 더욱 아름다웠다.
픽사 베이 - 하늘. 푸른. 사랑. 관계
무엇을 한 날도 아무것도 하지 않은 날도 있지만 그렇다 해서 예전처럼 내 마음을 흔들진 않는다. 살아온 날은 계수할 순 있어도 앞으로 살아갈 날을 계수할 순 없다고 삶이 내게 가르쳐 주었다. 아주 작은 호흡도 영원으로 이어져 있기에 찬란하고 빛나고 의미 있음을 알게 되었다.
'브런치'에서 '민들레'로 활동 중인 작가님의 매거진 <마당 있는 풍경> 제하의 '의미 있는 하루' 중에서 감명 있게 읽은 문장이다. 나의 20대와 30대는 바다를 삼켜버릴 듯 몰아치는 강한 폭풍우처럼 휘몰아치는 감정의 소용돌이와 싸워 이겨야만 했다. 다행히 난파되지 않고 평온한 바다에서 순풍을 만나 40대를 지나옴에 감사할 뿐이다.
어느 날 혜성처럼 다가온 영화 '노팅 힐(Notting Hill)'은 잊고 살았던 '사랑 예찬론자(禮讚論者)'임을 기억케 해줬다. 세계적인 스타 애나 스콧(줄리아 로버츠)이 런던 노팅 힐에서 여행전문서점을 운영하는 윌리엄 태커(휴 그랜트)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는 영화로 상영 당시 친구와 둘이서 영화를 봤던 기억이 난다.
영화가 끝나고 조명이 환하게 켜졌는데도 자리에서 일어나는 이들은 대부분 남자 관객이었다. 스크린에 자막이 다 올라가고 off 되었는데도 우리는 그 자리를 떠날 수가 없었다. 이 영화 속에서 '신데렐라'가 보였는지도 모르겠다.
다음 상영을 위해 좌석을 확인하러 들어온 직원들에게 쫓기듯 극장을 나왔지만 헤어지기가 섭섭한 우리는 근처 커피숍으로 들어갔다. 친구와 커피를 마시는 동안에도 둘이 나눈 얘깃거리는 온통 영화 '노팅 힐'이었다. 커피숍을 나와서도 괜히 어둑어둑해진 거리를 여기저기 쏘다니며 긴 여운을 즐겼다. 친구와 헤어진 후에도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를 기다리는 내내 나의 머릿속에는 '노팅 힐'의 영상으로 가득했다. 버스 안에서도창 밖을 쳐다보며 '사랑에 빠진 표정'을 짓기도 하였다.
시간이 흐르고 세월이 바뀌면서 한 남자를 만나 사랑을 하고 결혼을 하자 그런 간절함은 사라지고 말았다. 아니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책꽂이에서 만난 빛바랜 할리퀸 로맨스 소설을 발견하고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로맨스 소설을 읽고 떨렸던 그 설렘이 다시 살아나고 있었다.
옛날처럼 순수했던 그 시절을 찾고 싶었다. 다시 꿈을 꾸기 위해 구석진 곳에 세워놓았던 책상을 꺼냈다. 쌓인 먼지를 털고 아침 햇살이 잘 들어오는 창 옆에 놓았다. 창밖 풍경이 잘 보이는 창 틀에는 작은 화분을 골라 올려놓았다. 예쁘게 수놓은 노란색 보(褓)를 씌운 다음 그 위에 노트북을 꺼내 충전을 시작했다.
- 영화 '노팅 힐(Notting Hill)' -
오래간만에 소녀적 나와 다시 만났다. 다섯 번째 로맨스 소설을 위해 시놉시스(synopsis)를 쓰면서 남자 주인공을 찾았다. 이름은 어떻게 지을까! 외모는 또, 그의 직업은 어떤 게 좋을까! 고민하였다. 그렇게 몇 날 며칠을 흘려보내다 '저 남자 주인공이면 좋겠다'는 배우가 눈에 들어왔다.
미소를 지을 때면 어느 봄날 따뜻한 햇살처럼 아름다운 그 남자. 난 그의 허락도 없이 다섯 번째 로맨스 소설 <꿈속의 연인> 남자 주인공으로 선택했다. 하얀 얼굴 때문인지 생각이 많은 눈빛 때문인지 연약해 보이기도 했지만 그에게서는 강인한 면도 느껴졌다. 한 편의 드라마가 끝나면 반드시 어디론가 여행을 떠나는 그 남자. 그는 지금 산티아고를 지나 여행 중이다. 나의 로맨스 소설 <꿈속의 연인>에 마침표를 찍을 날이 오겠지만 아주 오랫동안 그와 '함께' 하고 싶다.
많은 날을 생각 속에 빠져 살게 한 영화 노팅 힐의 '애나 스콧'처럼 나의 주인공도 세계적인 배우가 되기를 기원한다. 그리고 그가 누군가의 '애나 스콧'이 되어 행복하기를 바라며 오늘도 그와의 Love Story를 이어 나가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