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사랑의 기쁨
동원이 다시 온다고 말했지만, 그 후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동원의 성격을 알고 있는 채린에게는 오히려 조용한 게 더 불안했다. 채린은 동원이 다녀간 후부터 아니 그가 귀국했다는 말을 이 교수를 통해 전해 들은 후부터는 거의 펜을 놓고 있었다. 채린은 외출준비를 하고 크리스탈을 찾았다. 수정이 채린을 반갑게 맞이했다.
“사장님은 어디 가셨어요?”
“네. 조카 결혼식이 있다고 아침에 올라 가셨는 대 아마 내일 저녁에나 도착하실 것 같아요.”
“그렇군요.”
카운터 위 벽시계를 보고 채린은 재현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 시간 재현은 이 교수의 연구실에 있었다.
“차 재현입니다.”
“채린이예요.”
“그래.”
“오늘 강의 다 끝나셨죠?”
“음.”
“저 지금 크리스탈에 있는 대 오실 수 있어요?”
“크리스탈!”
“네.”
재현은 시간을 확인하였다.
“두 시간 후에 볼까?”
“네.”
재현은 채린과 약속을 잡은 후 휴대폰의 전원을 껐다. 이 교수는 재현의 통화가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채린인가?”
“네.”
“그렇군. 차 교수! 이건 선배로서 묻는 게 아니네. 채린이랑 어떤 사이인가? 아니 채린이를 사랑하나? 사실 말야. 채린이는 내가 아끼는 제자이기보다는 우리 부부에게는 딸 같은 존재야. 그만큼 내게는 소중한 녀석이지. 그래서 묻는 거니 기분 나쁘게 듣지는 말게.”
“......”
이 교수는 아픈 기억을 더듬는 듯 말없이 창 밖을 쳐다보았다.
“차 교수. 난 말야. 다시는 그 녀석이 고통받지 않기를 바라네. 채린이는 그동안 너무 불행했어. 물론 자네도 짐작하고 있겠지만 동원이 때문이었지. 그 잘난 집안 때문에 채린은 동원이 모르게 그 모친으로부터 온갖 멸시를 다 당했지. 나한테 말해 주게. 채린을 향한 마음이 진심인지 아닌지를......”
“선배님께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제가 알 수는 없지만 진심으로 채린이를 사랑합니다. 그동안 선배님께 말씀드릴 기회가 없었습니다. 선배님. 사실은 채린이가 태어나던 날도 기억해요. 채린이와 전 대문을 나란히 한 이웃사촌이었거든요. 채린네가 이사를 가는 바람에 헤어졌지만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채린이 아닌 다른 여자는 꿈꿔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 사실을 현지도 알고 있었어요.”
“그럼 지금부터 내가 어떤 말을 해도 자네가 내게 한 말에 책임질 수 있나?”
“네.”
“좋아! 그럼 얘기하지. 동원이 독일로 출국할 즈음 채린은 동원의 애를 가졌지.”
이 교수는 동원의 아이 얘기를 하자 순간 재현의 표정이 잿빛으로 변하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동원은 그 사실을 몰랐어. 동원의 사촌이 운영하는 산부인과에 검진 차 들렸다가 간호사로부터 채린이 자기 아들의 아이를 가졌다는 사실을 듣게 된 동원의 모친이 나를 찾아왔네.
그 여자는 아들인 동원과는 다르게 교양이 없는 여자였어. 막무가내로 떠드는 바람에 결국 채린이 학교를 그만두어야 할 처지까지 몰리게 되었지. 학생의 신분으로 임신을 했으니까. 동원은 채린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지도 모른 채 독일로 출국하였고, 동원의 출국 소식을 들은 채린이 공항으로 달려갔지만 만나지도 못하고 돌아오는 길에 교통사고가 나 그 사고로 유산하게 되었다네.”
재현은 동원의 가족들이 채린에게 한 처사에 분노가 치밀었다.
“정말 이해가 안 되는 사람들이네요.”
“그런 건 덜 중요하지. 채린이 자신의 아이를 갖고 또 자기로 인해 유산된 사실을 동원이는 모르고 있다는 게 더 큰일이지 않겠나.”
“어떻게 그럴 수가?”
“내가 채린이 얘기를 자네한테 들려주는 것은 채린을 지켜줄 수 있는 사람은 자네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야. 사실 동원이 채린의 아파트를 다녀간 날 채린의 아파트에서 자네와 채린이 함께 찍은 사진을 봤네. 어쩌면 동원이도 둘이 찍은 사진을 봤을 테지"
이 교수의 얘기를 들은 재현은 채린의 비참했던 그 순간이 자신에게까지 전해져 오는 느낌이었다. 재현은 이 교수의 연구실을 나와 크리스탈로 가는 중에도 그 충격으로 인해 뒤죽박죽 헝클어진 생각을 정리할 수가 없었다. 크리스탈 문을 열자 채린이 혼자 창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하는 거야? 사람이 오는지 가는지도 모르고. 사장님은?”
“서울 가셨대요. 집안에 행사가 있어서.”
“그럼 지금껏 혼자 있었니?"
“예. 그런데 얼굴이 왜 그래요?”
“피곤해서 그렇지! 요즈음 학교에서 큰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는 대 이 교수가 보통 괴롭혀야지. 선배만 아니면 그냥......하하하"
채린은 재현의 호탕한 웃음에 안심했다.
“저 배고파요!"
재현은 채린의 배고프단 말에
“그래! 그럼 뭐를 먹어야 우리 채린이가 좋아할까? 그래 오래간만에 칼질 한 번 해볼까?”
“칼질요? 대장간도 아닌대. 호호호. 교수님 맞아요?”
“한 채린! 그럼 내가 교수지! 요리사냐?”
“네? 농담이죠?썰렁해요! 호호호.”
재현 또한 채린의 환한 얼굴을 쳐다보며 편안함을 느꼈다. 채린의 아픈 기억을 이 교수로부터 듣기 전에는 재현 또한 그녀 때문에 괴로워했기 때문일 것이다. 채린은 재현을 바라보며 수줍은 듯한 웃음으로
“사실 고픈 게 또 있어요.”
“음! 우리 채린이가 또 고픈 게 뭘까?"
고개 숙인 채린의 얼굴이 붉어졌다.
“꼭 말로 해야 알아요?”
재현은 채린의 아양에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하하하.”
이제야 재현 자신이 알고 있는 채린 같았다.
“우선 식사부터 하시죠! 이 몸도 배가 너무 고프옵니다. 호호호.”
재현은 채린을 바라보면서 자신에게로 오기까지 많은 아픔을 겪은 것 같아 가슴이 아팠다. 재현은 아주 오랜만에 휴식을 취한 듯 기분이 많이 가벼워졌다.
채린도 동원의 방문 때문에 우울했는 대 재현의 곁에 있으면서 많이 안정되었고 편안해졌다.
식사를 마치고 식당을 나오는 대 채린이
“집에 가서 차 한잔 더 마시고 가시겠어요?”
“그럴까?”
채린과 재현은 아파트 주차장으로 들어서면서 동원의 차가 서 있는 것을 보았다. 동원도 두 사람이 탄 차를 바라보고 있었다. 재현이 차를 주차선 안에 대자 동원이 두 사람 곁으로 걸어왔다. 순간 채린의 얼굴이 굳어졌다. 동원은 채린 옆에 서있는 재현을 보고 목례만 한 후
“얘기 좀 하자.”
“들을 말 없다고 분명히 말했을 텐 데요.”
“아니! 너한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다니까.”
채린은 동원을 무시한 채 재현의 팔을 붙잡고 아파트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채린아! 무조건 피한다고 해결되는 것 아니다.”
“전 듣고 싶은 말도 하고 싶은 말도 없어요!”
“그래도 여기까지 찾아왔다면 너에게 뭔가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가 아니겠니? 전화하렴!"
재현은 채린의 어깨를 툭툭 치고는 두 사람을 남겨둔 채 차에 탔다. 백미러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채린과 동원은 아파트 앞 공원으로 갔다. 공원에는 아무도 없었다.
제법 바람이 세게 불어와 몸을 움츠리게 했다. 아무도 없는 공원 의자에 앉은 채린과 동원, 채린은 굳어진 채로 말없이 앞만 바라보고 있고 동원은 그런 채린을 쳐다본다.
“우리가 왜 이렇게 됐니?”
“......”
채린은 동원을 외면했다.
“채린아! 난 정말 몰랐다. 너에겐 변명으로 들리겠지만 어머니께서 너를 만난 줄은..... 너의 소식도 궁금하고 귀국 인사도 할 겸 이 교수님 연구실에 들려 네 소식을 묻자 교수님께서는 한사코 채린이 너에 대한 얘기를 피하시기에 물었지. 교수님께서는 더 이상 너를 힘들게 하지 말라고 하시더군. 그리고는 입을 다문 채 한동안 아무 말씀도 없으셨어. 교수님께서 그렇게 고통스러워하시는 얼굴을 보기는 그 때가 처음이었어. 도대체 채린이 네게 내가 모르는 무슨 일이 있었던 거니?”
채린은 동원이 고통스러워하는 얼굴을 보면서 가슴이 아팠다. 가슴 한쪽에서는 시퍼런 칼날에 베인 것 같은 통증이 느껴졌다. 그 때의 아픔이 다시 살아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채린은 동원을 쳐다보았다. 동원의 말소리가 그녀의 귓가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동원이 독일로 출국하기 한달 전 아침이었다. 채린은 강의가 없어 다른 날보다 늦게 잠에서 깨어났다. 샤워를 하려고 욕실로 들어간 채린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부은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최근 들어 피로가 쉽게 밀려오고 자고 일어나도 몸이 가볍지가 않았다. 채린은 순간 뇌리에 스치는 게 있었다. 채린은 거실로 달려나와 벽에 걸려있는 달력을 넘겼다. 달력의 날짜를 하나 하나 짚던 채린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떨구었다. 그리고는 혼잣말로
“설마...... 설마. 아니지!”
채린은 거실을 몇 시간째 왔다 갔다 할 뿐 어떤 결정을 내릴 수가 없었다. 밖에서 누군가 초인종을 눌렀다.
채린이 감시경을 통해 밖을 내다보자 복도에는 비싸 보이는 투피스에 고가의 백을 든 50대 중반쯤의 여자가 서 있었다. 채린이 문을 열자 그 여인은 ‘빨리 열지 못하고 꾸물대느냐’는 듯 채린을 위 아래로 쳐다보았다.
