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계절

2. 이방인

by 금다요

재현의 연구실로 이 교수가 찾아왔다.

“선배님이 이 시간에 웬일이세요? 전화 주시면 제가 건너갈 텐데!”

“그렇게 얘기하면 섭섭하지! 내가 이곳에 오면 안 된다는 말로 들리거든!”

“무슨......”

“하하하......정색하지 말게. 그냥 해본 소리니."

“참 선배님두, 후배 놀리는 것은 여전하시네요.”

“아참. 현지는 잘 지내니?”

“얼마 전에 봤을 때는 잘 지내고 있던 대, 잘 지내고 있을 겁니다. 워낙 씩씩한 녀석이니.”

“너야말로 그런 소리하지 마라. 재현이 네가 현지 맘을 몰라주니까 자존심 강한 애가 말도 못하고 끙끙 앓고 있는 게 아니니?”

“......”

“사람이 왜 그렇게 무심하냐? 가까이 살면 좀 챙겨보지 않고”

“그렇게 됐어요. 선배님! 그런데 말입니다. 선배님 제자 중에 한 채린이라고 아시죠? 5년 전 명성일보 신춘문예에 장원으로 당선한......”

“잘 알지! 정말 아끼는 제자 중 한 녀석이지”

이 교수는 재현으로부터 채린이란 이름을 듣자 얼굴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리고 이 교수는 10여분이 지나도록 그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선배님!”

재현이 대답을 재촉하자 이 교수는 체념한 듯

“동원이만 만나지 않았더라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동원이라뇨! 동원이 누굽니까?”

“자네도 신문기사를 봐서 알겠지만, 얼마 전 독일에서 호텔경영학을 전공하고 귀국한, 경제신문에 났던 세헤란호텔의 강동원 말야"

“그 강동원이 왜?”

“독일로 유학 가기 전까지 채린이와 커플이었거든.”

“......”

“그런데 재현이 자네가 채린이를 어떻게 아나? 내가 알기로는 자네와 마주칠 일이 그다지 많을 것 같지는 않은 대 말야.”

“사람일이란 게 우리 생각대로 흐르는 게 아니잖습니까?”

이 교수는 벽에 걸려 있는 시계를 쳐다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허허허...... 그렇지. 정작 할 얘기는 못하고 가야겠네. 신 총장하고 저녁약속이 있거든."

“전화 주시면 제가 연구실로 가겠습니다.”

“그래 주겠나? 그럼 가네.”

재현은 이제야 가끔씩 채린의 얼굴에 드리워졌던 그늘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재현은 이 교수가 돌아간 후 창 밖을 바라보았다. 노천극장 야외무대 위에 자리잡고 있던 석양은 어둠이 깔리며 그 속으로 조금씩 자신을 침몰시키고 있었다.


며칠 후, 재현은 이 교수의 연구실을 찾았다. 안으로 들어서자 이 교수가 젊은 남자와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어서 오시게.”

“손님이 계신 줄 알았으면 나중에 올 걸 그랬어요.”

“괜찮다니까. 여긴 세헤란호텔의 강동원 상무일세.”

이 교수의 소개에 동원이 자리에서 일어나 정중하게 재현에게 머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

“강 동원입니다.”

“그리고 여기 계신 이 분은 국문학과 교수이신 차 재현 교수시네.”

“차 재현입니다.”

동원은 맑은 눈동자와 마치 운동경기 선수처럼 장신의 멋진 체형을 하고 있었다.

“자자. 이제 그만 앉지.”

“교수님! 전 돌아가 봐야겠습니다. 자리를 너무 오래 비워서요.”

“그래! 그럼 그렇게 하게.”

동원은 자리에서 일어나 재현에게도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차 교수님께서도 많이 도와 주십쇼. 시간 내서 다시 정식으로 찾아뵙겠습니다.”

재현은 문을 열고 나가는 동원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계단을 내려가는 그의 발걸음은 젊은이답게 자신감과 패기가 넘쳐흐르고 있었다.

종강을 했지만 재현은 아파트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이 교수의 연구실에서 동원을 만난 후로는 새벽에야 겨우 잠들 수가 있었다. 눈을 떠보니 베란다에까지 올라온 나뭇가지에 하얀 눈이 얇게 쌓여 있었다. 첫 눈이었다.

재현은 주섬주섬 옷을 걸치고 밖으로 나왔다. 갑자기 눈이 내린 탓인지 도로는 너도나도 끌고 나온 차들이 밀려 앞으로 나가지 못해 주차장처럼 멈춰 있다시피 했다. 재현이 그 길을 뚫고 채린의 아파트에 도착했을 때는 날은 이미 어두워져 있었다.

채린이 부엌으로 들어가 식사준비를 하는 동안 재현은 소파에 앉아 그녀의 원고를 뒤적거렸다. 책과 원고용지 틈에 껴있는 원고뭉치 하나가 재현의 눈길을 잡았다. 만년필로 급하게 써내려 간 단편소설이라고 하기에는 아주 짧은 이야기였다.

『아름다운 남자』

神은 암흑을 몰고 와 온 땅에 흐뿌려 놓고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허전한 마음으로 아파트를 향하던 나는 방향을 바꾸어 크리스탈로 향했다. 하얀 눈이라고 할 수도 없는 눈이 조금씩 아주 조금씩 땅바닥을 향해 제 몸을 던지고 있다. 창가에 앉아 길을 내려다보았다. 겨울의 찬바람 탓일까! 드문드문 행인이 보였다. 한 남자가 잔뜩 웅크린 모습을 하고 주변을 살피고는 황급히 맞은편 모텔로 들어갔다. 웃음이 나왔다. 그 남자의 허둥대던 모습 때문에, 사랑의 또 다른 모습을 보는 것 같아 씁쓸한 생각이 들기도 했다. 시간이 멈춰있는 듯 더디 흐른다.

