님은 어디로 가고.
보리밭 사잇길로 걸어가면
뉘 부르는 소리 있어
나를 멈춘다.
옛 생각이 외로워 휘파람 불면
고운 노래 귓가에 들려온다.
돌아보면 아무도 보이지 않고
저녁놀 뵌 하늘만 눈에 차누나.
박화목 작 / 윤용하 곡
<보리밭>, <그리운 금강산>, <저 구름 흘러가는 곳> 등은 내가 즐겨 듣고 즐겨 부르는 우리 가곡이다. 그중에서도 위 <보리밭>과는 특별히 인연이 있어 더 좋아한다.
중학생일 때 학교 합창부 부원으로 활동을 하였다. 다른 애들은 1학년 때부터 활동을 시작했지만 나는 2학년 초 음악실기시험 중 선생님 권유로 테스트를 거쳐 합창부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 소문은 빠르게 교내에 퍼졌다. 먼저 합창부 활동을 하고 있던 애들은 조용하게 문예창작 동아리 활동을 하던 애가 합창부에 발탁되었다는 사실이 신기했던지 누군지 얼굴을 보기 위해 우리 교실로 찾아오는 애들도 있었다.
합창부에 들어가자마자 도내 초. 중. 고등학교 합창대회에 나가게 되었다. 우리 부원들은 여름방학에도 등교를 하여 대회 준비를 하게 되었다. 늦게 합류한 터라 어색한 분위기가 적응이 안돼 '괜히 합창부를 한다고 했나'라는 생각이 들어 도망가고 싶은 맘만 가득했었다.
어느 날 합창부 지도 선생님 없이 우리끼리만 합창 연습을 하게 되었다. 갑자기 지휘자가 나를 불렀다. 합창부에 들어오게 된 과정을 궁금해하며 자기 소개할 시간을 주겠다는 것이었다. 당황스럽기도 했지만 짧게 내 소개를 한 후 앉으려 하자 부원 중 누군가 나의 노래를 듣고 싶다고 말했다.
머릿속이 백지처럼 하얗게 변하며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랐다. 떨리는 맘을 겨우 진정시키고 앞으로 나가 교단 중앙에 섰다. 피아노 반주에 맞춰 내가 제일 좋아하는 가곡 <보리밭>을 불렀다. 중간쯤 부르자 애들이 함께 따라 부르기 시작했다. 떨면서 부르는 내 모습이 안쓰러웠는지 아니면 금방이라도 쓰러질 거 같이 보였는지도 모르겠다. 애들의 얼굴이 하나하나 눈에 들어왔다. 모두가 서로를 바라보고 웃으며 화음을 맞추고 있었다. 우리가 부르는 <보리밭>은 학생들이 떠난 교정으로 울림이 되어 퍼져나가고 있었다. 너무나 고맙고 진심으로 환영해주는 거 같아 비로소 불편했던 맘이 눈 녹듯 사라졌다. 노래가 끝나고 애들은 책상을 두드리며 환호를 해줬다.
여름방학도 반납하고 열심히 연습했던 우리 합창부는 그해 합창대회에서 1등을 차지하였다. 지금도 <보리밭>을 듣고 있으면 한 목소리가 되어 고운 노래를 불렀던 그 시간 나의 친구들이 그리워진다.
생각만 해도 마음이 따뜻해지는 추억만 있었던 건 아니다. TV에서 <보리밭> 영상만 봐도 떠오르는 얼굴이 있다. 일제 강점기 때 외할아버지께서 강제 징용을 피하기 위해 시집을 보낸 지금은 고인[故人]이 되신 우리 엄마이시다.
평소 술을 좋아하셨던 외할아버지는 선술집에서 만난 중매인의 '혼례를 올린 여자는 징용당하지 않는다.'라는 말만 듣고 10남매 중 장녀였던 엄마를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당진 산골마을로 시집을 보내셨다. 엄마는 열여덟 어린 나이에 외할머니가 싸준 보따리 하나만 들고 처음 만난 아버지를 따라나섰다.
마을 어귀까지 따라 나와 우시던 외할머니의 모습이 눈에 밟혀 걸음도 잘 안 걸어지더라고 했다. 외할머니한테 돌아가고 싶었지만 '강제 징용' 때문에 울음을 참아가며 힘겹게 아버지 뒤를 따라 걸으셨다. 아버지도 돌아가셨으니 이제는 물어볼 이도 없지만 엄마 말씀으로는 그렇게 다정다감한 분은 아니셨던 거 같다.
어느 들길을 지날 때였단다. 나무 그늘에 앉아 잠시 쉬고 있는데 바람이 불 때마다 뱀이 풀밭을 지나갈 때 나는 소리와 비슷한 소리가 귀에 들려왔단다. 알고 보니 바람이 불 때마다 벼들이 바람에 이리저리 날리며 서로 부딪힐 때 나는 소리였단다. 벼 끝은 햇살을 받아 마치 물고기의 은빛 비늘처럼 반짝거리고 있어 그걸 쳐다보느라 잠깐 동안은 외할머니를 잊을 수가 있었다고 하셨다.
어린 나이에 고된 시집살이를 하면서 이른 아침이면 밭에 나가 저녁까지 일을 해야만 했던 엄마에게는 보리밭을 보면 '엄했던 시어머니'와 '힘겹던 보릿고개'가 먼저 떠오른다고 하셨다. 어쩌면 무정한 남편에 대한 원망도 살짝 있지 않았을까 싶다.
<보리밭>은 함께 했던 친구들에 대한 나의 그리움일 수도 고된 시집살이로 잊고 싶었던 엄마의 서러움일 수도 있겠지만 지금을 살고 있는 나에게는 잊고 싶지 않은 추억이며 보고픈 엄마에 대한 사모곡이다.
예쁜 가수 아이유의 '좋은 날'처럼 그렇게 그림같이 아름다운 날과 만나진 다면 엄마가 봤던 바람이 부는 보리밭에 서서 다시 한번 옛 생각을 하며 <보리밭>을 불러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