“죄송하지만.”
그 여인은 채린이 말을 맺기도 전에 밀고 들어와 거실을 살폈다. 그리고는 선 채로
“네가 한 채린이지?”
“네. 그런데 누구신지.”
“경영학과 강동원 알지? 그 아이가 내 아들이야. 직접 얼굴을 보는 건 처음이지?”
채린은 자신 앞에 서있는 여인의 입에서 ‘동원이 내 아들’이란 말에 온 몸이 굳는 듯 했다. 그 여인은 ‘이제는 알았냐’는 듯 의기양양해 채린을 쳐다보았다.
“내가 이 곳에 왜 왔는지는 알지?”
“무슨 일로.”
“똑똑한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었나 보네. 그럼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잘 들어! 우리 동원이와 넌 여러 가지로 맞지가 않아. 그건 너도 잘 알고 있겠지? 결혼이란 게 사랑 하나만으로는 절대로 이루어지지가 않아. 두 집안의 배경이 함께 따라가는 거야. 우리 동원인 할 일이 많은 애야. 유학도 갔다 와야 하고 돌아와서는 아버지 뒤를 이어 호텔 일도 맡아야 해. 더 중요한 것은 우리 집안에서는 동원이 짝으로 생각해 놓은 아가씨가 있다는 거지. 괜히 우리 동원이한테 맘 주고 아파하지 말고 이 시간 이후로 절대 만나지 마. 이 모두가 너를 위해 하는 말이니 명심하고.”
채린의 어머니는 자기 할 말만 하고 횡 하니 뒤돌아서 채린의 아파트를 나갔다. 채린은 충격에 한동안 거실에 주저앉아 꼼짝을 하지 못했다. 시간이 흘러 거실은 깜깜해졌다. 채린은 겨우 몸을 추스르고 일어나 거실의 불을 켠 다음 전화 수화기를 들었다.
“이 교수님 댁이죠? 저 채린이예요.”
채린은 겨우 자신을 밝히고는 그 자리에 쓰러졌다. 채린이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살피자 이 교수와 그의 부인 민 여사가 침통한 얼굴로 자기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채린아!”
“채린아! 정신이 드니?”
“여기는?”
“생각 안나니? 통화하다 말고 끊어져 아파트에 갔더니 네가 거실에 쓰러져 있더구나.”
“죄송해요!”
“채린아!”
이 교수는 김 박사가 한 말이 생각났다. 이 교수가 알고 있는 김 박사는 상대방이 어떤 잘못을 해도 그 이유가 타당성이 있으면 좋은 쪽으로 생각을 바꾸는 성격이었다.
그런데 지금 김 박사는 세상에서 가장 친한 친구에게 화를 내고 있는 것이다.
“자네가 채린이 저 녀석 보호자라고 하더니 맞나? 애가 저 지경에 이르기까지 왜 그냥 두었나! 잘못했으면 모두 잃을 수도 있었어.”
“자네 지금 무슨 얘기하는 건가? 모두 잃다니! 알아듣기 쉽게 말해 보게.”
“자네 몰랐나? 채린이가 임신한 걸.”
이 교수가 크게 놀라며
“임신? 누가! 우리 채린이가 임신이란 말인가?”
“그래. 놀랍겠지만 채린이는 지금 임신 중이야.”
“얼마나 되었나?”
“6주정도 되었다네. 자세한 얘기는 산부인과 김 박사하고 얘기해보게.”
“알겠네.”
이 교수는 김 박사의 진료실을 나오면서 앞으로 채린에게 어떤 일이 벌어질지 걱정이 앞섰다. 민 여사는 힘없이 채린의 병실로 들어오는 남편을 걱정스럽게 쳐다보았다.
“김 박사님은 뭐라고 하세요?”
“음! 갑자기 정신적인 쇼크를 받아서 그렇다는대, 오늘 하루 경과를 지켜보자고 하니까 당신이 여기 있구려. 난 학교에 갔다가 저녁에 다시 올 테니.”
“그래요! 여기는 걱정 마시고 다녀오세요.”
“그럽시다. 저 여보......아니야.”
이 교수는 병실을 나가다 채린을 돌아보았다. 뒤따라 나오는 민 여사에게
“따라나올 거 없어요. 채린이 식사 전인 거 같으니 뭐라도 챙겨 먹이도록 해요.”
“알았어요.”
채린은 이 교수가 부인에게 얘기하는 것을 그냥 듣고 있기가 불편했다.
“교수님! 저 정말 괜찮아요”
“아니다. 이왕 여기까지 왔으니 오늘은 여기서 쉬고 내일 퇴원하자.”
이 교수가 병실을 나간 후 채린은 민 여사에게 퇴원하겠다고 보챘다.
“채린아! 교수님 말씀대로 해.”
“저 정말 괜찮아요.”
“그렇게 건강한대 왜 쓰러지고 그래! 아무 말 하지말고 쉬어라.”
“......”
“채린아! 이 기회에 우리 집으로 들어오면 안되겠니? 어머니 돌아가셨을 때 합치자니까 말도 안 듣더니 이렇게 어른을 놀래키기나 하고 말야!”
“죄송해요. 지금도 두 분 신세를 많이 지고 있는 대, 저 혼자서도 잘하고 있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너와 우리 사이에 신세랄 게 뭐 있겠니?”
“고맙습니다.”
민 여사는 예리했다. 그리고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은 정확히 하는 사람이었다.
“채린아! 동원이는 잘 지내지?”
“그럼요.”
민 여사는 순간적으로 채린의 얼굴에 그늘지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교수님도 집에 들어오면 서재로 들어가 꼼짝도 안 하시니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
“교수님께서요?”
“그래! 자기 집처럼 들락거리던 동원이도 요즈음은 통 얼굴을 볼 수가 없고.”
“사모님! 사실은 동원씨 독일로 유학 간대요.”
“동원이한테 직접 들은 거니?”
“아니요. 동원씨 어머니가 집으로 찾아 와서는......”
“그랬구나.”
민 여사는 채린의 말을 듣자 그 상황이 느껴졌다.
“뭐라고 하시니?”
채린이 갑자기 소리내어 울기 시작했다. 그런 채린을 민 여사는 품에 안고 등을 토닥였다.
“그래! 얘기하지 마라. 네가 말 안 해도 무슨 말이 오고 갔는지 알겠구나.”
민 여사는 채린이 우는 것을 보자 너무나 가슴이 아팠다. 채린은 강한 아이였다. 민 여사는 한 번도 채린에게서 힘들다는, 도와달라는 얘기조차 듣지를 못한 터에 동원의 어머니가 채린의 집을 다녀갔다면 뻔한 얘기가 오고 갔을 것이다.
채린의 울음소리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조금씩 잦아들고 있었다. 채린이 울다 지쳤는지 아니면 간호사가 놓고 간 약 기운 때문인지 민 여사의 품에 안겨 잠들었다. 민 여사는 채린을 침대에 다시 눕히고 병실을 나왔다.
이 교수가 뭔가 말하려다가 하지 못했던 말이 내내 궁금했었다. 민 여사는 김 박사의 방을 찾았다. 김 박사가 일어나 반갑게 맞이한다.
“제수 씨가 내 방을 다 찾아 주다니 영광인대요!”
“죄송해요. 자주 찾아뵙지도 못하고 이런 때만 신세를 지네요.”
김 박사는 민 여사와 자리를 함께 할 때마다 이 교수가 부럽다 못해 질투가 났다. 조용한 성격과 단아한 자태, 그리고 자신의 남편을 명성대 차기 총장 후보로까지 올려놓은 그녀의 지혜로움 때문에......
“박사님! 우리 채린이 상태가 어떤가요? 단순히 정신적인 쇼크 때문만은 아닌 것 같은 대.”
“제수 씨가 잘 보셨습니다. 채린이는 지금 임신 중입니다.”
“네! 지금 임신이라고 말씀하셨나요?”
“네.”
민 여사는 김 박사의 충격적인 선포에 모든 신경이 마비되는 것 같았다. 절망으로 인해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한 민 여사의 반응에 김 박사조차도 이 상황을 수습할 방법이 선뜻 떠오르질 않았다.
“아! 어쩌면 좋아요.”
“제수 씨! 우선 채린이가 문제예요.”
민 여사는 채린도 이미 자신의 몸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깨닫고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박사님! 채린이도 알고 있을 겁니다. 모든 면에서 반응이 빠른 애인지라, 이미 상황 판단하고 있을 거예요.”
“그렇다면 누구라도 설득할 일만 남았군요.”
“아! 이 일을 어떻게 하나.”
민 여사는 병원복도 벽에 기대어 서있었다. 민 여사 자신이 어떻게 김 박사 방을 나왔는지 궁금해하며.... 이게 꿈이었으면 좋으련만.
이 교수는 병실을 나왔지만 금방 출발할 수가 없었다. 그동안 까맣게 잊고 살았던 채린의 엄마가 생각났다. 간호사였던 자신조차도 자신이 앓고 있는 병이 죽음까지 이르리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면서 그의 연구실을 찾아왔었다. 밖에서 노크소리가 들렸다.
“들어오세요.”
이 교수는 자신의 연구실로 들어오는 낯설은 여인을 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떻게 오셨죠?”
“이 상학 교수님을 뵙고 싶어서 왔습니다.”
“제가 이 상학 교수입니다만, 우선 앉으시죠!”
“감사합니다.”
“무슨 일로 절 찾으셨는지요.”
“예. 전 교수님께 가르침을 받고 있는 한 채린 학생의 엄마입니다.”
“아! 채린이요. 그런데 무슨, 채린에게 무슨 일이 생겼나요?”
“그건 아닙니다.”
채린의 엄마라고 자신을 밝힌 여인은 이 교수의 물음에 이내 대답을 하지 못했다. 고개를 숙이고 있던 여인이 고개를 든 순간, 이 교수는 그녀의 볼 위로 흐르는 눈물을 쳐다보았다.
“교수님! 사실은 교수님께 부탁이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무슨 일인지, 제가 도와 드릴 일이 있으면 기꺼이 돕겠습니다.”