전화벨이 울렸다. 그였다. 그의 목소리는 메아리처럼 울림이 되어 선을 타고 내 귀속을 지나 가슴속까지 울려 퍼지고 있었다. 갑자기 그가 보고 싶어진다. 내 시선은 문이 열릴 때마다 입구를 향해 끊임없이 옮겨지고, 30여분쯤 지났을까! 그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가 내 옆에 앉자 그가 몰아온 찬바람이 잠시 내 주위를 맴돌다 사라졌다.

“여기 맥주 좀 주세요.”

잠시 후 사장이 쟁반에 맥주를 바쳐들고 들어왔다.

“오래간만에 오셨네요!”

“예. 별일 없으셨죠?”

“예.”

“좀 앉으시죠!”

“아닙니다. 말씀들 나누세요.”

사장이 나가고 둘만 남자 그는 창 밖을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그의 옆얼굴을 훔쳐보았다.

술이 들어가면서 그의 얼굴도, 나의 얼굴도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말할 수 없는 무언가가 가슴속에서 용광로의 불처럼 회오리치고 있었다. 정점을 향해 타오르는 불덩이처럼...

“나가자.”

채린이 부엌에서 나왔다.

“뭐 하시는 거예요? 몇 번을 불렀는데도 대답도 하지 않고”

“그랬니? 이것 좀 읽느라고.”

재현은 채린이 볼 수 있도록 원고를 들었다. 그녀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재현은 식탁 앞에 앉으면서도 채린에게 물어 보았다. 우리 얘기를 쓴 거냐고,

채린은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재현은 그 순간 그녀의 눈가에 살짝 맺히는 이슬을 보았다. 그녀가 식탁 맞은편에 앉았다. 많이 지쳐 있었다.

“어디 아프니?”

“아니예요. 월간『문학』에서 단편 하나 넘겨 달라고 해서요. 시간이 없어 며칠 밤을 꼬박 작업했더니 그런가봐요. 보기 흉하죠!”

“아니! 작품은 끝냈니?”

“오늘 출판사에 넘겼어요.”

“그래.”

요즈음 채린은 그 어떤 것으로 인해 몹시 흔들리는 듯 했다. 채린이도 동원이 귀국했다는 걸 알고 있을까! 재현은 자신이 채린의 해결책이 되 줄 수 없다는 것이 큰 두통거리가 되어 그 자신도 괴로워하고 있었다.

채린이 말했다. 자신의 신세 타령을 하듯,

“옛날부터 생각이 정리되지 않거나 작업이 매끄럽게 이어지지 않을 때는 서점엘 가곤 해요. 새로 나온 책들을 바라보며 내 자신을 긴장시키기 위한 방법이죠. 그런데 어느 날인가 부터는 서점엘 가도, 생각이 정리되는 것도 아니고 긴장감도 살아나질 않아요.”

무심히 쳐다본 벽에 달력이 걸려 있었다. 12월 한 장만 달랑 남아 있는,

거리에는 자선냄비에서 울려 퍼지는 사랑의 종소리와 레코드 가게에서 흘러나오는 캐롤 송이 지나가는 사람들의 걸음을 멈추게 했다. 모두들 연말 분위기에 들떠 있었다. 재현은 요즈음 쳐져 지내는 채린을 기쁘게 하고 싶었다.

“채린아. 다음주 화요일 약속 있니?”

채린이 달력이 걸려 있는 벽 쪽을 쳐다보았다.

“화요일이면 크리스마스 이브네요.”

재현도 능청스럽게 달력을 쳐다보았다.

“정말 크리스마스 이브네.”

“어쩌죠? 문학인들 모임 있는 대.”

“모임이면 늦게까지 안 있어도 되잖아.”

“그렇긴 해요. 회비만 내고 아예 나오지 않는 사람들도 많으니까!”

“역시 개성이 강한 사람들은 틀리네. 참석을 아주 안 하는 것은 그렇고 1차만 참석하고 2차는 나랑 하자.”

재현은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안 그럼 채린이 너 후회할 걸.”

“좋아요. 그럼 그렇게 하죠.”

재현은 채린의 아파트를 나오면서 크리스탈에 전화를 걸어 예약을 했다.

“사장님! 절대로 채린이한테는 비밀입니다.”

재현은 크리스마스 이브에 눈이 내리기를 기대했지만 아파트를 나오기 전에 하늘을 보니 잔뜩 흐려있기만 했다. 재현은 약속시간보다 일찍 크리스탈에 도착해 채린을 기다렸다.

10시가 다가오자 채린이 허둥지둥 크리스탈의 문을 열고 들어왔다. 수정이 채린을 보고 반갑게 인사를 했다.

“어서 오세요. 차 교수님께서 한참 기다리셨어요.”

“잘 있었어요?”

“예. 교수님 7번 방에 계세요.”

채린은 급하게 7번 방으로 향했다. 채린이 문 밖에서 노크를 하자 저음의 굵은 재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오세요.”

채린이 들어오자 재현은 책을 읽고 있었다.

“죄송해요. 오래 기다리셨죠?”

“어서 와.”

재현은 읽던 책을 덮고 채린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전주(前酒)가 꽤 진했나 보네!”

