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계절.

1. 첫 만남

by 금다요

어느 집에서 coffee를 내리는지 헤즐럿 향이 불어오는 바람에 섞여 코끝을 자극하고 있었다. 7월의 기온이라고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을 만큼 연일 30도와 35도 사이를 오르내리고 그로 인해 숨은 가슴 턱까지 차 오르고 있었다. 오늘도 이른 아침에 내려 쏟는 햇살은 뜨겁다 못해 살갗이 타들어 가는 듯했다.

재현은 어느 날인가부터 반복되는 일상이 지루하게만 느껴졌다. 그래서일까! 시간이 흐를수록 채린의 소식이 궁금해져만 갔다. 그가 없었던 지난 세월 동안 얼마나 많은 변화가 있었는지, 재현은 ‘채린’이란 이름만으로도 그녀가 너무나 보고 싶었다.

재현이 채린을 안 것은 아주 오래전이었다. 재현의 아버지는 서울 중앙지검에서 차기 검사장을 노릴 만큼 동기 중 선두주자였지만, 항명사건으로 인하여 옷을 벗고 부모님이 계신 이 곳으로 내려왔는데 채린과는 대문을 나란히 한 이웃사촌이었다.

추운 겨울이었다. 함박눈이 내리던 어느 날 저녁 무렵이었다. 채린네 일을 봐주던 젊은 여자가 재현네 집으로 건너와서는 주인아줌마가 예쁜 딸을 낳았다고 전했다.

그 날부터 재현은 담을 타고 들려오는 채린의 울음소리를 듣게 되었다. 그리고 한동안 그 집 문에 솔가지가 달린 금줄이 걸려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삼칠일(21일)이 지나고 계절이 바뀌어갈 때쯤 재현은 엄마의 손을 잡고 채린의 집엘 갔다. 채린은 안방 아랫목에 노란 병아리가 그려져 있는 고운 이불을 덮고 누워 있었다.

재현은 동생이 없었던 터라 채린이 작은 손을 쥐었다 폈다 하는 것도 마냥 신기하기만 했다. 재현은 엄마들끼리 정신없이 얘기하는 사이 살금살금 무릎걸음으로 다가가 채린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채린은 배가 고픈지 연신 입술을 오물거리며 작은 발을 폈다 오므렸다 했다. 엄마 옆에서 채린을 지켜보던 재현은 뭔가에 이끌리 듯 채린의 하얀 얼굴에 손을 대었다. 그런 아들의 행동을 본 재현 엄마는 깜짝 놀라며

“재현아! 아가 만지면 안 된다.”

“놔두세요!”

재현이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어른들의 눈치를 살피자, 채린의 엄마가 재현의 손을 잡았다.

“재현아! 아가 예쁘지? 지금부터 재현이한테도 예쁜 여동생이 생겼으니까 친하게 지내야 한다.”

재현이 고개를 끄떡거리며 대답을 했다.

“예.”

이것이 채린과 재현의 첫 만남이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재현과 채린은 마치 친 오누이 간처럼 가까워졌다. 할아버지가 해오던 농장일을 도와야하는 재현의 부모님들과 간호사였던 채린의 엄마로 인해 둘이서만 지내는 시간이 많아졌다.

재현은 계절이 바뀔 때마다 채린을 데리고 산이나 냇가 등을 돌아다니며 냉이, 진달래꽃 등의 생김새를 가르쳐 주었고, 때로는 동네 애들과 어울려 온갖 개구쟁이 짓을 하기도 하였지만, 채린에게는 그가 항상 보호자이고 친구였다.

재현이 중학생이 되던 해, 채린은 초등학생이 되었다. 왼쪽 가슴에 명찰과 하얀 손수건을 달고 아줌마의 손을 잡고 걸어가던 채린의 뒷모습이 생각났다.

아침이면 학교에 가기 싫다며 아줌마한테 떼를 쓰던 채린도, 재현이 부르기만 하면 가방 먼저 둘러매고 졸졸 따라나서던 채린의 얼굴이 떠올라 재현은 자신도 모르게 웃었다.

채린이 한 학년씩 올라갈 때마다 재현의 바람은 오랫동안 채린과 함께 생활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러나, 재현이 중학교 3학년이 되던 해, 채린이 간호사였던 엄마의 직장을 따라 도시 학교로 전학을 가게 되었다는 엄마의 말을 전해 들은 재현은 마치 세상의 모든 것을 잃은 양 슬퍼했다.