“교수님! 전 이 대학병원에서 간호과장으로 근무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 정기 건강검사를 받았는 대 폐암 말기 진단을 받았습니다. 그동안 많이 바빴고 자각 증상이 나타나지 않아 설마 했는 대”
이 교수는 여인으로부터 癌이라는 말을 듣자, 마치 자신의 검사결과인 양 하늘이 무너지는 착각을 했다.
“우리 채린이가 교수님에 대하여 여러 가지 말들을 하길래 교수님이시라면 우리 채린이의 장래를 맡길 수 있다고 생각되어 염치 불구하고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교수님! 우리 채린이는 정말 불쌍한 아이입니다. 채린이가 태어나기도 전에 아버지를 잃고 이제는 저까지 채린이 곁에서 떠나야 되니 그 아이가 누굴 믿고 살아야 할지 하늘이 원망스럽기만 합니다. 교수님! 우리 채린이를 보호해 주세요.“
여인은 자기가 그동안 채린을 위해 넣어 두었다는 통장과 증서들을 이 교수 앞에 내놓았다. 이 교수는 자신 앞에 있는 통장과 증서들을 여인 앞으로 밀었다.
“아닙니다. 어머니께서 그냥 보관하세요.”
“교수님! 언제 어디서 어떻게 될지 모릅니다.”
“교수님께서 보관하셨다가 우리 채린이에게 어떤 일이 생기면 알아서 처리해 주세요.”
“그러시다면 제가 잘 보관하고 있겠습니다.”
“교수님! 우리 아이는 제가 癌인 줄 모르고 있습니다.”
“채린이도 어머니께서 癌인 줄 알아야 마음의 준비를 하지 않겠습니까? 제 말이 너무 냉정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채린이는 강한 아이니 잘 이겨낼 것입니다.
"어머니! 채린이를 위해서라도 희망을 잃지 마세요.”
“그럼. 교수님께서 제 부탁을 들어 주신 것으로 알고 이만 가보겠습니다. 시간 내주셔 감사합니다”
여인은 자신의 일을 다 마쳤다고 생각했는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교수는 돌아서 나가는 여인을 쳐다보며 ‘채린이 엄마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생각을 했다.
이 교수는 돌아서 연구실을 나가는 채린의 엄마를 보면서 우울해지는 기분을 어찌할 수 없었다. 이 교수는 얼마 후 채린의 엄마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이 교수는 화장하지 않은 얼굴에 검은 정장의 상복을 입은 채린을 보면서 상복을 입어도 아름다운 사람이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깨달았다.
이 교수는 지나간 기억 속에서 벗어나 차 시동을 걸었다. 채린의 엄마가 지금 채린이 옆에 있었다면 이 상황이 좀 나아지지 않았을까 생각하면서......
채린은 자기네 집으로 가자는 이 교수 부부를 힘겹게 설득시켜 자신의 아파트로 돌아왔다.
“정말 괜찮겠어?”
“예. 걱정하지 마세요.”
민 여사는 그녀 자신이 채린의 아파트에 머물면서 채린을 보살피겠다고 했지만 채린은 생각을 정리하고 싶다며 혼자 있기를 원했다.
“그래. 네 뜻을 충분히 알았으니 맘먹은 데로 해.”
이 교수와 민 여사는 채린을 아파트까지 데려다 주고는
“그럼. 쉬어라. 무슨 일 있으면 꼭 전화하고.”
“예. 그렇게 할 께요.”
그 날 저녁, 동원이 채린을 찾아왔다.
“미안해. 이 교수님께서 네가 병원에 있다는 말은 하셔서 알고 있었는데 아버지가 긴급 호출을 해서 바로 올 수가 없었어. 미안하다.”
“교수님께서 괜한 말씀을 하셨네요!”
“많이 섭섭했나 보구나. 너답지 않은 말을 다하고.”
동원은 며칠 사이에 채린의 얼굴이 초췌해진 것을 보니 가슴이 답답해져 옴을 느꼈다.
“지금은 괜찮은 거야?”
“예.”
“오늘은 내가 네 옆에 있을 테니 걱정하지 말고 푹 자.”
“고마워요.”
채린은 동원이 그의 어머니가 이 곳을 방문해서 무슨 말을 남기고 갔는지를 모르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채린은 불안감을 애써 감추며 동원의 품에 안겨 잠을 청했다.
새소리에 먼저 잠에서 깬 채린은 베란다로 나갔다. 새벽 공기가 제법 차가웠다. 인기척이 나 돌아보니 동원이 양손에 찻잔을 들고 서 있었다. 커피 향이 아침의 맑은 공기를 타고 채린의 코끝을 자극하고 있었다.
“언제 일어났어요?”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하게 해? 왔다 갔다 하는 것도 전혀 모르고......”
“무슨 생각을 하겠어요! 동원 씨가 제 옆에 있는 대 아침의 찬 듯하면서도 상쾌한 이 느낌이 너무 좋아요! 동원 씨! 아침 속의 이 향 좀 맡아봐요.”
동원은 채린의 말에 얼굴을 앞으로 빼고 코를 킁킁 거렸다. 그런 동원을 바라보면서 채린은 아주 잠깐 동원의 어머니 일을 잊을 수 있었다. 갑자기 동원이 의미심장한 얼굴을 하고채린을 쳐다보았다.
“채린아! 우리 강의 빼먹고 여행갈까?”
“정말이요?”
“지금 떠나자. 역에 가면 부산가는 기차시간하고 맞을 거야!”
채린은 동원의 말이 채 끝나기 전에 방으로 들어와 주섬주섬 준비를 했다.
“녀석! 그렇게 좋나?”
채린은 서둘러 준비를 마치고 거실로 나왔다.
“출~발”
채린과 동원은 부산 광안리 모래사장에 서있었다. 동원은 잊고 있었다는 듯
“채린아! 오늘 이 교수님 강의 있는 대......난 죽었다.”
동원이 채린을 향해 웃고는 모래사장에 팔베개를 하고 벌렁 드러누웠다. 그런 동원을 보는 채린은 웃음이 터져 나왔다. 채린 역시 오후에 이 교수의 강의시간이 있었기 때문이다. 동원은 일어나 채린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에이 모르겠다. 오늘은 다른 생각하지 말고 이왕 여기에 왔으니 기분 좋게 보내자.”
“......”
태종대에는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젊은 연인 몇 쌍만이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채린과 동원도 서로에게 기댄 채 한동안 그렇게 서서 말없이 바다를 바라보았다. 갈매기들이 먹이를 찾아 연거푸 바다 속에 머리를 넣었다 다시 날아가곤 하였다. 채린이 불어오는 바닷바람에 몸을 움추리자
“춥니?”
“예.”
“채린아! 나 아버지 모시고 독일에 갔다와야 할 거 같아.”
“독일에요?”
“음. 그 곳에 있는 호텔 하나를 인수하려 하는 대 사안이 워낙 중요하기 때문에 아버지가 직접 가시거든. 실전경험도 쌓을 겸해서 어머니가 아버지 모시고 갔다오라고 권유하셔서 가기로 맘먹었어. 그렇게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야.”
동원의 말이 끝나자 채린은 주저앉을 뻔했다.
“채린아! 왜 그래?”
“괜찮아요.”
“아직 완쾌되지 않았는 대 너무 무리했나 보구나.”
“정말 괜찮다니까요!”
동원은 쟈켓을 벗어 채린의 어깨에 걸쳐주고 감싸 안았다. 채린은 동원을 바라보면서 두려움에 몸을 움추렸다. 동원과 채린은 태종대를 내려와 자갈치 시장에 들렸다.
채린은 횟집 앞을 지나다 어항 안에서 살아있는 고기들의 힘찬 몸짓을 보면서 생각했다. 그녀 자신이야말로 유리 어항 속에 잡혀있는 물고기 같다는,
앞서 걷던 동원은 채린이 따라오지 않자
“채린아! 거기서 뭐하니?”
동원이 채린에게로 걸어왔다.
“뭘 그렇게 뚫어지게 보니? 우리 회 한 사라 먹고 갈까?”
채린이 웃자 동원은 식당 문을 열고 안으로 걸어 들어가 식탁 앞에 앉았다. 채린도 동원이 앉아 있는 식탁으로 걸어가 맞은 편에 앉았다.
“채린아! 뭘로 먹을까?”
“살아있는 고기를 잡아먹는다는 게 가슴 아프네요.”
채린이 웃었다. 그리고
“언젠가 여름에 엄마랑 여행을 한 적이 있어요. 마침 복날이 중간에 있어서 토종 삼계탕을 잘한다는 식당엘 들어갔거든요. 음식이 나오기를 기다리면서 엄마랑 얘기를 하고 있는 대 갑자기 닭울음소리가 짧게 들렸어요. 그 후로 엄마와 전 고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게 되었어요.”
“그럼. 한 번도 회라는 걸 먹어 본 적이 없다는 거니?”
채린이 고개를 끄떡이자 동원이 크게 웃었다. 동원이 웃음을 멈추고 진지하게 채린을 쳐다보았다.
“미안하다. 모두가 내 잘못이다.”
“그게 무슨 잘못이예요? 단지 먹어 볼 기회가 없었던 것뿐인 대.”
“그래도 그렇지. 채린아! 우리 올라가면 시간 날 때마다 횟집에 가서 이것저것 먹어 보자.”
채린이 이번에도 대답대신 웃었다.
“왜 웃기만 하는 거야? 좋아 이제부터는 내게 맡겨. 알았지?”
“예.”
자갈치 시장을 나와 역에 도착했을 때는 어느덧 어둠이 제자리를 찾아 버티고 있었다. 채린은 동원에게 묻고 싶은 것을 참으며 동원을 따라 기차에 올랐다.
동원은 채린을 창 쪽에 앉게 하고 채린의 머리를 자신의 어깨에 기대게 하였다.
“채린아! 오늘 많이 피곤했지?”
“괜찮아요! 오히려 그냥 있었어도 답답했을 텐데 고마워요.”
“무슨 인사를 그렇게 정색을 하고 하니? 우리 사이에......피곤할 텐데 다른 생각하지 말고 눈 좀 붙여라. 도착하면 내가 깨워 줄께.”
“괜찮아요!”
“아니! 내가 괜찮지 않아.”
“그럼 기대고만 있을 께요.”
“음.”