채린이 열이 오르는 얼굴을 손바닥으로 가리며 아주 조금만 마셨단다.

“정말이예요! 약속 있어서 안 한다고 했는 대 계속 권해서 어쩔 수 없이 몇 잔 받았어요.”

“잘했어. 약간 홍조 띤 얼굴이 더 예쁜 대 뭐”

“......”

재현이 탁자 위 벨을 누르자 수정이 달려왔다.

“부르셨어요?”

“예. 수정 씨! 우리 식사 준비 좀 해주세요.”

“알겠습니다. 잠시 기다려 주시면 바로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수정이 나가자 채린은 의혹이 가득한 표정으로 재현을 쳐다보았다. 재현은 기다려 보라는 듯 말 없이 웃기만 했다.

“왜. 자꾸 웃기만 해요?”

문 밖에서 노크소리가 들리고 수정이 빨간 초와 파란 초가 끼워져 있는 촛대를 들고 들어왔다. 그리고 초에 불을 켠 다음 밖으로 나갔다. 잠시 후 장미꽃으로 촛대 밑을 장식했다. 채린이 재현에게 다시 물었다.

“아니. 지금 뭐 하는 거예요?”

“뭐하기는 멋진 크리스마스 이브를 준비하는 거지.”

수정이 바쁘게 왔다 갔다 하면서 월간 잡지 ‘요리’에 나와도 손색이 없을 만큼 아주 멋진 식탁이 만들어졌다. 채린은 수정의 솜씨에 감탄사를 연발하며

“어머. 수정 씨에게 이런 솜씨가 있는 줄 몰랐어요. 정말 예뻐요.”

“고맙습니다. 교수님께서 한 작가님을 위한 식탁이라고 말씀하셔서 걱정 많이 했는 대 맘에 드신다니 저도 정말 기쁘네요.

채린은 재현을 한 번 쳐다보고는 다시 수정에게

“수정 씨! 고마워요.”

“예. 좋은 시간 되세요.”

수정이 마무리를 하고 두 사람을 남겨둔 채 밖으로 나갔다. 두 사람만 남게 되자, 채린은 진심으로 기뻐하면서 재현에게 걸어와 그의 볼에 살짝 입술을 대었다. 채린에게서 나는 약간의 술 냄새가 재현을 자극했다.

식사를 마친 재현은 채린의 손을 잡고 무박2일 코스의 설악여행을 떠나는 버스에 올랐다.

“어디 가려고요?”

“음! 지금부터 채린이와 나만의 겨울여행을 떠나는 거야.”

“겨울 여행이요?”

“음. 겨울여행!”

채린은 재현의 이벤트가 맘에 들었다. 버스에 오른 채린은 술기운이 퍼지는지 재현의 어깨에 기대 잠이 들었다. 덜컹거리는 버스의 흔들림에 채린은 잠에서 깨어났다. 책을 읽고 있던 재현이 채린을 쳐다보며

“채린아!”

“예?”

“옛날 동화 중에 잠자는 숲 속의 미녀 있잖아!”

“예.”

“그 미녀도 잠자면서 드렁드렁 코를 골면서 잤을까?”

“예에?”

채린은 재현의 짓궂은 농담에 눈을 흘기며 얼굴을 붉혔다.

“제가 그렇게 시끄러웠어요?”

“그래.”

“정말? 그럼 빨리 깨우지 않고서요! 한 채린 체면 다 구겨졌네.”

“체면? 하하하. 농담이야 농담.”

재현은 채린의 얼굴을 쳐다보면서 그녀의 표정에 모처럼 기분 좋게 웃었다.

아기 예수가 탄생한 성탄절의 날이 밝아왔다. 두 사람은 장엄하게 떠오르는 아침해를 바라보고 서있었다.

재현은 채린의 손을 잡아 자기 주머니에 집어넣고는 다시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면서 다짐을 했다.

“내 옆에 있는 이 여자와 함께 남은 생을 보내고 싶습니다. 부디 제 염원을 받아주소서.”

채린은 말없이 아침해를 뚫어지게 바라보는 재현을 바라보았다. 붉은 태양은 채린의 속으로 들어와 그 속에서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채린아! 우리 여기서 새해도 맞이하고 갈까?”

“예? 그렇게 한가하세요!”

“한가해서가 아니고 너와 함께 있고 싶은 거지.”

“다음주부터 재 촬영하는 거 아시죠?”

“아니. 몰라.”

“호호호.”

“왜에?”

“가끔 교수님 보면 철없는 아이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호호호.”

“뭐라고? 하하하.”

“저도 그러고 싶어요. 하지만 첫 작품인 대 그저 그렇다는 소리 들으면 안되잖아요!”

“당연하지. 그건 나도 용납 못해.”

재현은 채린과 얘기하는 사이에 자신들의 머리위로 떠오른 아침해를 쳐다보았다. 그 붉은 빛은 채린에게서도 빛나고 있었다.

제야의 종소리가 울리고 새해가 밝았지만 재현이 느끼는 허전함은 똑같았다. 오히려 채린이 ‘처용무’의 촬영으로 인해 그의 곁에 없어서인지 그 지루함을 견디는 것만으로도 재현에게는 고통스러움이었다.

채린도 재현이 한 번쯤은 촬영현장으로 그녀를 찾아 주기 바랬지만 겨울이 다 가도록 재현이 그녀를 찾지 않자 은근히 섭섭함이 쌓이고 있었다.