채린이 전학 가는 날은 마치 시계를 빠르게 돌려놓은 것처럼 바로 눈앞에 다가왔고, 재현은 떠나는 채린을 한 번이라도 더 보고 싶은 마음에 학교에도 가지 않았다. 재현은 엄마의 손을 잡고 들길을 걸어가는 채린의 뒤를 따라갔다.

“채린아!”

“응?”

“오빠도 꼭 도시학교에 갈 거니까 오빠 잊으면 안 돼!”

“정말?”

“음!”

“빨리 와야 해!”

“그래. 꼭 기다려. 오빠 말 잘 들었지?”

“응!”

재현은 채린이 떠나자 며칠 동안 문을 잠그고 가슴앓이를 했다. 사춘기가 돼서는 채린을 향한 그리움으로 긴 밤을 지새우는 날 또한 많아졌다.

재현이 고등학교 1학년이 되던 해, 연수생 시절부터 아버지와 절친하게 지냈던 친구가 찾아왔다.

검사 생활을 그만두고 변호사 사무실을 냈으니 함께 일하자는 제의를 받은 재현 아버지는 농장을 접고 도시로 나왔다.

재현은 많은 사람들 속에서 차차 도시생활에 적응해 나갔으며 YMCA 등 봉사활동을 하면서 사회적인 문제에 대해서도 폭넓은 경험을 하게 되었다.

간혹 재현의 적극적인 활동에 호감을 갖고 따라다니는 여학생들도 있었지만 왜 그런지 재현에게는 별 관심이 없었다.

재현이 대학에 들어가서는 미팅이니 동아리 활동이니 분주한 생활 속에서 여자들과 접할 기회가 점점 많아졌다. 간혹 맘에 드는 여학생들도 있었지만 그것뿐이었다.

군대에 가서는 하루가 멀다 하고 찾아오는 과 여자 동기들 때문에 오히려 선임들에게 항상 불려 다니는 신세가 되기도 하였다.

재현이 군 제대를 하고 대학에 복학하자 채린을 향한 그리움으로 하루하루를 채워갔다. 재현의 그런 마음을 아는 몇몇 선배들이 여자 친구를 소개해 주기도 했지만 그 여자들이 새롭거나 보고 싶다는 느낌이 전혀 생기질 않았다. 재현은 행운의 여신이 항상 자신에게만은 미소 짓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부모님이 여행 중에 비행기 사고로 모두 돌아가시고 시신도 수습하지 못하는 상황에 이르러서는 세상을 원망하기도 했다. 그렇게 힘든 상황에서도 재현은 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했으며 모두가 부러워하는 명성대학원에 진학하게 되었다.

재현은 대학 선배이면서 명성대학 전임교수인 이 상학 교수의 힘을 얻어 모교에서 시간 강사를 할 수 있는 특혜를 누리면서 예전의 긍정적이고 적극적이었던 모습을 찾게 되었다.

재현이 대학원 과정을 끝내고 누군가를 가리킨다는 것에 적응하면서 채린을 향한 욕망은 나날이 더욱더 커져가고 있었다. 주말이면 채린의 흔적을 찾아 이 곳 저곳을 헤매는 버릇과 함께.

학기가 끝나 종강을 하자 대학 내에는 하나둘씩 빈 강의실이 늘어갔다. 모두들 바캉스니 배낭여행이니 해서 강의실을 떠났기 때문이었다.

재현도 종강 다음날, 배낭 하나만 달랑 짊어지고 정해놓은 곳 없이 기차에 올랐다. 답답한 도시를 떠나 낯선 도시의 거리를 걷고 싶었다.

재현은 차창 밖으로 지나가는 산과 들, 옹기종기 모여있는 집들을 쳐다보면서 스쳐 가는 모든 것에 한 채린, 그녀를 담았다.

재현은 옥천에서 내렸다. 채린과 그만의 추억이 담긴 장소를 찾아가기 위해 애쓰는 재현만을 남긴 채, 기차는 역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두 개의 선이 곧게 이어진 빈 철길만이 뜨거운 시선으로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재현이 역을 나와 시내버스에 오르자 버스에는 노인 몇 분만이 타고 있었다. 버스에서 내려 옛날에 살았던 동네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오후의 햇볕이 강렬하게 내려 쬐고 있었다. 배낭을 짊어진 등줄기로 땀이 흐르고 있었다.

빠른 길을 택한 재현은 20여분쯤 걸어 올라가자 낚시터로 바뀐 저수지에는 사람들이 드문드문 거리를 두고 앉아 낚싯대를 던지고 있었다.

재현은 나무 그늘에 자리를 잡고 앉아 이마에 맺혀있는 땀방울을 닦아냈다. 길옆으로 줄지어 서있는 미루나무 잎새를 흔드는 바람소리와 쉴 새 없이 울어대는 매미로 인해 가슴 한 구석은 여전히 허전했다.