재현은 채린이 눈을 감자, 창 밖을 바라보았다. 멀리 도시의 야경이 눈에 들어왔다. 점점 이어진 길옆의 가로등이 유난히도 쓸쓸해 보였다. 채린을 쳐다보니 그녀는 깊이 잠들어 있었다. 동원도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얼마나 지났는지 두 사람은 ´기차가 대전에 도착했다´는 안내방송 소리에 놀라 잠에서 깨어났다. 시계를 보니 열한시가 넘어서였다.
기차에서 내린 두 사람이 채린의 아파트에 도착한 것은 거의 자정에 가까워서였다. 엘리베이터 앞에 서있을 때였다.
문 위 전광판이 1층을 가리키고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뜻밖에도 이 교수가 내렸다. 놀란 두 사람은 동시에
“교수님!”
“자네들 강의도 빼먹고 어디를 갔다가 이렇게 늦은 건가?”
“죄송합니다.”
이 교수는 채린을 쳐다보았다.
“몸은 좀 어떠니? 하루종일 전화연결도 안되고 걱정이 되서 집으로 가는 중에 들렸다. 너무 늦었으니 채린이는 올라가고 동원이 자네는 같이 나가지.”
“예.”
동원은 눈짓으로 채린에게 인사를 대신하였다. 채린이 탄 엘리베이터가 올라가는 것을 확인한 이 교수와 동원은 입구를 빠져나와 이 교수 차에 올랐다.
채린은 베란다에 서서 이 교수의 차가 아파트를 빠져나가는 것을 확인하고는 거실로 들어왔다. 채린은 갑자기 생각난 듯 거실에 있는 백과사전을 찾았다. 책장을 펼쳐 임신과 육아란 곳에 이르자 빠짐없이 읽어 내려갔다.
“아! 이일을 어쩌지.”
채린의 얼굴이 하얗게 변해갔다. 채린은 밤새 뜬눈으로 왔다 갔다 했다. 밤잠을 설친 채린은 창 밖이 밝아오자 거실을 서성대기 시작했다. 거실 벽에 있는 시계는 7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병원 진료가 시작되려면 2시간 반정도 있어야 한다. 채린은 급히 외출 준비를 했다. 채린이 택시에서 내린 곳은 강 윤상 산부인과 맞은 편이었다. 병원을 바라보니 셔터가 올라가 있고 안에서 인기척이 있었다.
한참을 망설이던 채린은 결심한 듯 횡단보도를 건넜다. 병원주변은 이른 시간 탓인지 오고가는 사람들이 드물었다. 채린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수납창구에는 간호사가 환자를 받기 위해 열심히 주변 정리를 하고 있었다. 간호사는 들어오는 채린을 보고서는
“진료 전입니다.”
“알고 있습니다. 죄송하지만 원장님을 뵐 수 있을까요?”
간호사는 재빨리 채린을 살폈다. 간편한 옷차림에 나이는 어린 거 같았지만 어딘지 모르게 귀티가 흐르고 본인 스스로가 정리를 잘하는 타입인 듯 했다.
걱정스러운 것은 이른 시간에 산부인과를 찾고 더욱이 원장님을 뵙고 싶다는 게 문제일 뿐, 그러나 채린이 보기에도 간호사는 오랜 병원 생활에서 터득한 건지는 몰라도 자신의 속내를 밖으로 표출할 만큼 어리석은 여자로는 보이지 않았다.
“연락 드려 보겠습니다.”
간호사는 채린에게 의자를 가리키며
“저 쪽에서 잠시 대기해 주세요.”
채린이 의자에 앉는 것을 보자 간호사는 인터폰을 들었다.
“원장님! 명 인숙 간호삽니다”
그리고 상대방이 방문객의 신상을 묻는지 채린에게 물었다.
“누구시라고 말씀드릴까요?”
“한 채린이라고 말씀드려 주세요.”
명 간호사가 ‘한 채린’이라고 말한 후 채린을 다시 돌아보면서 뭔가 물어보려 했으나, 상대편에서 됐다고 했는지 그대로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잠시 후 계단을 내려오는 구두 소리가 들리고 하얀 가운을 걸친 40대 중반쯤 되는 남자가 채린 앞에 섰다.
“제가 원장입니다만 무슨 일로 저를 찾았나요?”
채린이 의자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다.
“한 채린이라고 합니다.”
강 원장은 그냥 예쁘다는 말로 지나치기에는 표현력이 부족하다고 할 정도로 채린의 외모에서 풍기는 단아함이 정말 맘에 들었다.
강 원장은 지금까지 예쁜 여자는 많이 보았다. 그러나 그냥 예쁠 뿐 지금 자신의 앞에 있는 이 젊은 여자처럼 완벽에 가까운 분위기를 갖고 있는 여자는 드물었다.
“안으로 들어가시죠!”
강 원장은 채린을 원장실로 안내했다. 수납창구에 있는 명 간호사에게
“미안하지만 차 좀 부탁할까요?”
“알겠습니다”
명 간호사는 원장으로부터 차 심부름을 부탁 받기는 처음이었다. 이른 아침, 진료를 받기 위해 찾아오는 환자도 없었지만 손님이 찾아와도 차 대접은 강 원장 스스로 알아서 했기 때문이었다.
명 간호사는 녹차 두 잔을 준비해 두 사람 앞에 놓고 뒤돌아 나오며 채린을 쳐다보았다. 그녀는 이른 아침에 병원을 찾은 젊은 여인에 대하여 궁금증이 더해가고 있었다.
“조금 전 원장님이 저 여자에게 대하는 것을 보면 서로가 잘 아는 사이 같지는 않은 대....”
명 간호사는 주위를 살핀 뒤 문에 귀를 기울였다. 채린은 방금 전 명 간호사가 놓고 간 찻잔을 쳐다보고 있었다.
찻잔에서 피어오르는 김이 창으로 들어오는 햇살에 곡선을 그리며 공중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강 원장은 말 없이 찻잔만 바라보고 있는 채린을 쳐다보고
“식기 전에 들어요!”
“고맙습니다.”
채린은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차 향이 참 좋네요!”
채린의 향이 좋다는 말에 강 원장도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그렇군요. 그런데 저를 어떻게 알고 여기까지 찾아왔나요?”
강 원장은 채린의 하얀 얼굴에 살짝 비껴가는 어둠의 그림자를 보았다.
“죄송합니다. 제가 시간을 너무 지체했군요. 전 명성대학에 다니고 있습니다.”
강 원장은 눈치가 빠른 사람이었다. 채린이 명성대학에 다니고 있다는 얘기만 듣고서도 사촌 동생인 동원을 생각해 냈다. 강 원장은 채린의 다음 말을 조용히 기다렸다.
“저....명성대학에 다니고 있는 강 동원씨 아시죠?”
“동원이요!”
“예.”
“사촌 동생입니다만......아! 그럼 동원이가 만나고 있다는 아가씨가 바로....“
“예! 제가 바로 그 한 채린입니다. 우리 두 사람이 아직 학생이고 다름 아닌 동원씨가 관련되어 있는 터라 누구와 상의할 문제도 아니고 해서 고민 끝에 강 원장님을 찾아뵌 것입니다.”
“언젠가 동원이가 찾아와서 채린씨에 대해서 한 번 얘기하더군요. 사실 동원이와 난 사촌이기는 해도 서로 바쁜 탓에 집안 행사 때만 이따금씩 만납니다. 조금 전에 동원이와 관련 있다고 들은 거 같은 대 무슨 일이죠?”
“원장님! 동원 씨가 독일로 유학 가는 것은 알고 계시죠?”
“예. 얼마 전 형수님! 아니 동원이 어머니께서 검진 차 왔다가 말씀하시더군요.”
강 원장은 아주 잠깐 채린이 동원이 유학 가는 문제 때문에 자신을 찾아왔다고 생각했다.
“동원 씨 어머님께서 벌써 이 곳엘 다녀가셨군요.”
“원장님! 부탁이 한 가지 있습니다. 제가 여기에 왔다 갔다는 말씀을 동원 씨나 어머님께도 말씀드리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야 된다면 그렇게 하죠!”
“정말입니다. 원장님과 저, 두 사람만 아는 일로 하고 싶습니다.”
채린은 한참을 망설였다.
“원장님! 검사를 받고 싶어요!”
강 원장은 채린의 입에서 나온 검사란 말에 채린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채린은 남들이 꺼리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강 원장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당당히 자신의 의견을 전했다.
“예정일이 벌써 한참을 지났어요”
문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명 간호사는 안에서 강 원장과 채린이 주고받는 말을 듣고 놀라움에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했다.
명 간호사는 분명 채린이 검사를 받고 싶다고 말했기 때문에 강 원장이 자신을 부를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몇 분이 흘러도 안에서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없자 다시 문에 귀를 댔다. 강 원장은 혼자 검사 준비를 마치고 채린을 침대에 눕도록 했다. 채린의 복부 아래쪽에 초음파를 대자 검은 점 하나가 보였다. 강 원장은 화면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갈등에 쌓였다.
“아! 이 일을 어쩌나! 형수가 알면 그 성격에 이 아가씨를 그냥 곱게 두지는 않을 텐데......”
채린도 강 원장의 표정에서 자신의 생각대로 임신한 것이 맞다는 것을 알았다. 강 원장은 채린이 옷을 추스르는 동안 원장실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채린씨도 예상하고 있었겠지만 임신이 맞습니다.”
강 원장은 채린이 앞으로 이 엄청난 일을 어떻게 감당해낼지 걱정되었다. 그러나 강 원장 자신이 보기에는 채린이 너무나 침착해 보였다.
“얼마나 되었죠?”
“7주정도 되가는군요. 채린씨! 동원이는 모르고 있는 거 같은 대 내 생각이 맞나요?”
“예, 모르고 있습니다.”
“그럼 어떻게 하려고요! 하루라도 빨리 동원이와 상의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채린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원장님만 믿겠습니다.”
강 원장은 명함꽂이에서 자신의 명함을 꺼내 채린에게 건넸다. 채린은 급할 때 언제라도 꺼낼 수 있도록 백 뒤쪽 지퍼를 열고 그 곳에 강 원장의 명함을 꽂았다.
“채린 씨! 태아한테는 산모의 안정이 제일 중요하다는 거 알고 있죠? 항상 몸조심해야 해요”
“예! 알겠습니다.”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연락 줘요”
“예.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강 원장은 병원 문을 나가는 채린의 뒷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쳐다보고 있다가 그녀가 보이지 않자 원장실로 들어갔다.