꽃샘추위가 끝나고 본격적으로 새 학기가 시작되었다. 학내에 심어놓은 나무들 사이에서도 조금씩 푸른 싹이 돋아나고 있었다.

더욱이 학내에 가득 찬 신입생들은 강의실을 생기 있게 만들었다. 재현은 강의가 모두 끝나자 아파트로 돌아왔다. 재현은 넥타이를 풀다가 멈추고 전화응답기를 켰다. ‘삑’소리가 나고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채린이예요. 마무리 작업 때문에 숙소에 들어왔어요. 이 촬영이 끝나는 날, 아주 멋진 녀석이 태어날 거 같아요. 전 건강해요. 힘든 게 있다면 시간이 흐르면서 당신이 너무 보고 싶다는 거예요.”

그녀의 말이 귓가에서 울림이 되어 맴돌고 있었다. 그녀는 괴롭거나 좋은 일이 있을 때면 ‘당신’이란 호칭을 쓰곤 했다. 재현은 요즈음 채린을 안고 싶은 욕망 때문에 심한 갈등에 사로잡혀 있었다.

“채린아! 나도 네가 너무 보고 싶다.”

재현은 일찍 시작된 더위를 피해 공원엘 갔지만 의자마다 연인이나 가족들이 앉아 있어 길옆 돌 위에 앉아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리고 주변의 사람들을 힐끔 힐끔 쳐다보면서 ‘혼자’라는 것을 절실하게 느꼈다.

채린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핸드폰의 주인은 어디로 갔는지 기계적인 안내음만 반복해서 들려오고 있었다.

채린은 ‘사랑하기에 그 사랑으로 인해 힘들어야 한다’는 것을 재현을 만난 후 깨달았다고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사랑은 늘 두 얼굴을 하고 채린과 재현의 곁을 맴돌았나 보다. 재현은 참담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재현은 동원을 이 교수 연구실에서 만난 날부터 갈등의 연속이었다. 바지주머니 깊이 손을 밀어 넣고 공원을 빠져 나왔지만 어디로 가야 될지 막막하기만 했다. 무작정 걷다보니 ‘크리스탈’ 앞에 서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그녀가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재현의 바램과는 다르게 채린은 그 곳에 없었다.

“어서 오세요!”

“안녕하세요?”

“그동안 많이 바쁘셨나봐요? 한참만이시죠?”

“예. 그러네요.”

재현은 정 사장의 인사를 뒤로하고 재현과 채린이 앉았던 룸으로 들어갔다. 그녀를 안고 싶은 욕망을 떨치려 맥주를 마셨지만 테이블 위에 빈 병이 늘어갈수록 정신은 더욱더 맑아지고 있었다.

재현의 곁에 채린이 없이 다시 계절의 바뀌고 있었다. 창 밖으로 내려다보이는 거리의 나뭇잎은 퇴색되어 가고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길에 채여 뒹구는 것도 있었다. 재현은 거실에 있는 물건들을 하나 둘 상자에 넣었다. 어디론가 떠날 준비를 하는 사람처럼.

남은 게 있다면 지난해 가을, 채린과 제주도 여행 때 찍은 대형사진만이 벽에 걸려 있을 뿐이다. 사진 속의 채린은 밝게 웃고 있었다.

등지고 서있는 바다의 푸른 수면처럼 빛나는 웃음을 지으며......

제주도로 여행을 떠나던 날 아침, 재현은 탑승시간보다 무려 5시간 정도 여유를 두고 아파트를 나섰다.

불어오는 바람이 찬 기운을 몰고 와 옷깃을 세차게 흔들고 채린의 아파트에 도착했을 때는 채린이 베란다에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주차장으로 내려온 그녀의 얼굴은 잠을 못 잤는지 불편한 심기가 그대로 나타나 있었다.

“채린아! 무슨 일 있었니?”

“아니예요. 피곤해서 그런가봐요.”

“그럼 출발해 볼까?”

제주공항을 나왔을 때는 가늘게 비가 내리고 있었다. 채린은 재현이 소지품을 찾아오는 동안 비 내리는 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밖에는 미처 우산을 준비하지 못한 사람들이 이리저리 왔다갔다하며 비를 피할 궁리를 하고 있었다.

“뭘 그렇게 쳐다보고 있니?”

“잠시만요.”

그녀는 여행용 가방을 의자 삼고는 메모지를 찾아 정신 없이 써내려 갔다. 재현은 그런 채린 옆에 서서 내리는 비와 채린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아름다운 그녀』

그녀가 밤 늦은 시간에 아파트로 나를 찾아왔다. 소주를 얼마나 마셨는지 택시 문을 여는 순간 소주 냄새가 풍겼다. 휘청거리는 그녀의 손을 잡고 공원으로 걸어갔다. 끌다시피 앞서가는 나를 그녀는 말없이 쳐다보기만 했다. 그녀는 자신을 제어하기 힘들었는지 크게 숨을 들여마셨다. 그녀가 많이 힘들어한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표현하지 못하는 내 자신이 원망스럽고 나로 인해 아파하는 그녀를 쳐다보고 있자니 더욱더 괴로웠다. 의자에 앉히자 그녀는 말없이 고개를 떨구고 앉아만 있었다.

“채린아!”

“......”

