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주전자

알라딘의 램프처럼

by 금다요

우리 집 주방 싱크대 위에는 오래된 주전자 하나가 있다. 둥글게 생긴 작은 몸체에 중간 길이의 주둥이와 손잡이는 장구를 반으로 갈라놓은 듯 중앙에 나무로 이어져 있다. 그리고 뚜껑에는 김이 새도록 세모로 홈이 파여 있다. 엄마가 계실 때는 주로 구역 예배를 드릴 때나 이모와 삼촌들이 집으로 놀러 오시면 차를 내기 위해 물을 끓였다.


지금은 사발면 먹을 때도 이 주전자를 사용한다. 엄마가 살아계실 때부터 사용했으니까 10년이 넘은 거 같다. 가스레인지에 올려놓고 물을 끓이다 보니 강한 불로 인해 주전자 밖은 그을려 흑갈색을 띠고 있다. 가끔 철수세미로 박박 문지르면 스테인리스 본연의 색이 돌아오지만 그것도 잠시 뿐이었다.


집안 이곳저곳을 둘러보니 엄마가 계실 때부터 사용하던 것들이 제법 눈에 띄었다. TV를 올려놓은 수납장과 식탁, 그리고 베란다에 있는 소금을 보관하고 있는 항아리 등이다. 수납장은 엄마가 쓰시던 그대로 사용하고 있지만 평수가 크지 않은 집안에 4인용 식탁을 놓고 쓰자니 주방용 거실이 좁아 옷방 겸 서재로 활용하고 있는 방에 들여놓고 남편 책상으로 쓰고 있다.


이렇게 엄마와 함께 쓰던 물건 중에 내가 가장 많이 사용하는 것은 오래된 주전자이다. 너무 그을리고 손잡이에 있는 나무도 색이 바래 그만 써야 되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남편은 장모님이 쓰시던 물건이라 버리는 게 맘에 쓰였는지 <내가 깨끗하게 닦아놓을 테니 조금만 더 쓰자.>라면서 버리는 걸 막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남편 말 듣기를 정말 잘했다. 외출할 일이 없는 평온한 날에는 커피를 마시기 위해 주전자에 물을 끓인다. 4분 정도 흐르면 주전자 뚜껑이 들썩 들썩거리며 주전자 꼭지 쪽으로 하얀 김이 모락모락 올라온다.


김이 피어오르는 모양을 보고 있자니 생뚱맞게도 '알라딘의 요술램프'가 생각났다. 램프를 문지르면 램프의 요정 '지니'가 연기와 함께 나타나 소원을 들어주는. 만약 소원을 말해 보라면 무슨 소원을 먼저 말해야 되나 싶었다. 한두 가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갈아놓은 원두커피에 주전자로 천천히 뜨거운 물을 붓자 거품이 일며 커피 향이 진하게 번져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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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온이 많이 올라갔는지 날이 더웠다. 베란다 창문과 현관문을 활짝 열어놓았다. 옆집에서도 현관문을 열었는지 접시끼리 부딪히는 소리가 우리 집에까지 들려왔다. 이상하게도 오늘은 아이들의 떠드는 소리도 지나가는 자동차 소리도 시끄럽게 들리지가 않았다. 아파트 방범창 사이로 보이는 나무들도 아름다웠고 공사장에서 들려오는 기계음조차도 정겹게 들렸다.


저녁 하늘의 놀이 지는 모습을 보니 루이 암스트롱의 'What a Wonderful World'가 듣고 싶어 졌다. 안방 가득 헤즐럿 커피 향이 더욱더 좋아졌다.


잠깐사이에 밝았던 밖이 어둑어둑해졌다. 하나둘 가로등이 켜지고 아이들도 집으로 하나 둘 돌아가고 있었다. 아름다운 세상이 이런 걸까! 이렇게 내 옆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모든 게 아름답다 생각되는 걸 보니 엄마의 '오래된 주전자'가 알라딘의 요술램프처럼 나의 소원을 들어주려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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