재현은 배낭에서 보온병을 꺼내 종이컵에 냉커피를 따랐다. 커피 향이 바람 속으로 사라져 갔다.

재현은 빈 종이컵을 들고 앉았던 자리에서 일어나 마을 뒷산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곳은 고속전철이 지나가게 되어 많이 달라져 있었고, 개간되어 밭으로 변해버린 곳에는 옥수숫대들이 높게 자라고 있었다.

눈만 뜨면 채린과 재현이 올라와 소꿉놀이를 하던 큰 바위동굴은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었다. 재현은 소중한 것을 잃어버린 듯한 마음을 안고 기차에 올랐다.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산과 들처럼 시간이 재현과 채린의 거리를 가깝게 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지도 못한 채......

재현은 기차에서 내리자 곧장 아파트로 들어왔다. 배낭을 아무렇게나 던져 놓고 침대에 누웠다. 몸은 피곤한대도 쉽게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냉장고 문을 열자 안은 텅텅 비어 있었다. 며칠 전 마시려다 말고 냉장고에 넣어둔 소주 한 병이 눈에 들어왔다. 병 바닥이 보일 때쯤 재현의 눈꺼풀도 무겁게 내려앉기 시작했다.

재현은 나뭇잎에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에 눈을 떴다. 몇 시나 되었을까? 일어나 창문을 열자 더운 바람이 흙냄새와 함께 방 안으로 밀려 들어왔다. 하늘에 먹구름이 가득 밀려오더니 비가 오려고 그랬나 보다.

속이 타는 듯 쓰렸다. 재현은 침대에서 일어나 부엌에 있는 전기밥통을 열었다. 어제 먹다 만 밥이 그대로 남아 누렇게 변해 있었다. 냄비에 물을 채우고 가스레인지에 올려놓았다.

냄비 밑에 물기가 남아 있었는지 센 소리를 내더니 이내 파란 불이 올라와 냄비 밑을 달구기 시작했다.

재현은 담배에 불을 붙여 물고는 창틀에 반쯤 걸터앉아 거리를 내려다보았다. 저녁 인대도 떨어지지 않은 기온 때문인지 오고 가는 사람 모두가 지친 모습들이었다. 다행이라면 간간이 시원한 바람이 불어 준다는 것이었다.

봉지를 뜯어 냄비에 라면과 수프를 넣었다. 잠시 오가는 사람들을 보고 있었는데도 라면 국물이 넘쳐흐르고 있었다. 뚜껑을 열자 라면은 먹기 좋을 만큼 불어 있었다.

재현은 읽다 만 신문을 펼쳤다. 중소기업 사장이 주가를 조작해 거액을 챙겼다는 등 경제면도 날씨만큼이나 어수선했다. 문화면을 펼치자 기사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한 채린, 명성일보 신춘문예 당선 후 5년여 만에 출판된 첫 작품 ‘처용무’ 홍보를 위해 0월 0일, 00:00시 아트 칼리지에서 작가와의 만남을 갖습니다. 많은 분들이 오셔......』

이 세상에는 같은 이름을 쓰고 있는 사람도 많지만, 재현은 ‘한 채린’이란 이름 석자를 보는 순간 그녀라는 확신이 섰다. 반쯤 남은 라면 냄비를 한쪽으로 밀어 놓고 신문기사를 오렸다.

시간이 이른데도 아트 칼리지에는 많은 사람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한쪽에는 문화계 기자들이 기사화하기 위해 진을 치고 있었고, 반대편에는 출판사 사람들인지 부산하게 행사 준비를 위해 움직이고 있었다.

갑자기 실내가 웅성거리고 출입문을 통해 채린이 들어왔다. 크림색 정장에 긴 생머리를 한 그녀는 여러 사람의 호위를 받으며 들어오고 있어서인지 더욱더 빛나 보인다.

그녀의 외모는 어느 거리에서 마주친다 해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그야말로 상대방을 압도할만한 미모였다.

그녀 옆에는 NBX방송에서 인기가도를 달리고 있다는 MC 이강혁이 함께 걸어오며 뭔가를 얘기하자 그녀의 얼굴 가득 미소가 번지며 볼우물을 깊게 했다.

채린이 중앙에 자리를 잡고 앉자 이강혁도 그녀 옆에 자리를 잡았다. 그가 마이크를 끌어당기자 귀에 거슬리는 굉음이 잠시 흐른 후 그의 목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들려왔다.