그때 알았다. 그녀가 울고 있었다는 것을, 그녀를 안았다. 안으로 파고드는 그녀가 내 품안에서 점점 작아지고 있었다. 달빛이 구름사이로 의자를 비추고 있었다. 나는 그녀를 안은 채 그렇게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내 품에서 빠져나가는 순간 찬바람이 불어와 살갗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녀는 떨구고 있던 고개를 들며 나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꼭 다물고 있던 입술을 움직였다. 달빛에 비친 그녀의 얼굴은 눈물에 화장이 얼룩져 있었지만 세상의 그 어떤 언어로도 표현하기 힘든 표정을 담고 있었다. 나는 그녀를 끌어다 다시 안았다. 내게 안긴 그녀는 내 귀에만 들릴 만큼 작은 소리로 말을 했다.

“차라리 날 버릴 수 없어요? 버렸음 좋겠어요!”

그녀가 나에게 던진 말은 그 어떤 아픔보다 내 가슴속을 더 간절하고 처절하게 후비고 있었다. 그녀가 눈을 감는다.

“채린아! 너를 사랑해.”

눈을 감고 있는 그녀의 입술에 내 입술을 대었다. 다물고 있던 입술과 입술이 열리고 그녀는 완벽하게 나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조금씩 빛이 되살아나고 있었다. 칠흑같이 어둡던 공원이 조금씩 그 빛에 윤곽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녀는 써내려 가던 움직임을 멈추고 그 자리에서 일어났다. 채린은 여주인공의 이름을 꼭 자신의 실명을 이용했다. 마치 그녀 자신의 얘기처럼, 채린이 빗속으로 걸어가 멈췄다. 한참을 움직이지 않고 고개를 숙인 채 서 있었다. 재현도 말없이 채린을 쳐다보고 서있었다.

재현이 채린과 동원이 함께 있는 것을 직접 보지는 않았지만 그녀의 주변에서 거대한 바람이 일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어느 날인가부터 채린과 더 이상 교감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재현은 이 교수로부터 동원이 채린을 찾고 있다는 말을 전해들은 후 희미해져 가는 그녀의 뇌파를 느낄 수 있었다. 재현은 처음으로 사람이 사람에게서 잊혀질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일상 속의 만남과 헤어짐에서조차 한 번도 잊혀진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던 그였는 대.

재현은 채린과 함께 했던 곳을 찾았다. 끊어질 듯 엄습하는 가슴의 통증을 느끼면서 그 곳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렇게 앉아 있는 채로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살피니 공원 위로 저녁놀이 드리워져 있었다.

나뭇가지 사이로 전화부스가 보이고 한 남자가 담배 연기를 허공 속으로 길게 불며 누군가와 전화통화를 하고 있었다.

쓸쓸해 보이는 그 남자 위로 비둘기가 무리를 지어 어디론가 날아가고 있었다. 재현은 전화부스의 남자를 쳐다보면서 마치 흔들리고 있는 자신을 들여다보고 있는 느낌이었다.

찬바람이 불어왔다. 이 시간, 채린은 무얼 하고 있는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조급해지는 마음을 안고 급히 공원을 빠져나와 차에 올랐다.

그녀는 나를 태우고 있었다. 그녀를 향한 그리움의 갈증으로......

차창 밖으로 그녀와 함께 했던 거리가 스쳐 지나간다. 그녀가 내 곁에 있어 따스했던 그 시간 속의 거리가,

채린의 아파트는 아직도 주인이 들어오지 않았는지 불이 꺼져 있었다. 아파트로 들어오는 길에 소주 몇 병을 샀다.

재현은 동원이 귀국한 후로 생각이 정리가 안되고 헝클어져 있는 것만 같아 안타까웠다. 채린과의 대화에 있어서도 점점 얄궂게 변해 가는 어쩔 수 없는 이해심의 한계성을 드러내는 것도 비참해지기 시작했다.

빈 병이 늘어갈수록 재현의 이성도 술기운으로 인해 조금씩 마비되어 가고 있었다. 희미해져 가는 기억 속에서 채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른 아침, 채린은 대본 수정이 끝나고 시간이 나서 촬영현장 근처의 들길을 걷고 있다며 재현에게 전화를 걸었었다. 전화선을 통해 들려오는 그녀의 목소리는 몹시 흥분되어 있었다.

“채린이예요. 아침에 밖에 나가 보셨어요? 정말 이 곳에서 바라보는 햇살은 너무 투명해 제 몸을 뚫고 지나가는 것만 같아요.

이렇게 햇살이 고운 걸 보면 저 속에 가을빛이 가득하기 때문인가 봐요. 마치 긴 여행에서 돌아오는 오랜 벗을 만난 것처럼 저 햇살이 너무 반갑고요.

당신과 함께 여행을 해보고 싶어요. 이런 들길도 걸어보고, 내가 한 번도 지나간 적 없는 어느 마을에서 당신과 머물며 행복한 하루를 만들어 봤으면 좋겠어요.

기다려요. 제가 올라가는 대로 바로 출발하는 거예요. 알았죠?”

재현은 채린이 그의 곁에 없이 첫눈을 맞이했다. 뜻밖에도 강의 도중 첫 눈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강의 중간쯤! 여기 저기서 학생들이 소곤거려 뒤를 돌아보자 한 여학생이 흥분된 목소리로 말했다. .

“교수님! 첫 눈이 와요”

재현은 창 밖을 쳐다보았다. 첫 눈치고는 함박눈이었다. 어디선가 휴대폰 벨소리가 조그맣게 들려왔다. 재현은 두리번거리다 소리의 주인이 자신이란 것을 깨달았다. 재현이 강의실로 들어오면서 꺼놓아야 했던 휴대폰을 켜 놓은 채 웃옷 주머니에 넣었다는 것을 잊고 있었던 것이다.

다시 울리는 벨소리에 잠시 정적이 흐르고

“교수님! 빨리 받으세요.”

