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편을 빚다.

여인의 향기가.

by 금다요

거센 장마가 지나가더니 이번에는 태양의 뜨거운 세례가 시작되었다. 매미는 이 여름을 보내기가 서글픈지 귀가 따가울 정도로 맴맴 거리고. 병원 앞 논밭에는 잘 익은 벼들이 우리 인간들에게 겸손함을 가르치려고 그러는지 논바닥을 향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들판을 지나가는 바람은 노랗게 익어가는 벼들을 흔들며 성대한 잔치를 열어 장마 때문에 슬퍼했을 농부들의 맘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가을은 논과 밭에만 찾아온 게 아니었다. 병원 마당에도 보이는 뒷산에도 나뭇잎 색이 변해가고 있었다.


그녀와 함께 하는 첫 번째 추석이 다가오고 있었다. '추석'을 생각하니 국민(초등) 학교 국어시간에 배운 글 하나가 입에서 맴돌았다.


추석이 가까워졌습니다.

들에는 벼가 익어갑니다.

밤도 익었습니다.

감도 익었습니다.

'추석이 가까워졌습니다'라는 문장이 제목인지 이 글의 시작인지는 지금도 기억이 흐릿하다.


마당에서 놀던 그녀가 누구한테 무슨 말을 들었는지 사무실에 있는 내게로 달려왔다. 그녀는 뒷짐을 지고 내 주변을 맴돌더니 내 옆에 와서 말없이 내 얼굴을 쳐다봤다. 할 말이 있는듯한데 고개를 숙이고 두 손을 맞잡은 채 손가락만 만지작거렸다. 포동포동한 그녀의 작은 손이 귀여워 참을 수가 없었다.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으며 그녀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야?>

<음..... 음....>

<무슨 일인데. 나한테 말해봐.>

그녀는 주변의 다른 직원들을 의식한 듯 귀에 대고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언니가 추석에 색동저고리 입는대.>

<그래서 너도 색동저고리가 입고 싶다고?>

<음.>

그녀는 깜빡거림도 없이 내입만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침이 마르는지 꼴깍거리는 소리와 함께 힘없이 어깨를 늘어뜨리고 돌아서려 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작은 손을 잡고 그녀의 어머니한테 갔다.

<데리고 잠깐 나갔다 와도 될까요?>

<어디 가시려고요?>

<네. 일 마치는 대로 돌아올 테니 걱정 마세요.>

그녀를 데리고 대전에 있는 시장에 가기 위해 큰길로 걸어 나와 버스를 기다렸다. 길가에는 코스모스들이 활짝 피어있었다.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그녀는 코스모스 꽃에 작은 코를 대고 끙끙거렸다.

<그렇게 꽃 가까이 가면 벌한테 쏘인다.>

그녀는 나의 말에 놀란 듯 뒷걸음질 치더니 다시 꽃 가까이 다가갔다. 코스모스도 그녀의 그런 모습이 예뻤던지 바람이 불 때마다 어린 그녀 곁으로 다가가려 온몸을 길게 늘어뜨렸다.



korea-2832422__340.jpg 코스모스, 길 옆


버스 시간이 가까워져 난 그녀의 손을 잡고 정류장으로 걸어갔다. 버스가 도착하고 차에 오르니 승객은 몇 명 되지 않았다. 버스가 출발하기 전 빈 의자를 찾아 자리에 앉았다. 그녀는 내 무릎 위에 앉아 있으면서도 뭔가 불안해 보였다. 내손을 꼭 잡은 채 창밖의 보이는 것들을 얘기하며 큰소리로 웃었다.


우리가 버스에서 내릴 즈음에는 운전기사 아저씨가 그녀의 손에 동전 한 잎을 쥐어줬다. 탈 때부터 그녀를 지켜보던 운전기사 아저씨가 결국은 그녀에게 사탕 값을 쥐어주신 것이었다. 그녀는 내 얼굴을 힐끔 쳐다본 후 허리를 굽혀 감사 인사를 드린 후 버스에서 내렸다.


시장에 들러 나는 그녀가 추석에 입을 색동저고리로 된 한복을 샀다. 한복집 할머니가 그녀에게 말했다.

<너는 참 좋겠구나. 추석에 입으라고 아버지가 꼬까옷도 사주시고.>

그녀는 나를 쳐다본 후 재빠르게 할머니의 말에 대답을 했다.

<우리 아버지 아니에요. 그리고 시집갈 때 입을 거예요.>

그녀의 엉뚱한 대답에 한복집 할머니는 큰 소리로 웃었다. 나는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조리 있게 상대에게 전하는 그녀가 기특했다. 나는 보자기에 싼 한복을 정성스럽게 들고 앞서 걸어가는 그녀를 인파 속에서 잃어버릴까 봐 그녀를 안았다.


추석 전날.

고향에 못 가고 병원에 남아있는 직원들끼리 차례를 지내기 위해 송편을 만들었다. 그녀의 어머니가 낮에 방앗간에서 미리 빻아다 놓은 쌀로 반죽을 한 후 그녀의 방에 둘러앉았다. 그녀는 색동저고리를 곱게 입고 내 옆에 앉았다. 언제 배웠을까. 다소곳이 앉아서 그녀의 어머니가 떼어주는 쌀 반죽을 작은 두 손으로 만지작거렸다. 처음으로 어린 그녀가 성숙한 여인처럼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