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래잡기.
그녀의 어머니로부터 편지를 받은 후 하루하루 맘이 급해졌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녀의 장난기 많은 얼굴이 떠올라 일이 손에 잡히지가 않았다. 그녀의 어머니와 약속한 날이 다가왔다. 이른 아침부터 분주하게 움직였다. 밤새 그녀를 만날 생각에 들떠 뒤척이다 잠자는 것을 포기하고 날이 밝아오기를 기다렸다. 야간 통행금지가 해제되고 창밖이 밝아오면서 가방을 들고 병원을 나와 시외버스를 타기 위해 걸었다. 시외버스 터미널에 도착하니 옥천으로 향하는 버스가 막 출발하려 움직이기 시작했다. 버스 출입문을 두드리자 기사 아저씨가 문을 열었다.
<차표 사 가지고 오겠습니다. 잠깐만 기다려 주세요.>
나의 간절한 표정이 안쓰러웠는지 기사 아저씨는 웃으며 기다려 주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매표소로 달려가 차표를 사 기사 아저씨에게 건넨 후 버스를 탈 수 있었다.
버스가 출발하고 먼지를 풀풀 날리며 달리기 시작했다. 창문을 열자 벌써 밤나무 꽃이 피었는지 어디선가 야릇한 향기가 날아와 코끝을 간지럼 펴기 시작했다. 그녀가 이 향을 뭐라고 했더라. 어린아이가 어디서 어떻게 알았는지 '아저씨 냄새'라고 말하며 나를 빤히 쳐다봐 당황했던 그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궁금하다. 그녀가 왜 이 밤나무 꽃 향기를 '아저씨 냄새'라고 했는지.
수없이 버스의 덜컹거림 속에서 내 엉덩이가 욱신욱신해질 무렵 버스는 옥천에 도착했다. 버스에서 내려 그녀의 어머니가 알려준 주소를 적은 쪽지를 길가에 나와 앉아 있는 아저씨 아주머니들에게 보여주고 물어 물어 그녀가 있는 곳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점심 무렵, 나는 두 모녀가 머물고 있는 병원에 도착했다. 병원을 찾아가는 길 옆으로 그녀의 어머니가 보낸 편지에 적혀 있는 대로 그녀가 오디를 따먹어 입술이 까매졌다는 뽕나무 밭과 바다로 알고 있다는 그 넓은 호수가 눈에 들어왔다. 발바닥에서 열이나며 점점 욱신거렸지만 참아야만 했다. 걸음을 재촉하며 언덕길을 올라갔다. 한참을 더 걸어가자 눈앞에 000 병원이라는 간판이 보였다. 마을에서 좀 떨어진 산중턱에 병원이 자리 잡고 있었다. 문 앞에서 안을 기웃거리자 직원인 듯 노인 한 분이 나타났다,
<누구세요? 누굴 찾으십니까?>
<네. 어르신. 여기에....>
그때였다. 부엌에서 마당으로 나오는 그녀의 어머니가 눈에 띄었다. 그녀의 어머니도 나를 보았는지 물항아리를 땅에 내려놓고 달려왔다.
<박 선생님 아니세요?>
노인은 그녀의 어머니가 달려오자 병원 밖으로 사라졌다. 항상 그녀의 어머니 옆에 껌딱지처럼 붙어 다니던 그녀가 보이지 않았다. 그녀를 찾아 두리번거리는 내 모습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
<산에 놀러 갔을 거예요. 병원 옆에 쌍둥이 형제가 살고 있는데 윤희를 친동생처럼 챙기거든요. 들어올 때쯤 되었으니 방에서 쉬고 계세요. 여기 오시느라 새벽부터 서두르셨을 거 아니에요.>
<괜찮아요. 병원 올라오는 길에 보니 경치가 아름답던데 한 바퀴 돌고 오겠습니다.>
<그러시겠어요?>
<네.>
그녀의 어머니에게 가방을 건네주고 돌아서 병원을 나와 걷는 내내 맘 한 구석이 이상했다. 병원에 도착하면 그녀를 볼 수 있겠다 싶었는데 그녀가 보이지 않다니 온갖 생각들이 머릿속을 어지럽히고 있었다.