“미안! 미안 꺼놓는 것을 잊었네. 나이가 들면 잊고, 잃어버리는 게 많아지지.”

학생들은 재현의 말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는 지금 그대로도 충분히 그들의 우상이기 때문에.

“교수님. 끊어지기 전에 빨리 받아 보세요.”

“음. 차 재현입니다.”

“채린이예요. 밖에 눈 내리는 거 보셨어요?”

“음! 그렇지 않아도 강의실 창 밖을 쳐다보고 있단다. 첫 눈이구나! 정말 황홀해! 흥분도 되고......”

“강의실이셨어요? 그런데 휴대폰을 왜 꺼놓지 않으셨어요? 눈 내리는 거 보고 제가 실수를 했네요! 죄송해요!”

“괜찮아! 내 실수니까.”

“강의 끝나면 전화 주세요.”

“음! 알았어.”

재현은 전화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궁금해하는 학생들의 질문공세를 뒤로 한 채 강의실을 도망치듯 바삐 나왔다. 채린에게로 향하는 재현의 맘을 알기나 한 것처럼 걸음이 조금씩 빨라지고 있었다.

대학 입구에 ‘플라워’라는 꽃집이 보였다. 재현은 차를 세우고 꽃집으로 들어갔다. 30대 후반 정도 들어 보이는 여 사장이 재현을 반갑게 맞이했다.

“어서 오세요.”

“예. 오늘 같이 첫 눈이 오는 날에는 어떤 꽃을 선물하면 상대방이 좋아할까요?”

“음. 꽃 선물을 받을 상대방의 취향이 어떤가 아시나요?”

재현은 사장의 말대로 채린이 어떤 꽃을 좋아했는지 아무리 머리를 짜내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냥. 보편적으로 여성들이 제일 좋아하는 꽃으로 한 다발 묶어 주세요.”

“예. 알겠습니다. 기다리는 동안 국화차 한 잔 하시겠어요?”

“고맙습니다.”

재현은 사장이 건네 준 찻잔을 받아들고 사장이 꽃을 포장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사장은 재현이 차를 마시고 있는 동안 그 옆에서 흑장미를 포장했다. 사장이 완성된 꽃다발을 재현에게 건넸다.

재현은 꽃다발을 차 뒷좌석에 실어 놓고 바쁘게 제과점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샴페인과 케잌을 사 채린의 아파트로 향했다.

차창 밖으로 스치는 가로수는 어느 새 하얗게 변해 있었고 도로마다 첫눈이 주는 설레임으로 인해 뛰쳐나온 연인들도 보였다.

아파트 안의 조경수와 앞으로 펼쳐 보이는 산야가 모두 하얗게 변해 있었다. 초인종을 누르자 인터폰의 벨소리가 밖에까지 들려왔다. 문 잠금쇠가 풀리며 에이프런을 두른 채린의 웃는 얼굴이 보였다.

“어머! 오실 줄 몰랐어요."

사온 꽃다발과 케잌 상자를 내밀자 채린의 눈이 더욱더 커졌다.

“첫 눈 축하치고는 너무 거창한 걸요! 고마워요.”

“채린이 좋아하니 오기를 정말 잘했구나.”

순간 채린이 발 뒷굼치를 올리고 왼뺨에 입을 맞춘 후 부엌으로 사라졌다.

“정말 오기를 잘했어. 채린의 상기된 얼굴을 볼 수 있어서”

채린이 부엌에서 나오며 재현에게 말을 했다.

“언젠가부터 혼자 바라보는 첫 눈이 싫었는 대, 오늘에야 보상받는 기분이네요”

채린의 눈에 살짝 눈물이 비추었다.

“나 배고픈 대, 혹시 지금도 냉장고가 텅텅 비어 있는 건 아니겠지?”

채린은 샴페인과 케잌을 내밀었다.

“아하! 그게 있었지.”

채린이 다시 부엌으로 가 준비를 하는 동안 베란다로 나갔다. 멀리 시내가 보였다. 재현은 채린의 아파트에서 야경을 볼 때마다 별빛이 살아 움직이는 착각을 했다.

오늘은 눈이 내려서인지 하나 둘 켜지는 불빛마다 희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어느새 채린이 걸어와 등뒤에서 재현을 감싸 안았다.

“정말 잘 오셨어요.”

채린은 지금까지 한 번도 제 맘을 밖으로 드러낸 적이 없었는 대 그동안 많이도 외로웠던가보다. 재현은 채린에게로 돌아섰다.

그리고 힘주어 안으면 어디론가 사라질 것만 같은 그녀를 살포시 안았다. 채린이 재현의 품에서 빠져 나오며 장난스럽게 포크를 흔들었다.

“만찬 준비 다 됐습니다. 자리에 가서 앉으시죠. 우리 식사 마치고 눈 구경하러 가요”

“눈 구경? 이곳보다 더 좋은 곳이 어디 있다고 밖으로 나가!”

“정말 안나갈 거예요?”

“음! 난 이곳이 내 맘에 쏙 들거든!”

재현의 말에 채린은 정말로 뾰루뚱 해졌다. 재현은 그런 채린을 두고 안방으로 몸을 피했다. 초인종이 울렸다. 채린은 혼잣말로 투덜거리며 현관 쪽으로 걸어갔다.

재현은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지만 현관문을 열고 닫는 소리 뿐 밖은 쥐 죽은 듯 조용했다.