명 간호사는 대학병원에 있을 때부터 강 원장 옆에 있었지만 오늘 같은 일은 처음이었다.
한 때 그녀 자신도 강 원장을 남몰래 흠모한 적이 있었지만 그가 결혼한 후 자기 가족들에게 충실한 것을 본 후로 그 열정도 식은 지 오래였다.
“강 동원! 강 동원이라면 대학병원에 있을 때 강 원장을 찾아온 세헤란호텔의 후계자라는 그 사람 말인가?”
명 간호사는 전화기를 들었다,
“정희니? 나 인숙이야! 뭣 좀 물어보려고.”
명 간호사는 주변을 살핀 뒤
“정희야! 대학병원에 있을 때 강 회장님 사모님하고 아들이라면서 우리 원장님 찾아왔던 사람이 명성대학 다니는 강 동원 그 사람 맞지?
상대편에서 맞다고 하는지 명 간호사는
“그래. 맞구나. 아니! 무슨 일이 있는 게 아니고 문득 생각나서, 얘! 나 궁금한 거는 못 참잖니!”
명 간호사는 수화기를 놓고 자리에 앉으며 원장실을 힐끔 쳐다보았다.
채린은 병원을 나와 택시를 탔다. 햇살 때문인지 아니면 뱃속에 있는 아이 탓인지 갑자기 어지러우며 비위가 상했다. 창문을 내리자 상큼한 바람이 불어왔다. 채린은 아파트로 돌아오는 내내 가슴 한쪽이 답답해져 오는 것을 느꼈다.
채린은 병원에서 검사를 받은 후로는 이 교수 강의시간에도 집중하지 못하고 창 밖만 쳐다보고 있었다. 이 교수도 그런 채린이 신경 쓰였지만 모른 체 지나갔다. 채린은 강의가 끝나는 종이 울리자 뒷문으로 걸어갔다.
“채린아! 다음 강의 들어가기 전에 시간 있지?”
“예.”
“그럼. 잠시 나와 얘기 좀 할까?”
“예.”
채린은 이 교수를 따라 강의실을 나와 건물 앞 의자에 앉았다. 맑은 햇살은 간간이 불어오는 바람과 어울려 보는 이로 하여금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었다.
“얼굴이 왜 그러니? 아직 몸이 완쾌되지 않은 거 아니니?”
“괜찮아요! 걱정하실 정도는 아니예요.”
“그럼 다행이지만, 채린아! 너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면 꼭 나랑 먼저 상의해야 한다. 알았지? 너에 관한 일을 너 아닌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 듣기는 정말 싫다. 네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몰라도 내 바램은 너에게 정말 아버지 같은 존재이고 싶구나.”
채린은 이 교수의 세심한 배려에 눈물이 핑 돌았다.
“예. 제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제일 먼저 말씀드릴께요”
“그럼 됐다. 어서 가봐라! ”
이 교수는 힘없이 걸어가는 채린의 뒷모습을 보면서 채린이 고민하는 것을 함께 나누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기만 했다.
5월의 햇살이 내려앉는 교정에는 아카시아꽃 향기가 있고 푸르름이 젊음을 더욱 더 빛나게 했다. 축제의 영향인지 의자마다 연인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채린은 며칠째 심한 입덧으로 고생을 하고 있었다. 동원을 만나지 못한 것도 벌써 보름이나 되었다.
“채린아!”
채린은 이 교수가 부르는 소리에 몸을 추스르고 앉았다.
“강의 시작할 시간인대 왜 여기에 있니?”
“교수님!....”
채린이 말을 잇지 못하자 이 교수는
“어디 아프니? 얼굴이 많이 창백하구나.”
“.......”
“안되겠다. 이번 강의는 빠지고 내 연구실에 가 있거라.”
“아니예요. 교수님! 혹시 동원씨 못 보셨어요?”
“아니! ”
이 교수는 초췌한 채린의 얼굴을 보고서는 도저히 동원에 대해서 말할 수가 없었다. 동원의 모친은 동원이 오늘 그의 아버지랑 독일 출장에 동행한다고 했다. 만약 무슨 일이 생기면 채린이 제대로 졸업할 수 없을 거라며.....
이 교수는 시계를 보았다. 2시간 후면 동원이 이 나라를 떠난다.
“채린아! 이번 강의가 끝이니 내 연구실에 가서 쉬고 있어. 집에 데려다 줄 테니”
“알겠습니다.”
이 교수는 채린이 그의 연구실을 향해 걸어가는 것을 확인하고 강의실로 들어갔다. 채린은 이 교수 연구실 문을 밀려다 열려진 문틈으로 말소리가 흘러나오자 걸음을 멈추고 그 앞에 서있었다.
“엄마라는 사람이 어쩜 아들과는 그렇게 딴판이니! 아예 교양하고는 담쌓고 지내는 것 같더라. 돈만 많으면 아무렇게나 해도 되는 거니?”
“교수님이 무슨 죄가 있다고, 그렇게 망발을 할 수가 있어!”
“정말 이해가 안 간다 야. 그건 그렇고 경영학과 강 동원이라는 애 오늘 독일로 출국한다면서?”
“그래! 말로는 이번 상담이 아주 중요한 거라 실전경험도 쌓을 겸 아버지와 동행한다지만......엄마라는 그 여자 보니까 그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야야! 그만 해라 그만해. 입에 담기도 싫다. 그런 여자 정말 왕재수야!”
채린은 정신 없이 학교를 뛰어나와 지나가는 택시를 잡았다.
“아저씨! 공항으로 가주세요.”
공항으로 가자는 채린의 말에 50대쯤 되 보이는 택시기사 아저씨는
“학생! 탑승시간이 어떻게 되는지 모르겠네. 차가 많이 밀리는 시간인대.”
“아저씨! 급해서 그러는 대 빨리 좀 가 주세요. 부탁합니다.”
택시기사는 채린의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힐끔거리고는 속도를 올렸다. 채린이 공항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탑승수속이 끝난 상태였다.
허탈함에 공항을 걸어나오던 채린은 갑자기 앞에 깜깜해졌다. 얼마나 되었을까! 채린은 누군가 자신을 흔드는 것 같아 눈을 떴다. 이 교수는 채린이 깨어나자 안도의 한숨을 지었다.
“채린아!”
“교수님! 여기는?”
“병원이야. 생각나지 않니? 공항에서 쓰러져 마침 옆을 지나가던 여행객이 네 가방에 든 명함을 보고 이리로 연락을 했다는구나. 강 원장이 너를 데려왔단다.”
채린은 이 교수가 공항이란 말을 꺼내자 서럽게 눈물을 흘린다. 이 교수는 그런 채린을 말없이 쳐다볼 뿐이었다. 노크 소리가 들리고 강 원장이 이 교수를 병실 밖으로 불러냈다. 강 원장은 안에서 들리지 않도록 작은 소리로 말을 꺼냈다.
“교수님! 채린 양이 예민해져 있어 말을 꺼내기가 뭐하지만 수술을 해야 합니다”
“수술이라뇨?”
“교수님께서도 알고 계시는지 몰라도 채린양은 임신 중입니다. 채린양이 진찰을 받고 간 후 연락방법이 없어서 걱정을 했는 대 오늘 연락을 받고 보니 도저히 병원에 있을 수가 없어서 제가 직접 공항에 나갔던 겁니다. 채린 양이 쇼크상태라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검사를 해봤더니 역시 제 생각대로 아기는 아무래도 어려울 거 같습니다. 채린 양의 영양상태도 좋지 않은 데다가 하혈도 보이고......”
이 교수는 강 원장의 말에 절망감을 감출 수 없었다.
“정말 어려운 결정이군요”
“이 교수님! 아기 상태가 정상적이라면 저도 이런 말씀 안 드렸을 겁니다. 그렇지만 채린 양 사정이 너무 딱해서......”
“원장님! 시간 좀 주십쇼. 우선 채린이와 얘기를 나눠 보겠습니다”
“그렇게 하시죠! 정말 죄송합니다. 의사로서 이런 말씀을 드려서”
강 원장이 원장실로 돌아가고 이 교수는 복도에서 한참을 서성였다. 채린은 간호사가 놓고 간 주사약 때문인지 잠들어 있었다.
이 교수는 의자에 앉아 채린의 잠든 모습을 쳐다보았다. 그렇게 앉은 채로 시간이 흐르고 병실에는 어둠이 조금씩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채린이 뒤척였다. 이 교수는 채린의 침대로 다가갔다.
“깼구나.”
“교수님! 지금 몇 시나나 됐어요?”
이 교수는 벽에 걸려 있는 시계를 보았다.
“7시구나. 시간은 왜?”
“저 괜찮으니 그만 댁으로 들어가세요! 사모님께서 기다리시겠어요!”
“그런 걱정 말아라.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하마”
“죄송합니다.”
“채린아! 지금부터 내 얘기 잘 들어라. 다른 생각말고 오직 네 자신만 생각해.”
“......”
“채린아! 지금은 너무 힘들어 다른 생각은 하기도 싫겠지만, 나는 우리 채린이가 이 어려움을 잘 이겨내리라 믿는다. 넌 강한 사람이니까. 채린아! 너는 알고 있지?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이제는 어쩔 수 없어. 힘든 결정이지만 네가 해야 된다. 나는 네가 현명한 판단을 하리라 믿는다”
“알고 계셨군요?”
“음! 얼마 전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김 박사가 알려 주더구나.”
“죄송해요. 미리 말씀드리지 못해서......교수님께서 제게 실망하실 게 두려워서 말씀을 못 드렸어요.”
“괜찮다. 지금껏 네가 얼마나 잘해왔니? 나는 오히려 그게 더 두려웠어. 채린아! 난 네가 어떤 잘못을 했다고 해도 널 믿는다. 네가 그렇게 행동한 데는 분명 이유가 있었을 테니, 단지 많은 사람으로부터 축복 받을 일이 너에겐 고통만 안겨다 주었으니 그 것이 너무 가슴 아프구나.”
채린은 이 교수의 말에 고개를 숙인 채 소리도 내지 못하고 서럽게 울고 있었다. 그런 채린을 보고 있는 이 교수 또한 울고 있었다. 아니 가슴속 깊이 통곡을 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채린아! 강 원장 얘기로는 아기에게 이상이 생겼다는구나. 시간이 흐를수록 아기도 너도 모두 힘들게 된다. 힘든 결정이지만......우리 아기를 편안하게 보내주자. 다시 만날 날을 기원하면서”
“.......”