“평소 만나고 싶었던 한 채린 작가의 출판기념회 사회를 보게 된 점 기쁘게 생각하며 많은 분들이 이 자리를 찾아 주신 점 또한 깊이 감사드립니다. 작가와의 만남인 만큼 잠시 인터뷰 시간을 드리겠습니다. 궁금하신 점이 있으시면 질문해 주시기 바랍니다.”

“매일 문학의 정 현진 기잡니다. 이번 작품은 한 작가께서 신춘문예에 당선된 후 5년여 만에 출판된 것으로 좀 늦은 감이 듭니다. 이를 두고 항간에는 여러 가지 루머가 떠돌았는데 알고는 계셨는지, 또 이렇게 늦어진 데에 어떤 이유가 있는지도 알고 싶습니다.”

재현은 채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채린은 보일 듯 말 듯한 미소를 감추며 질문에 대한 답을 하기 위해 마이크를 자기 앞으로 잡아당겼다.

“저도 제 일인 까닭에 듣기는 했습니다. 하지만 소문은 소문일 뿐 신경 쓰지는 않았습니다. 이렇게 늦어진 것은 기다림 때문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우리의 삶이 기다림의 연속이듯 저 역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늦었지만 이 작품은 새로운 출발을 알리는 신호탄입니다. 오래전에 시작된 저만의 기다림, 그 기다림의 다른 시작을 위한......”

채린이 ‘기다림’이란 말을 할 때는 모든 감정으로부터 자유로워진 표정이었다. 재현은 생각했다. 나만의 느낌은 아닐 것이라고, 실내가 너무 조용하다 싶었는 대 갑자기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채린이 일반 객석을 살핀 후 다시 입을 열었다.

“이 곳에는 제 작품에 관심을 갖고 계신 독자들께서도 많이 참석하신 것 같은 대 여러분 중 저한테 궁금하신 게 있으시면 질문해 주십시오. 최선을 다해 그 질문에 답해 드리겠습니다.”

재현의 옆에 앉아있던 젊은 남자가 손을 들었다. 순간 채린과 재현의 눈이 마주쳤다. 재현은 채린이 말한 ‘기다림’의 의미가 무엇인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채린의 답변이 끝나자 출판기념회는 끝을 맺었다. 채린과 재현의 재회는 그렇게 짧게 끝났다.

며칠 후 재현은 논문 자료를 구하기 위해 서점엘 갔다. 신간도서가 있는 곳을 지나가는 대 출판기념회 때 찍은 사진인지 채린이 환하게 웃고 있었다.

재현은 ‘저렇게 하얀 이를 내보이며 맘껏 웃고 있는 채린의 저 미소는 나만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오직 한 사람 이 재현만을 위해 준비한 선물이라고.

재현은 주저 없이 채린의 책 ‘처용무'를 들고 계산대로 걸어갔다. 아파트로 돌아온 재현은 마치 채린이 그의 옆에 있는 양 흥분 속에서 채린의 책을 펼쳤다.

채린의 사진 밑에는 그녀의 사인(sign)과 재현이 궁금해하는 인터뷰 기사가 짧게 실려 있었다. 첫 장을 넘기자 주위가 환해지는 듯했다.

흐르는 시간이 두렵다. 그에 대한 내 사랑의 기억이,

우리가 주고받았던 사랑의 말이

그의 가슴속에서 내 기억에서 영원히 지워질까 봐.

내 인생에 가장 행복했던,

가질 수 없는 그 사랑으로 인해 가장 불행했던 시간 속에서

함께 꿈꾸고 나누었던 모든 행복을 감사하련다.

나의 연인, 그의 연인이었던 시간을 위해......

나는 그리고 부르기로 했다. 그의 동의를 구하지 못한 탓에......

사람들은 시간이 흐르면 어떤 아픔도 잊게 된다고 말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 여운이 아주 짙게 남는 것도 있음을 그를 통해 알게 되었다.

그와 나누었던 한 번의 느낌으로 인해 평생을 어둠 속에 숨어 있어야만 하나!

이것이 그를 사랑한 죄의 형벌일까!

채린의 ‘처용무’는 이렇게 시작되고 있었다. 처용설화를 빌어 현대의 인물에 접목시킨 듯하면서도 전체적인 흐름은 ‘오송’이라는 한 여인이 사랑과 性에 눈을 뜨고 결국 그 사랑을 찾아 떠난다는....... 얘기였다.

갑자기 재현의 머릿속이 하얘지며 이 작품 속에 숨겨진 비밀의 열쇠를 그 자신이 쥐고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재현은 채린이 자신과 같은 하늘 아래 살고 있었다는 것을 안 순간부터 그 자신의 모든 게 달라짐을 느꼈다.