재현은 거실로 나오려다가 슬리퍼 끄는 소리에 그냥 침대에 주저앉았다. 잠시 후 젊은 남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래간만이야. 우리 6년만이지?”

“여긴 어떻게 알았어요?”

채린의 목소리가 흔들렸다. 재현은 열려진 문틈으로 거실을 내다 봤다. 거실에는 이 교수연구실에서 본 강 동원이 채린의 맞은 편에 앉아 있었다.

“네 소식도 궁금하고 귀국 인사도 할 겸해서 이 교수님 연구실에 갔었어.”

“그래서요?”

“넌 내 소식이 하나도 궁금하지 않았다는 투구나.”

“제가 왜요?”

“넌 정말 내가 귀국한지 모르고 있었던 거니?”

“아니요. 궁금하지는 않았지만 저도 동원씨가 귀국했다는 소식은 들었어요.”

“그랬구나. 조금 더 일찍 오려고 했지만 호텔 일이 밀려 있어서 그럴 수가 없었어.”

“마치 잠시 출장 갔다 돌아온 사람처럼 말하는군요.”

“미안하다. 너를 두고 떠난 나를 용서할 수 없겠지만, 이해해 줄 수는 있지 않을까?”

“이해라고요? 동원씨는 몰라요!”

“아니! 나만큼 너를 이해하는 사람도 드물 거야.”

“죄송합니다. 돌아가 주세요. 손님이 계시거든요.”

동원은 채린의 손님이 있다는 말에 재현이 있는 방 쪽을 힐끔 쳐다보았다.

“좋아. 오늘은 소님이 있다니까 그냥 가지만 내일 다시 올 거야.”

“다시 온다고 해도 듣고 싶은 말도 또 동원 씨에게 할 말도 없어요. 이미 우리는 상관없는 사람들이잖아요.”

동원은 힘없이 일어났다. 문으로 향하던 동원이 채린에게로 돌아섰다.

“너는 내게 할 말이 없을지 몰라도 내 얘기는 들어줘야 되는 거 아니니?“

“......”

돌아선 동원의 어깨는 축 쳐져 이 교수 연구실을 찾았을 때의 자신만만함은 사라지고 없었다. 채린은 동원이 돌아가고 난 뒤에도 한동안 동원이 나간 문 쪽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재현에게 등을 보이고 있는 채린의 어깨가 흔들리고 있었다. 재현이 거실로 나왔다.

“채린아! 저 사람 세헤란호텔의 강동원 상무 맞지?”

“예. 그런데 교수님께서 동원씰 어떻게 아세요?”

“음! 얼마 전 저 친구가 이 교수 연구실에 들린 적이 있었지. 아참 얘기 안 했었나? 이 교수가 대학 선배야.”

“아! 그랬었군요.”

“저 친구 채린이한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나본대.”

채린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예요. 전 정말 들을 말도 듣고 싶은 말도 없어요.”

“채린아! 그렇게 단정적으로 생각할 건 아니야. 그래도 한 때는 저 친구를 깊이 사랑했던 적도 있을 거 아니니? 네 사랑이 소중하다면 저 친구의 사랑도 소중한 거다. 서로가 돌아섰다고 냉정하게 그러는 것은 웬지 채린이 답지 않구나.”

“무슨 뜻인지 알아요. 하지만 제 맘이 돌아서질 않아요. 이미 제 가슴속에는 상처만 남아 있거든요. 그동안 동원 씨가 독일로 떠나던 날 우리의 인연도 끝났다고 생각하며 살았어요.”

“채린아! 정말 끝을 내고 싶다면 저 친구의 말을 들으렴. 그리고 냉정하게 판단하는 거야. 어떤 게 진실인지를.”

재현은 채린을 침대에 눕혔다.

“채린아. 지금은 아무 생각말고 푹 자라. 그리고 내일 상쾌한 기분으로 다시 정리해보는 거야. 알았지?”

“가려고요?”

“음.”

재현은 채린의 옆에 누워 채린에게 팔베개를 했다.

“아무 생각말고 푹 자. 너 잠 들으면 알아서 문단속하고 갈 테니.”

“알았어요. 그럼 저 자요.”

“음.”

재현은 채린이 잠든 것을 확인하고 채린의 아파트를 나왔다. 동원이 자신의 승용차에 기대어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동원은 재현의 시선을 느꼈는지 담뱃불을 발로 비벼 끄고는 차에 올라 쏜살같이 아파트를 빠져나갔다.

재현은 불꺼진 채린의 아파트를 올려다보았다. 재현이 현관문을 잠그고 아파트를 나가자, 채린은 거실로 나와 전화 수화기를 들었다.

“교수님! 저 채린이예요.”

“음! 어디니?”

“집이예요. 동원 씨가 다녀갔어요.”

“너를 찾아갈 줄은 알았다.”

“다른 얘기는 안 하셨죠?”

“음! 채린아! 만나서 얘기하자. 그렇지 않아도 연락하려 했는 대 가까운 곳에 있으니 그 쪽으로 가마.”

“알겠습니다.”

채린은 수화기를 내려놓고 베란다로 나갔다. 난간에 기대서자 멀리 시내가 보였다. 색색의 불빛들이 채린의 마음을 더욱더 침울하게 했다. 초인종이 울렸다. 이 교수가 문 밖에 서있었다.

“교수님! 어서 오세요.”

“오래간만이구나.”

“죄송해요. 자주 연락 드리지 못해......잠시 앉아 계세요.”

“차는 마시고 왔다. 그냥 앉아”

“......”