이 교수는 침대에 누워 수술실로 향하는 채린의 두 손을 꼭 잡았다.
“채린아! 수술실 밖에서 기다릴 테니 아무 걱정하지 말고......”
채린은 대답대신 웃음으로 답했다. 채린이 수술실로 들어가고 1시간쯤 되었을까 굳게 닫혀 있던 수술실 문이 열렸다. 강 원장이 수술장갑을 벗으며 걸어 나왔다. 강 원장은 기다리고 있던 이 교수에게
“수술은 잘 끝났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그런데 시간이 많이 경과되었군요?”
“지난번 저희 병원에 들렸을 때 몇 가지 검사를 했습니다. 검사 결과 중 신경 쓰이는 게 있어서 오늘 수술하면서 자세히 진단하느라 시간이 오래 지체되었나 봅니다.”
“그럼. 결과는?”
“걱정하지 마세요. 다 잘 됐으니.”
“감사합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당연히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그럼 예약한 환자가 있어서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강 원장은 원장실로 들어가려다 걸음을 멈추고
“이 교수님! 채린양의 몸 상태도 살펴 볼 겸 며칠 병원에 입원시키셨음 합니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병실에는 민 여사가 와 있었다. 민 여사는 들어오는 이 교수에게
“채린이는요?”
“수술 끝났으니 곧 올 게요.”
“채린이 옆에는 제가 있을 테니 걱정하지 마시고 학교에 가 보세요. 김 조교한테서 연락이 왔어요. 신 총장께서 출근하시는 대로 총장실에 다녀가시라는......옷 챙겨 왔으니 갈아입고 가세요."
“알겠소.”
이 교수는 민 여사에게 채린을 부탁하고 병원을 나왔다. 병실로 옮겨진 채린이 마취에서 깨어났을 때는 민 여사가 자리를 비운 뒤였다.
채린이 누워있는 침대 옆 바닥에는 창을 통해 들어온 빛이 자리를 잡아 병실 안을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오늘은 하루종일 날씨가 맑겠구나. 창 밖의 햇살이 저렇게 깨끗하니’
채린은 갑자기 아무도 없는 병실에 혼자 있다는 생각에 서러움이 밀려왔다. 주체할 수 없는 슬픈 생각으로 인해 채린의 울음소리는 거의 통곡에 가까웠다.
민 여사는 물이 가득한 병을 들고 채린의 병실로 들어가려다 걸음을 멈추었다. 채린의 애간장이 녹아 내릴 듯한 통곡이 병실 밖에까지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민 여사는 그녀 자신이 채린에게 아무 것도 해 줄 수 없다는 절망감에 휩싸였다. 힘없이 병실 앞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을 회진 돌던 강 원장이 보고는
“왜 여기에 계십니까?”
강 원장은 의자에서 일어나는 민 여사의 눈에 고인 눈물을 모른 체 하면서
“날씨가 많이 차가워졌습니다. 안으로 들어가시죠.”
강 원장은 채린의 병실 문을 열려다 안에서 흘러나오는 채린의 울음소리를 들었다. 문에서 손을 떼고는
“채린양이 마취에서 깨어났군요!”
“제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깨어났나 봐요.”
강 원장은 민 여사를 쳐다보았다. 한 번도 출산한 적이 없어서일까! 민 여사의 몸매는 40대 후반으로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몸의 선이 분명한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어느 영화배우 부럽지 않을 미모와 교양미에, 이 모든 조건을 완벽하게 갖춘 여자라는 생각에 내심 감탄사가 저절로 흘러나왔다. 병실 안은 조용해진 듯 했다.
채린의 울음소리도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강 원장은 함께 회진을 돌던 의사와 간호사들을 다른 병실로 들여보내고 채린의 병실로 들어갔다.
강 원장이 들어오자 강 원장을 바라보는 채린의 얼굴에는 미처 흐르지 못하고 고였던 눈물이 주르륵 볼 위로 흘러 내렸다. 채린이 재빨리 손등으로 그 눈물을 훔쳤다.
“아무 생각도 하지말고 며칠 푹 쉬어요."
“감사합니다.”
“어디 불편한 데 있으면 말하고.....”
“예. 알겠습니다.”
강 원장은 자신의 아이까지 임신한 여자를 두고 떠난 동원이 이해가 가지를 않았다. 그렇다고 강 원장 스스로 형수에게 물어 볼 수도 없고, 강 원장은 민 여사에게 고개를 숙이고 문밖으로 나갔다. 채린은 민 여사에게
“죄송해요. 사모님!”
“별말을 다하는구나. 채린아! 어서 누워라. 강 원장님의 말씀대로 아무 생각말고 너의 건강만 생각하자. 그리고 지나간 생각은 하지말고 다가올 내일만 생각하면서 살자.”
“.......”
이 교수는 곧장 총장실로 향했다. 이 교수는 총장실로 걸어가는 동안 학내에 흐르는 분위기가 어제와는 다르게 심상치 않은 공기가 흐르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 교수를 쳐다보는 학생들의 눈에도 알 수 없는 의혹으로 가득해 보였다. 이 교수가 총장실로 들어서자 신 총장은 수화기를 내려놓으며 긴장된 얼굴로 이 교수를 맞이했다.
“어서 오세요. 이 교수”
이 교수는 최대한 예의를 차려 신 총장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였다.
“이리 와서 앉으세요.”
이 교수가 신 총장 맞은 편에 앉자
“이 교수! 지금 저 전화가 누구한테서 온 줄 아시오?”
“무슨 말씀이신지?”
“세헤란호텔 강 회장 댁에서 온 전화요! 국문학과 이 상학 교수의 제자 중에 임신한 여학생이 있다고......”
이 교수는 신 총장의 ‘임신’이란 말에 거의 쓰러 질 뻔했다.
“이 교수께서 놀라시는 것을 보니 그 말이 사실인가 봅니다.”
신 총장은 이 교수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하자
“이 교수! 전 믿습니다. 이 교수가 현명하게 이 일을 마무리지을 거라는 것을.... 그래서 그 학생이 누구인지도 묻지 않겠습니다. 최대한 빠른 시간 내에 이 일을 마무리짓고 직접 보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 교수는 총장실을 나와 그의 연구실로 돌아왔다. 창가에 서서 교정을 내려다보았다. 등교하는 학생들을 쳐다보며 그 속에 있어야 할 채린이 없다는 것이 가슴 아팠다. 이 교수는 오늘처럼 교수라는 직업을 선택한 것이 후회스럽기는 처음이었다.
분명 신 총장은 아니 동원의 모친은 채린이 명성대에서 사라지기를 원한다. 어쩌면 동원이 이 곳에 없는 동안 채린을 그의 곁에서 없애려 하는 거다.
이 교수는 채린에게 어떻게 말해야 할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채린이 최대한 상처를 적게 받도록 하려면 그 자신이 어떤 선택을 해야만 하는지, 아니 채린에게 어떻게 말해야 할지 정리가 되지 않았다. 이 교수는 그 자신에게도 솔로몬에게 주셨던 그 지혜를 달라고 기원했다.
이 교수가 채린의 병실을 다시 찾았을 때는 채린이 병원에서 나온 밥으로 저녁 식사를 하고 있었다. 채린은 문을 열고 들어오는 이 교수의 어두운 얼굴표정을 보며 이 교수가 학교에서 어려운 상황이라는 것을 느꼈다. 그 짧은 순간, 채린은 이 교수가 갈등하고 있는 문제를 자신만이 풀을 수 있다는 것을 확신했다.
“교수님!”
“음. 식사 중이었구나.”
“예. 빨리 병원을 나가고 싶어요.”
“무슨 소리! 아무 생각말고 며칠 여기에 있어.”
“교수님! 병원 나가는 대로 머리도 식힐 겸 여행이나 다녀올까 해요.”
“그건 퇴원 후에 생각해 보자.”
채린은 어렵게 이 교수에게 학교를 그만 두겠다는 말을 꺼냈다. 이 교수는 채린이 그가 갈등하고 있는 문제의 핵심을 정곡으로 찌른 데 놀람을 금치 못하며
“채린아! 그게 무슨 소리니? 학교를 그만 두겠다니, 지금 너 자퇴하겠다는 거냐?”
“교수님께는 죄송하지만 그래야 되겠습니다. 지금도 저한테는 과분해요. 두 분이 제 옆에 계시지 않았다면 벌써 포기했을 겁니다.”
“그렇게는 절대로 못한다.”
이 교수는 알고 있었다. 채린이 한 번 결정하면 두 번 다시 번복하는 일이 없다는 것을......
“교수님! 제가 대학을 그만 둔다고 해서 절대로 교수님께 실망드리지 않겠습니다. 그동안 준비해온 것도 있고 하니 저를 믿고 제 결정에 따라 주세요”
“며칠 더 생각한 후에 결정하자.”
채린은 말없이 이 교수를 쳐다보았다. 채린의 얼굴에는 자신의 결정을 번복할 수 없다는 굳은 의지가 보였다. 채린은 이 교수가 학교에서 자신의 일로 얼마나 큰 곤경에 처해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동원의 어머니라면 무슨 일을 내고도 남을 사람이니까. 채린은 이 교수의 어려운 상황을 자신이 헤쳐 나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차기 총장 후보로 유리한 상황인대도 자신 때문에 그 모든 것을 버려야 할지도 모르는 이 교수를 위해서 본인만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였다.
“아니예요. 이 문제로 더 이상 힘들어하고 싶지 않아요. 교수님! 저 좀 도와 주세요! 제가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채린아!”
“......”
채린은 학교를 그만 두기로 결정한 이상 더 미룰 게 없다고 판단하고 병원을 퇴원한 다음 날 학교에 자퇴서를 제출했다. 채린은 동원과의 추억이 가득한 정원 ‘로즈마리’로 걸어갔다. 한참을 의자에 앉아 있다가 일어나 정든 교정을 나왔다. 채린은 경비실 옆 공중전화부스로 들어갔다. 그리고 이 교수에게 전화를 했다.
“저 채린이예요. 예. 지금 제출하고 나오는 길이예요. 그런 말씀 마세요! 이제는 제 걱정 그만 하시고요. 사모님께도 말씀 좀 잘해 주세요.”