평소 그토록 길게만 느꼈던 밤 시간을 그녀의 작품과 함께 했다고 생각되자, 비어 있던 가슴 한 구석이 꽉 차오는 기분이었다. 재현은 마지막 장을 덮고 책상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켰다.

내려진 블라인드를 올리자 창 밖이 밝아오고 있었다. 간간이 들려오는 자동차 소리, 아침 찬거리를 준비하는 사람들을 부르기 위한 젊은 남자의 목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재현의 아파트까지 들려왔다. 재현은 들뜬 기분에 현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민 현지입니다. 용건을 남겨 주시면 곧 연락드리겠습니다”

재현은 현지가 아침이면 수영장에 간다는 것을 잠시 잊고 있었다. 수화기를 내려놓고 담배를 꺼내 물었다. 담배 연기가 포물선을 그리더니 이내 공중으로 사라졌다.

현지는 재현이 군 제대를 하고 복학했을 때 동아리에서 만난 후배이며 유일하게 재현 곁에 남아 있는 여자가 현지였다. 현대무용을 전공한 현지는 당연히 유학을 갈 것으로 생각했던 주변의 기대와는 다르게 예술고에서 무용을 가리켰다.

神께서 그녀에게 내린 축복 중의 하나는 스스로 여자임을 즐길 줄 안다는 거였다.

어느 해였던가! 재현과 현지는 농촌봉사활동을 마치고 동아리 회원들과 함께 태안에 있는 연포로 뒤풀이를 하러 간 적이 있었다. 현지는 언제나 재현의 주위를 떠나지 않고 그의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그곳을 떠나오던 전날, 재현은 함께 간 일행보다 늦게 숙소로 돌아왔다. 우연히 창 밖을 쳐다보던 재현은 어둠 속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바닷가를 보고 자신도 모르게 숙소 밖으로 나왔다.

걸을 때마다 비릿한 소금기가 묻어 있는 바닷바람이 재현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재현은 바닷물이 밀려왔다가 떠내려가는 모래사장 끝에 앉아 어둠의 바다 저편을 쳐다보았다. 재현은 발자국 소리에 뒤를 돌아보자 현지가 걸어오고 있었다.

“차 선배!”

“현지야!”

“자지 않고 왜 여기 나와 있어요?”

현지가 재현에게로 걸어와 그의 옆에 앉자

“그런 너는 왜 안 자고 나왔어? 내일 일찍 출발하려면 자 둬야 피곤하지 않을 텐데.”

현지는 머리를 긁적거리며

“사실은 화장실 갔다 오는 대 선배가 밖으로 나가잖아요. 그래서 따라오다 보니 이곳까지 오게 되었어요.”

“그랬구나.”

재현이 말없이 앞만 바라보고 있자 현지는

“선배! 말없이 그러고 앉아 있으니까 아픔이 많은 사람처럼 보여요.”

“그래 보이니?”

“예.”

“현지야. 너도 들어봐.”

재현은 모래사장에 누워 바닥에 귀를 대자 현지는 이유도 모르고 재현 옆에 누워 귀를 댔다.

바닷바람이 불어와 모래사장의 기온을 차갑게 떨어뜨리고 있었다. 현지는 차가운 바닷바람에 몸을 떨고 있었다. 재현은 떨고 있는 현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분위기 탓이었는지 아니면 저녁에 식사하면서 돌린 소주 때문인지 재현은 자기도 모르게 현지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대었다.

현지는 뜨거운 입김을 재현에게 불어넣으며 적극적으로 재현의 반응에 대답했지만, 이상하게도 재현의 몸은 점점 굳어가고 있었다.

이미 재현의 가슴속에 깊게 자리 잡고 있는 채린이 재현의 모든 감각을 마비시켜 현지를 안지 못하도록 만들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재현이 당황해하며 먼저 숙소로 들어가 버리자, 현지는 한동안 재현의 반응에 황당해하고 고통스러워했다. 그 시기가 지나자, 현지는 사랑 때문에 아주 그의 곁에서 떠나버리는 것보다는 우정이라는 이름으로라도 그의 곁에 남아 있는 편이 현명하다는 결정을 내렸다.

재현은 할 일 없어 빈둥거리는 사람처럼 거실과 베란다를 왔다 갔다 하다 무슨 생각인지 아파트를 나섰다.

토요일 오후라 그런지, 시내의 도로는 밀리는 차들과 거리를 오가는 많은 사람들로 인해 모두가 짜증스러운 얼굴이었다. 재현 역시 조금 더 걷다가는 머리가 어떻게 될 지경이었다.