병원으로 올라오던 길에 본 호수로 내려갔다. 물이 맑아서인지 물속이 훤히 들여다 보였다. 호수 건너편에서는 남자 몇 명이 고기를 잡으려는지 그물을 던지고 있었다. 물가 옆 큰 나무 아래 앉아 양말을 벗고 물속에 발을 담갔다. 피로가 풀리며 졸음이 밀려왔다. 몇 번이나 고개를 끄덕였는지 모르지만 아련하게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거지 싶어 나를 부르는 목소리를 찾아 고개를 돌리니 그녀가 환하게 웃으며 서있었다. 맨발인 채로 그녀에게 달려갔다. 작은 돌에 부딪혀 발가락이 아팠지만 그녀가 먼저였다. 정신을 차리고 나자 그녀는 혼자가 아니었다. 그녀 옆에는 그녀의 어머니가 얘기한 대로 쌍둥이 형제가 함께 서있었다.
<언제 왔어?>
<음. 얼마 안 됐어.>
<그런데 왜 여기 있어?>
그녀는 대답도 듣기 전에 나무 아래로 달렸다. 그리고 나의 구두와 양발을 양손에 든 채 나에게로 돌아왔다. 그녀가 건네준 양말과 구두를 신고 그녀 옆에 서서 나를 궁금해하는 쌍둥이 형제를 쳐다봤다.
<너희들이 윤희 어머니가 편지에 적어 보낸 쌍둥이 형제들이구나. 그런데 누가 형이니?>
그녀는 나의 손을 잡은 손을 놓았다. 그냥 말로 가리켜도 충분히 알 수 있었을 텐데 그녀는 잡았던 손을 놓아버렸다.
<이 오빠가 형이고 이 오빠가 동생이야.>
내 눈에는 둘이 똑같아 보였는데 그녀는 다름을 이미 눈치챘는지 1초도 망설임 없이 형과 아우를 가려냈다. 그녀의 손은 다시 나의 손을 잡았다. 나는 다시 잡은 손을 힐끔 거리며 병원을 향해 걸었다.
병원 근처에 이르자 쌍둥이 형제가 걸음을 멈췄다.
<여기가 우리 집이에요. 윤희야 내일 또 보자.>
쌍둥이 형제는 동시에 배꼽인사를 한 후 집안으로 들어갔다. 그녀와 둘이 남은 나는 그녀의 손을 꼭 잡은 채 걸었다.
<재미있니?>
<음. 재미있어. 그런데 아저씨가 없으니까 쓸쓸해.>
<뭐라고?>
그녀가 쓸쓸하다고 말한다. 겨우 여섯 살밖에 안 먹은 어린아이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니.
<아저씨가 없어 심심하다는 거지?>
<아니야. 아저씨가 우리랑 같이 안 있으니까 쓸쓸하다고.>
나는 걸음을 멈추고 그녀 앞에 웅크리고 앉았다. 그리고 그녀의 얼굴을 쳐다봤다.
<윤희야. 쓸쓸하다는 게 뭔지 알아?>
<음. 아저씨랑 대전 병원에서 살며 산에도 가고 눈썰매도 탄 기억들이 떠오르며 눈물이 나는 거지.>
<뭐! 눈물이 난다고?>
<음. 아저씨! 가지 말고 엄마랑 셋이서 살자.>
그녀는 내 눈을 쳐다보며 나의 대답을 기다렸다. 나는 대답 대신 그녀를 들어 올려 품에 안았다. 아주 오랜만에 닿은 그녀의 따뜻함이 내게로 전해져오고 있었다. 그녀를 안은채 병원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의 어머니가 마당에서 우리를 기다리며 서성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