채린은 아파트로 돌아와 옷 몇 가지만 챙겨 가지고 기차에 올랐다. 채린은 옥천역에서 내렸다. 낯선 거리에 혼자 있다고 생각하니 난생 처음 두려움이 밀려왔다. 햇살은 점점 산 너머로 사라져 가고 어느덧 산등성이에는 저녁놀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채린이 택시에서 내린 곳은 그 옛날 엄마와 둘이 살던 그 동네 앞이었다.
“나이가 들면 들수록 고향이 생각나게 된다”던 그 말이 새삼 떠올랐다.
채린이 동네에 들어섰을 때는 몰라보게 동네가 바뀌어 있었다. 채린이 살던 집도 민박집으로 바뀌어 있었다. 인기척을 느꼈는지 할머니 한 분이 문을 열고 나왔다. 할머니의 머리색은 희끗희끗 했지만 얼굴이나 옷차림은 여유롭게 생활해온 것을 한 눈에 느낄 수 있었다.
“거기 누구 왔소?”
“예! 할머니! 이 곳에서 좀 얼마동안 쉬어 가려고 하는 대 빈방 있나요?”
할머니는 채린의 행색을 살폈다. 할머니는 채린의 행동 하나하나를 유심히 살펴본 후 안심이 되었는지 채린을 2층에 있는 빈방으로 안내했다. 방문을 열자 안은 잠깐 동안이지만 묵고 가는 行客이 불편함이 없도록 현대식으로 잘 꾸며 놓았다.
“학생인가?”
“......”
채린이 우물쭈물하자 할머니는 채린이 듣지를 못했나 싶어 재차 물었다.
“예. 할머니! 전에는 대학생이었는대 건강이 좋지 않아 학교를 그만 두었어요.”
“그래! 젊은 사람이 어디가 얼마나 아프기에 그 들어가기 힘들다는 대학교를 다 그만 두었나! 츠츠츳”
할머니는 채린의 건강이 좋지 않다는 말에 마치 당신의 손녀딸이 큰 병에 걸린 양 진심으로 마음 아파 하셨다.
“할머니! 이제는 제가 있고 싶을 때까지 있어도 되는 거죠?”
“그럼! 빨리 건강해지기나 했음 좋겠어.”
“고맙습니다”
할머니는 채린이 가방을 방에 들여놓고 방안 이곳 저곳을 살피자 문을 닫고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
채린은 혼자가 되자 한쪽 벽에 만들어놓은 창가로 걸어갔다. 창문을 열자 넓게 펼쳐진 논과 밭이 보이고 그 사잇길 옆에는 색색의 코스모스가 바람에 갸날픈 몸을 이리저리 날리고 있었다.
변하지 않은 게 있다면 그 뒤로 높지도 낮지도 않은 적당한 높이의 산이 듬직하게 버티고 동네를 감싸고 있다는 점이다. 채린은 창문을 닫고 가방 속에 있는 소지품들을 하나 둘 꺼냈다.
마지막으로 채린은 제일 밑에서 원고뭉치를 꺼냈다. 원고뭉치 중 반 정도는 얼마나 만졌는지 가장자리가 다 헤져 있었다. 원고뭉치 제일 앞장에는 ‘비밀의 화원’이라고 써 있었다. 채린은 이 민박집에 들어온 후로 한 번도 문 밖을 나선 적이 없었다. 어느 날인가 통 채린의 움직임이 없자 할머니가 올라와 방문을 두드렸다.
“학생! 방에 있나?”
“예. 할머니! 저 여기 있어요. 무슨 일 있으세요?”
할머니가 방문을 열고 안을 살폈다.
“학생이 꼼짝도 안하고 방에만 있으니 난 탈이 났나 싶어 올라와 본 게야.”
“할머니! 아무 일 없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채린은 원고뭉치를 할머니에게 들어 보이며
“할머니! 빨리 끝내려고요! 조금만 더 쓰면 되거든요. 저도 이 동네 한 번 돌아보고 싶어요! 얼마나 변했는지.”
“학생! 그럼 학생도 이 동네에 살았었나?”
“그럼요! 지금 할머니와 제가 있는 이 자리가 바로 아주 어렸을 적에 살던 집이었어요.”
“그래! 그런 인연이 있었구만. 이 할미도 이 동네에서 나고 자라 도회지로 시집갔다가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이 곳이 그리워 다시 돌아왔지.”
어느새 할머니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돌아가신 할아버지 생각이 났나 보다. 채린은 재빠르게 할머니가 서 계신 문밖으로 나와 할머니의 두 손을 맞잡고
“제가 괜한 말을 꺼내 우리 할머니 맘을 우울하게 했나봐요. 할머니! 우리 나가서 산보하고 들어올까요?
채린의 '산보'란 말에 다행히 할머니의 얼굴표정이 이내 밝아졌다.
“참 내 정신 좀 보게나! 학생 학생하고 부르다 보니 아직도 이름을 모르고 지내는구만. 그래 학생 이름이 어떻게 되는가?"
“호호호. 한 채린이라고 합니다. 죄송해요 미리 말씀을 드렸어야 하는 대, 저도 할머니께서 편하게 '학생'하고 부르시는 것 같아 말씀드리질 않았네요. 그리고 손주처럼 편하게 대하세요 할머니!”
“그래도 될까? 그리고 지금이라도 알았으니 됐어. 채린이는 이 할미 신경 쓰지 말고 들어가 그 원고나 마무리 해. 날짜가 며칠 남지 않은 거 같으니.”
채린은 할머니가 그녀 자신이 지금 하고 있는 일이 무얼 위한 것인지 꿰뚫고 계신 것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할머니! 어떻게 아셨어요? 제가 신춘문예에 응모하려고 하는 걸.”
할머니는 기분 좋게 채린을 향해 웃으셨다.
“다 아는 수가 있지! 날짜가 촉박하지만 무리해서 건강 잃지 않도록 해.”
“예. 할머니.”
할머니는 채린의 손을 한 번 꼭 잡아주고는 돌아서 계단을 내려갔다.
“채린아! 필요한 거 있으면 얘기하고.”
“예. 할머니! 고맙습니다.”
집 앞 골목을 빗질하던 할머니는 2층 채린의 방을 쳐다보았다. 어린 나이에 자신이 정한 목표를 향해 열심히 노력하는 채린이 한없이 대견스럽다 못해 그녀를 자기 집에 머무르도록 한 일이 정말 자랑스러웠다.
할머니 머리 위에서 까치가 큰 소리로 울어댔다. 할머니는 비를 치켜올리며 들릴 듯 말 듯한 소리로
“여보시게. 지금이 어느 때라고 거기서 울어대는가! 제발 좀 조용하시게.”
까치는 할머니의 말소리를 알아들은 양 목청껏 울어대고는 어디론가 날아가 버렸다. 채린은 할머니가 그녀의 방을 찾은 지 꼭 2주일 후 할머니가 있는 1층으로 내려왔다.
할머니는 한 집에서 지내면서도 오래간만에 채린의 얼굴을 보자 몹시 반가웠다.
“다 끝난 게야?”
“예. 할머니! 우체국에 가서 신문사에 보내려고요.”
“그래! 어서 갔다 와. 뭐 먹고 싶은 거 없어? 시장 봐오게!”
채린은 나가려다가 할머니를 돌아보았다.
“할머니! 저랑 같이 우체국에 가요. 저번 날 함께 산보 가기로 했잖아요!”
할머니는 채린이 동행하자는 말에
“그럴까!”
“예. 같이 가세요. 바람이 많이 부는 대 겉옷이라도 하나 더 걸치고 나오세요.”
“괜찮아. 아직 춥지 않구나.”
할머니는 채린이 친손녀나 되는 것처럼 손을 꼭 잡았다. 채린과 할머니는 동네 입구에 있는 우체국을 향해 걸어갔다.
동네 우체국이라 그런지 규모는 그리 크지 않았다. 계단 옆에는 작은 정원을 만들어 놓고 커피 자판기를 갖다 놓아 찾는 이들이 잠시 쉬는 기쁨도 맛보게 하였다.
채린과 할머니가 안으로 들어가자 우체국 사람들이 창구에서 일어나 할머니에게 인사를 했다. 밖에서 들어오던 우체국장도 예전부터 할머니와 친분이 있었는지 할머니를 국장실로 데리고 들어갔다.
“전화 주시면 저희가 갈텐데 직접 나오셨어요!”
“음. 저 아이가 우체국에 볼 일이 있다고 해서 소일 삼아 따라나왔으니 국장님은 신경쓰지 마시게.”
우체국장은 창구에서 일을 보고 있는 채린을 눈여겨보았다.
“누굽니까?”
“저나 나나 가족이 없는 것은 마찬가지라 내 손녀딸 삼으려고.”
“예에! 손녀따님이 정말 예쁘네요. 대학생인가 보죠?”
“음. 몸이 약해서 잠시 쉬고 있다네.”
“예.”
할머니는 채린에 대한 국장의 말이 자신을 부러워하는 것 같아 꽤 만족스러웠다. 채린도 할머니의 시선을 느꼈는지 쳐다보며 웃었다.
채린은 등기로 자신의 원고를 명성일보 신춘문예 담당자 앞으로 보낸 후 할머니와 우체국을 나왔다.
길을 걷다 보니 나뭇잎들이 여기 저기 뒹굴고 있었다. 간혹 두 사람의 발 밑에 걸려 부서지는 소리도 들렸다.
“채린아!”
“예. 할머니!”
“이제는 원고도 다 끝마쳤으니 집으로 돌아가겠지?”
“할머니만 괜찮으시면 이 곳에 얼마동안 더 머물고 싶어요. 그래도 되죠?”
“그럼! 얼마든지 있어도 되지!”
“고맙습니다. 할머니.”
“별 얘기를 다하는구나.”
“할머니! 혼자서 이 민박집 운영하려면 힘들지 않으세요?”
“힘들긴, 오히려 너처럼 이 곳에 머물다 떠나는 사람들로부터 세상사는 얘기를 듣는 재미가 얼마나 큰대. 이 할미가 민박집을 하지 않았더라면 너도 만날 수 없었을 테고.”
채린은 속으로 이리로 오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할머니! 오늘은 특별한 날이니까 제가 대접해도 되죠?”
“아니야. 네가 무슨 돈이 있다고! 가는 길에 시장에 들려 반찬거리나 사가자!”
“할머니! 오늘만......오늘만 우리 밖에서 먹고 들어가요. 예?"