어디든 들어가야겠다는 생각에 주변을 둘러볼 여유도 없이 ‘크리스털(crystal)’이란 레스토랑 문을 잡아당겼다.

안으로 들어오니 카운터에는 ‘아르바이트 한 수정’이란 명찰을 단 학생인 듯한 아가씨 혼자 자리를 지키고 있었고 모두들 룸으로 들어갔는지 홀에는 재현뿐이었다.

재현은 거리와 통하는 창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밖의 거리는 여전히 복잡해 보였다. 그렇게 지겹던 오후의 햇살이 실내 조명등 탓인지 마음을 차분하게 한다. 재현은 체리티를 주문하고 창 밖을 쳐다보았다. 정면으로 ‘크리스털’이란 간판이 보였다. 제 모습일 때는 한없이 눈부시지만 깨지면 제 몸을 아예 산산조각 내버리고 마는 ‘크리스털’이라......

출입문이 열렸다. 재현은 무심코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뜻밖에도 한 채린이 ‘크리스털’의 문을 열고 그가 있는 곳으로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채린은 재현과 대각선인 자리에 앉았다. 재현이 힐끔거리자 채린은 경고라도 하고 싶은 듯 재현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자신의 표정이 우스웠을까, 보일 듯 말 듯 미소를 지었다.

문이 다시 열리고 중년의 나이쯤 먹어 보이는 여자가 들어왔다. 카운터에 앉아있던 아가씨가 급히 일어나 인사를 했다. 그 여인 역시 재현과 눈이 마주치자 얼른 고개를 돌렸다.

앉아있는 채린에게로 걸어가더니 그녀의 어깨를 툭 치고는 건너편에 앉았다. 그들이 주고받는 말소리가 재현이 앉아 있는 자리까지 들려왔다.

“온다는 말도 없이 언제 왔니? 미리 전화라도 했으면 기다리고 있을 거 아냐!”

“이 앞을 지나가다 언니 본지도 오래되었고 해서 그냥 들어왔어요!”

“미안하다. 출판기념회에 못 가서. 대신 오늘 저녁은 이 언니가 살 테니 섭섭하게 생각지 마. 알았지?”

그 여자는 채린의 손을 잡고 흔들었다.

“갈증도 나는 대 우선 맥주나 한 잔 할까?"

채린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떡였다.


“수정아! 맥주 두 잔!”

“예.”

수정이 맥주잔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자 채린은 갈증이 났었는지 맥주 한 잔을 단숨에 다 마셔 버렸다. 맥주 거품이 그녀의 목을 타고 흘러내렸다. 순간 재현도 갈증을 느꼈다.

재현은 주스 한 잔을 다시 시켰다. 재현은 크리스털을 나와 거리를 걷는 데도 채린의 목을 타고 흘러내리던 맥주 거품이 떠올랐다.

재현은 논문 마감일이 가까워지면서 자료 준비로 서점과 대학 도서관을 뒤지고 다니느라 맘만 조급해졌다. 오늘도 부산대에 있는 선배로부터 필요한 자료를 구해 놨으니 다녀가라는 전화 한 통화에 재현은 부산까지 다녀왔다.

재현이 역을 나와 넓은 광장에 섰을 때는 정면으로 보이는 하늘에 저녁놀이 짙게 번져가고 있었다. 그 광경에 재현의 맘은 채린이 곁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그가 많은 여행지에서 돌아올 때마다 느껴야 했던 그 허전함의 이유가 채린이었다는 것을 다시 깨닫는 순간이었다. 재현은 피곤했지만 ‘크리스털’을 찾았다.

안으로 들어서다 잠시 멈칫했다. 채린이 먼저 와 있었다. 채린도 재현을 의식했는지 힐끔 쳐다보고는 고개를 돌렸다.

“어서 오세요”

카운터에 앉아있던 수정이 일어나 인사를 하였다. 재현은 창 옆에 앉아 자료를 검토하였다. 수정이 걸어와 테이블 위에 물 컵을 내려놓았다.

“오늘도 체리 티시죠?”

“하하하. 오늘은 다른 차를 마시려 했더니 수정 씨가 체리티를 추천하니 그 걸로 마셔야겠네요”

재현의 말에 수정의 얼굴이 붉어지며 급히 주방으로 들어갔다. 문이 열리고 한 남자가 들어왔다.

채린의 작품 발표회에서 본 듯하였다. 나이는 채린과 비슷해 보였고, 그 남자는 곧장 채린을 향해 걸어갔다. 재현은 갑자기 출현한 그 남자를 바라보면서 그동안 느끼지 못했던 질투심을 느꼈다.