이 교수는 말 없이 고개를 숙인 채 자신의 맞은 편에 앉아 있는 채린을 쳐다보다가 채린이 뒤에 놓여져 있는 작은 액자를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액자 앞에 놓여 있는 화분으로 인해 그냥 지나칠 수도 있겠지만 분명 사진 속의 남자는 재현이었다.

그러나, 이 교수는 내색하지 않았다. 뛰어난 재능을 갖고 있으면서도 교만하지 않으며, 오히려 겸손함을 알고 자신을 희생시킬 줄 아는, 아프면서도 아프다는 말 한마디 없는 제자가 하루속히 옛날의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바라며.

“채린아!”

채린이 긴 한숨을 쉰 다음 고개를 들어 이 교수를 쳐다보았다.

“교수님. 죄송해요. 전 항상 교수님께 실망만 드리네요.”

“그게 무슨 말이니? 나는 채린이가 내 제자라는 것을 언제나 자랑스럽게 여겼다. 너를 생각하면서 단 한 번도 실망스러운 적이 없었어. 앞으로도 그런 생각은 하지 말아라. 그런 말도 하지말고.”

“녜. 교수님! 전 동원 씨가 영원히 그 일을 모른 채 지내기를 원해요.”

“채린아! 결국 동원이도 알게 될 거야. 세상에는 비밀이 없다는 거 누구보다도 네가 더 잘 알고 있잖니?”

“교수님! 이제 와서 동원 씨가 안다고 해도 변하는 것은 없어요. 차라리 혼란만 생길 뿐이지. 동원 씨가 그 날 일을 알게 되어 교수님을 찾아가 묻는다 해도 절대로 모른 척 해주세요.”

“네 생각을 알고 있으니 그 점은 걱정하지 마라.”

“예. 밤늦게 죄송합니다.”

이 교수 또한 채린의 아파트를 나서면서 혼자 있는 채린이 무슨 일을 당할까봐 걱정이 앞섰다. 동원이 그녀를 찾아가고, 그녀의 아파트에서 재현과 채린이 나란히 웃으며 찍은 사진을 본 후 이 교수는 그의 집에 도착할 때까지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채린은 이 교수가 돌아간 후 무덤덤하게 베란다에 서서 어둠 속에서 반짝거리는 불빛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한참을 그렇게 서있었다.

다음날 아침, 채린은 초인종 소리에 놀라 잠에서 깨어났다. 감시경을 통해 보이는 것은 다름 아닌 동원이었다. 채린은 아침부터 들이닥친 동원을 어떤 방법으로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잠금쇠를 풀자 동원이 밤새 고민을 했는지 푸석푸석한 얼굴로 거실로 올라왔다.

“이 시간에도 손님이 있다고 하진 않겠지?”

“들어오세요.”

채린은 옷깃을 여미며 동원과 마주앉았다.

“저한테 할 얘기가 뭔지 해보세요.”

“채린아! 독일 유학은 내 뜻이 아니었어. 그때 나 역시 어머니의 처사에 화가 나 있었거든. 그리고 우연히 신문에 잡힌 젊은 여자는 내가 직접 말하기는 뭐해도 아버지의 여자였어. 넌 내가 너 아닌 다른 여자를 생각할 수 있다고 믿니? 그건 나보다 네가 더 잘 알고 있잖니?

“동원 씨! 동원 씨는 어머니 처사가 잘못 되었다고 변명하지만 그 후로도 시간은 많았어요.

정말 제 생각을 했다면 아니 저를 이해시키고자 했다면 어머니를 설득시킬 방법은 얼마든지 있었죠! 그 때는 동원 씨가 내 곁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는 사실에 절망했고, 고통스러웠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아요. 왜 그런지 아세요? 동원 씨가 독일로 출국하던 날, 동원 씨가 아는 한 채린도 이미 이 세상을 떠난 사람이니까요.”

“채린아! 말이 좀 심하다고 생각하지 않니?”

“아니요! 사랑하는 사람을 멀리 떠나보낸 나는 그래요. 다시는 제 앞에 나타나지 말아 주세요. 당신 어머님이 또 어떻게 나올지도 무섭고요.”

“우리 어머니가 왜?”

“직접 물어 보세요.”

“채린아!”

“할 얘기 다하셨음 돌아가 주세요.”

채린이 일어나자 동원이 채린의 곁으로 다가와 그녀의 팔을 붙들었다.

“그럼 한가지만 묻자. 이 책은 뭐니?”

동원이 채린 앞에 내놓은 책은 그녀의 ‘처용무’였다. 채린은 말없이 서있기만 했다.

“한 채린! 왜 대답을 못하지? 너는 다시는 네 앞에 나타나지 말라고 했지만 난 알아. 그건 너의 진심이 아니라는 것을.”

“책은 책일 뿐이예요. 강 동원 당신과는 전혀 상관없는 내용이고요.”

“아냐! 분명 이 ‘처용무’는 나를 염두에 두고 쓴 거야 그렇지?”

“녜! 맞아요. 그렇지만 한가지 중요한 것을 모르고 계시는군요. 들고 있는 그 책이야말로 동원 씨와 나의 마지막이란 것을, 그 책 끝머리에 인터뷰 내용이 실려 있으니 읽어보시죠. 그럼 지금까지 제가 한 말이 진심이란 것을 알 테니!”

동원은 채린의 단호한 태도에 문득 어제 채린의 방에 있던 인기척이 생각났다.

“다시 얘기하자.”

“아니요! 저는 더 이상 할 얘기가 없어요. 정말 동원 씨와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아요!”

“다시 올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