할머니는 채린의 고집을 꺾지 못하겠다는 듯
“그러자. 그동안 힘든 작업을 했으니 기력을 보충해야지!”
“할머니! 정말이죠?”
“그럼. 고기가 연하고 맛있는 식당을 알고 있으니 그리로 가자꾸나”
“예. 할머니. 우리 할머니 최고야.”
“채린아! 그렇게 좋으냐?”
“그럼요. 할머니!”
할머니와 밖에서 저녁식사를 마치고 민박집으로 돌아온 채린은 2층 자기 방으로 올라와 창문을 열었다. 바람이 들어왔다. 부드러운 오후의 햇살이 채린의 맘을 편안하게 했다.
늦은 시간도 아닌 대 산에는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었고 그 산등성이에는 저녁놀이 반쯤 걸쳐 있었다. 내려다보이는 집집마다 저녁식사 준비를 하는지 연기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밤은 아주 천천히 하늘가에 까만 색을 풀어 어둠의 자리를 만들고 있었다. 가끔씩 들려오는 이웃집 개 짖는 소리와 생각지도 못했던 아이들의 장난치는 소리가 오늘따라 한없이 정답게 들려왔다. 채린은 그동안 자신이 아주 슬픈 꿈을 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채린이 일어나 창문을 열자 동네가 사라지고 없었다. 밤사이에 내린 눈이 온 동네를 하얗게 칠해 놓았다. 내린 눈으로 먹이를 찾지 못해 헤매던 새가 잠시 감나무 가지에 앉았다 날아가자 쌓여 있던 눈이 이리저리 날렸다.
채린은 달력이 걸려 있던 자리를 쳐다보았다. 할머니께서 언제 갖다 걸어 놓았는지 새 달력이 보였다. 채린은 달력 앞에 서서 겉장을 뜯어냈다.
채린이 이 곳에 온 지도 벌써 5개월이 다 되 가고 있었다. 채린은 두 손을 모았다. 그리고 누군가에게 간절히 기원했다.
“내일입니다. 제발 저를 도와주세요. 그동안 너무 많은 사람들에게 실망을 주었습니다. 이번 한 번만이라도 그들이 기뻐할 수 있는 기회를 주세요.”
채린은 정말 오래간만에 편안하게 잠을 잤다. 건강도 처음 이 곳을 찾았을 때보다 많이 좋아져 있었다. 채린은 다른 날보다 일찍 잠자리를 정리했다.
창문을 열자 함박눈이 내리고 있었다. 세상이 하얗게 변해가고 있었다. 집 앞에서 비질하던 할머니가 창문을 여는 소리에 채린을 올려다보았다.
“일어났구나.”
“예. 할머니! 밤사이에 눈이 많이 왔나봐요.”
“그렇구나.”
“할머니! 금방 내려가서 제가 도와 드릴께요.”
“아니다. 방문밖에 신문 갔다 놓았으니 신문이나 보고 세상 얘기나 들려주렴.”
채린이 방문을 열자 정말 신문이 놓여 있었다. 매일 아침마다 먼저 신문을 읽던 할머니께서 새해 첫 날 만큼은 채린에게 양보를 하신 것이다. 채린은 떨리는 손을 애써 진정시키면서 신문을 펼쳤다.
순간 눈앞이 어릿어릿 해졌다. 분명 신문에는 한 채린 그녀의 작품 ‘비밀의 화원’이 장원으로 결정되었다는 글과 함께 그녀의 프로필이 간단하게 소개되어 있었던 것이다.
채린이 원고를 보낼 때 연락처를 기재하지 않았기에 다른 당선자들은 당선소감이 있었지만 그녀의 당선소감은 빠져 있었다. 채린은 창가로 달려갔다.
“할머니! 할머니!”
“음! 할미 여기 있다. 얘기하렴.”
“할머니! 제가 장원했어요. 제가......”
채린은 할머니가 눈을 치우고 있는 집 앞으로 달려나갔다.
“할머니!”
“그래. 수고했다. 이 할미는 우리 채린이가 될 줄 알았지.”
“할머니이.”
채린은 할머니 품에 안겨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할머니는 채린의 손에 쥐어진 신문을 펼치고
“채린아! 시상식 날짜를 보니 며칠 안 남았구나.”
“예. 할머니! 고맙습니다. 다 할머니 덕분이예요.”
“아니다. 네가 최선을 다한 결과지.”
“채린아!. 부엌에 상 차려 놓았으니 어서 들어가 식사하거라.”
“할머니도 식사 안하셨잖아요. 같이 들어가세요.”
채린은 할머니 손에서 싸리비를 받아들고 부엌으로 들어갔다.
“채린아! 아침식사 하고 출발해라. 신문기사 보고 널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을 게야.”
“예. 할머니.”
“자주 놀러와야 한다.”
“그럼요. 걱정하지 마세요.”
“채린아. 이 할미는 그동안 채린이 네가 곁에 있어서 얼마나 즐거웠는지 모른다. 넌 분명 누구한테나 사랑 받을 게야.”
“고맙습니다.”
채린은 2층으로 올라와 소지품을 챙겼다. 잠시 후 채린이 이 곳을 찾았을 때처럼 달랑 가방 하나만 들고 내려왔다.
다른 게 있다면 가방 제일 밑에 있던 원고뭉치가 없어졌다는 것이다. 할머니는 채린이 다시는 오지 않을 사람처럼 고집을 부려 택시를 불렀다.
채린 또한 그녀 자신이 떠나고 난 후 이 집에서 할머니 혼자 지낼 것을 생각하니 돌아서는 발걸음이 무거워졌다. 채린은 택시 뒷좌석에 가방을 밀어놓고 할머니에게로 걸어왔다.
“할머니. 가서 전화도 하고 자주 들릴 테니 할머니도 꼭 전화해야 돼요!”
“그래. 이 할미 걱정하지 말고 어서 가렴. 기사 양반 기다리신다.”
“예. 할머니!”
할머니는 채린이 뒷좌석으로 올라타자 뒷문을 닫고는 택시기사에게
“우리 손녀 좀 잘 부탁합니다.”
“할머니. 걱정하지 마세요. 목적지까지 잘 모셔다 드릴 테니.”
“고마워요. 젊은 양반.”
“별말씀을 다하십니다. 할머니. 추운데 어서 들어가세요. 손녀딸이 도착하면 전화 드린다고 하지 않습니까?”
“예. 그래야죠.”
택시가 출발하자 할머니는 채린이 탄 차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 자리에 서서 손을 흔들었다. 채린은 좋은 일로 할머니 곁을 떠나기는 했어도 마음 한 쪽이 허전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채린의 우울해 하는 모습을 지켜본 택시기사는,
“할머니와 사이가 좋은 거 보니 친할머닌가 봐요?”
“친할머니요?”
“예. 제 말이 틀립니까?”
“아니요. 틀린 게 아니라 왜 우리 할머니가 친할머니라고 생각하셨는지 궁금해서요.”
“우리 집 애들을 보니까 외할머니보다 친할머니를 더 따르더라구요.”
“아! 그렇군요.”
채린은 달려온 곳을 돌아보며
“우리 할머니는 외할머니도 친할머니도 아니세요. 오 갈데 없는 처지에 잠시 할머니집에 머물러 있다보니 우리 할머니가 되셨어요.”
택시기사는 채린의 말을 듣고 이해가 가지 않는 눈치였다.
이 교수는 샤워를 마치고 나와 민 여사가 거실 탁자 위에 올려놓은 신문을 펼쳤다. 이 교수는 놀라움과 기쁨에, 부엌에 있는 민 여사가 듣도록 큰 소리로 신문기사를 읽어 내려갔다. 그 소리에 부엌에 있던 민 여사가 거실로 뛰어 나왔다.
“여보!”
이 교수가 기뻐 흥분된 목소리로
“여보! 들었어요? 우리 채린이가 장원을 했어요. 장원을.”
이 교수는 쇼파에 털썩 주저앉으며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민 여사는 그동안 이 교수가 채린의 일로 얼마나 큰 고통을 겪어야만 했는지 그 누구보다 깊게 알고 있었다. 민 여사는 이 교수의 손을 잡았다. 전화벨이 크게 울렸다. 이 교수가 눈물을 훔치고 수화기를 들었다.
“성북동입니다.”
“교수님!”
“채린이니?”
“예. 교수님! 저 채린이예요.”
이 교수는 채린의 목소리를 듣자 다시 울먹이는 목소리로
“잘했다. 잘했어. 난 채린이 네가 꼭 해낼 줄 알았다. 축하한다.”
채린도 울먹이고 있었다.
“고맙습니다. 모든 게 교수님 덕분이예요.”
“채린아. 지금 있는 곳이 어디냐! 내가 그리로 가마”
“아니예요. 교수님 댁으로 가고 있어요. 10분 후면 도착할 거 같아요. 새해 아침인대 큰절을 올려야죠!”
“그래! 기다리고 있을 테니 빨리 오너라.”
“예.”
이 교수는 통화를 마친 후 민 여사에게
“당신! 채린이에게 동원의 편지 얘기는 하지 말아요. 이제는 채린이도 안정이 된 거 같으니, 만약 다시 그 아이 상처 입으면 일어나기 힘들어요.”
“잘 알고 있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절대로 동원의 일로 채린이가 맘 상하는 일 없게 할 테니.”
채린이 탄 택시가 이 교수의 집 앞에 도착하자 이 교수와 민 여사가 문닫는 소리를 듣고 달려나왔다. 채린은 이 교수의 품에 안겨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민 여사가 다가와 채린의 등을 쓰다듬었다.
“채린아! 정말 고생했다. 밖에서 이러고 있지 말고 어서 들어가자.”
이 교수는 채린의 손을 꼭 잡고 집안으로 들어갔다.
“그동안 어디에서 지낸 거니?”
“옛날에 엄마랑 잠시 머물렀던 동네에서 있었어요.”
“그랬구나. 그렇게 가까운 곳에 있는 줄도 모르고 얼마나 걱정했는지.”
“죄송해요. 걱정시켜 드려서.”
“무슨......지금이라도 돌아와서 우린 기쁘구나.”
“정말 고맙습니다.”
채린은 이 교수 부부에게 그녀 자신이 약속한대로 큰절을 올렸다. 이 교수 부부는 그런 채린을 흐뭇하게 웃음으로 지켜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