채린은 맞은편에 앉아 있는 그 남자가 얘기하는 동안에도 재현을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수정이 재현 앞에 체리티를 놓고 돌아갔다. 오늘따라 체리의 붉은빛이 더욱더 선명해 보였다.

재현이 잔을 비우고 읽고 있던 자료들을 정리해 자리에서 일어나자, 채린이 그의 곁으로 걸어왔다.

“초면에 실례합니다. 한 채린이라고 합니다.”

“무슨 일이십니까?”

“제가 아는 분이랑 많이 닮으신 거 같아서 실례를 범했습니다.”

재현이 채린을 보며 웃었다. 마치 호수처럼 투명하고 깊은 눈망울을 가진 채린이 가까이서 그를 뚫어질 듯 쳐다보며 그의 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제가 이상한 사람처럼 보이나요?”

“아! 그런 거 아닙니다. 기분 나빠하지 말아요!”

채린은 재현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재현과의 낯익음이 무엇 때문인지 찾으려 애쓰는 것 같았다.

“얼마 전 제 출판기념회에 오셨죠?”

채린이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예. 맞습니다.”

“맞군요. 지난번 이 곳에서 마주쳤을 때도 많이 궁금했었어요!”

“그 궁금증이 풀렸다니 다행이네요.”

“시간 괜찮으시면 차 한 잔 하시면서 저와 얘기를 더 좀 나누시면 안 될까요?”

“어쩌죠? 오늘은 제가 좀 피곤하네요. 사실 부산에서 조금 전에 도착했거든요. 아쉽지만 다음 기회에 뵙도록 하죠!”

“죄송합니다. 제 생각만 했네요.”

재현은 채린이 당황해 하자 지갑에서 명함 한 장을 꺼내 채린에게 내밀었다. 그녀는 재현의 명함을 쳐다보고는 음미하듯 그의 이름을 불렀다.

“차^재^현, 대학에 계시는군요!”

그녀는 카운터에 있는 메모지에 자신의 이름과 전화번호를 적었다. 재현은 채린이 전화번호가 적힌 메모지를 넘겨줄 때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녀의 향으로 인해 숨이 멈추는 듯했다.

채린도 자기에게 등을 보이며 돌아서 나가는 재현에게서 잊히지 않는 향기를 느끼고 있었다. 채린은 재현이 걸어 나간 문 쪽을 쳐다보다 자신의 손에 있는 명함을 보았다.

“차 재 현!”

재현이 크리스털을 나왔을 때는 밖은 어둑어둑해져 있었다. 상점의 네온사인은 거리에 별을 갈아 뿌려 놓은 듯 빛을 내며 오가는 이의 시선을 유혹하고 있었다.

재현은 버스정류장을 향해 천천히 걸었다. 갑자기 굵은 빗줄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아침에 일기예보를 들을 때도 분명 비가 온다는 얘기는 없었는데, 그의 옆을 지나가던 연인들이 투덜대며 뛰기 시작했다.

빗줄기는 굵어지다 못해 아예 천둥소리까지 동원해 그 힘을 과시하고 있었다. 재현이 아파트에 도착했을 때는 속옷까지 다 젖어 빗물이 거실 바닥으로 줄줄 흐르고 있었다. 재현은 옷을 갈아입고 전화응답기를 켰다.

“안녕하세요 교수님. 저 김 조굡니다. 논문 마감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제가 도울 일이 있나 해서 전화드렸습니다. 그럼 연락 기다리겠습니다.”

“안녕하세요 교수님. 3학년 과대표 정숩니다. 외출하셨는지 연락이 안 되네요. 부모님 모시고 캐나다 누님 댁에 갑니다. 돌아와서 인사드리겠습니다.”

재현은 지갑에서 채린이 적어 준 그녀의 전화번호를 수첩에 다시 옮겨 적었다.

얼마 후, 아침운동을 마친 재현은 TV부터 켰다. 채널을 NBX에 맞추자 이강혁의 들뜬 목소리가 들렸다.

“출판계 소식입니다. 얼마 전 출간된 한 채린의 ‘처용무’가 드디어 베스트셀러 대열에 합류했다는 소식입니다. 세상의 빛을 보기까지는 5년이란 긴 시간이 걸렸지만 정상에 오르는 것은 단시일이군요. 문화계 단신이었습니다.”

채린은 끊임없이 재현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방으로 들어가려다 전화응답기를 켰다.

“교수님! 김 조굡니다. 어제 교수님 나가시고 바로 한 채린이란 분이 전화했습니다. 개강하기 전에 한 번 찾아뵙겠습니다.”

메시지를 지우고 채린의 전화번호를 눌렀다. 짧게 신호음이 끝나고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 채린입니다.”

“차 재현입니다. 어제 학교로 전화했다고 해서 이른 시간인 줄 알면서도 전화했습니다.”

“사실은 어제 그쪽에 갔다가 생각보다 일이 빨리 끝나 교수님하고 차 한 잔 하고 싶어 전화드렸어요”

“정말 아쉽게 되었네요! 그런 줄 알았으면 조금 늦게 나오는 건대. 오늘은 시간이 어떠신지요?”

“오늘내일은 시간 내기가 좀 곤란한대요. 하지만 모레는 괜찮아요!”

“좋아요! 그럼 한 작가 편한 시간에 전화 줘요.”

“예.”

재현은 기분이 이상했다. 첫 미팅 후 애프터 신청했다가 거절을 당한 것처럼, 하지만 이런 신선함을 느끼는 것도 참으로 오래간만이었다.

채린도 재현을 출판기념회에서 본 후부터 자신이 변하는 것을 느꼈다. 혼자 있을 때면 이상하게도 문득문득 재현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래서 어제도 느낌의 정체를 알고 싶어 그에게 전화를 했던 것이다. 채린은 그가 전화를 받지 않자 섭섭하기까지 했다.

채린은 오늘 재현으로부터 전화를 받자 안심했다. 떨리는 목소리에서 어렴풋이 자신에 대한 그의 감정을 느낀 탓에.

일요일 아침, 재현은 다른 날보다 더 일찍 잠에서 깼다. 침대에서 뒤척이다가 시계를 쳐다보니 5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재현은 일어나 베란다로 나갔다. 피부에 닿는 새벽 공기가 기분을 맑게 했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환경미화원들이 마무리 청소를 하고 있었다.

재현은 언젠가부터 저들처럼 몇 안 되는 사람들이 움직이는 이 새벽을 좋아하기 시작했다. 잠들어 있거나 막 깨어나려는 이 시간에 마음의 여유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재현은 날이 밝기를 기다리는 것이 너무 지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나마 논문 자료라도 뒤지고 있지 않았다면 재현의 머리는 두통으로 진통제라도 먹어야 할 정도였다.

재현은 더 이상 그녀가 전화해주기를 기다리고 있을 수는 없었다. 차라리 거절을 당해도 자신이 먼저 전화해야겠다 맘먹고 전화 다이얼을 돌렸다. 그녀의 목소리가 가느다란 전화선을 통해 들려왔다.

“여보세요?”

“차 재현입니다.”

“예?”

“명성대 차 재현입니다. 내가 잠을 깨웠나 봐요!”

“늦은 시간까지 작업했거든요! 그렇지만 괜찮아요.”

그녀의 목소리는 가라앉아 있었다.

“미안해요! 그런 줄도 모르고 너무 일찍 전화를 했네요.”

작게 그녀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괜찮아요. 그런데 지금 몇 시나 됐어요.?”

재현은 채린의 물음에 시계를 쳐다보았다.

“5시 30분을 지나고 있네요.”

“예?”

채린과 재현 사이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그녀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이렇게 일찍 전화하신 걸 보니 오늘을 그냥 보내면 안 되겠네요. 어디로 나가면 될까요?”

“한 작가! 위치를 알려주면 내가 그쪽으로 가도록 할께요.”

“고속도로 진입하기 전 오른쪽에 있는 아파트 옛 마을이에요.”

“그럼! 앞으로 한 시간 후에 전화할 께요. 준비하고 있어요.”

“예.”

재현은 전화 수화기를 제자리에 놓고 아파트를 나왔다. 길 옆 나뭇잎들은 모르는 새에 색이 많이 바래 있었다.

옛 마을은 산 중턱에 자리 잡고 있어 주변 전망이 좋고 아늑함을 주는 곳이었다. 아파트 주변의 수목이 보기 좋게 다듬어져 있어 이 앞을 지나갈 때마다 분위기가 맘에 들었었는데 그녀가 이 곳에 살고 있을 줄은 몰랐다.

재현은 채린이가 살고 있는 아파트 입구 한쪽에 차를 세우고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한 채린입니다.”

“차 재현입니다. 아파트 입구에 서 있습니다.”

“10분만 기다려 주세요. 곧 내려갈 께요.”

잠시 후 채린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편하게 베이지색 브이라인 니트에 진바지를 입어서인지 더욱더 청순해 보였다.

그녀가 차에 오르자 green 향이 상큼하게 다가왔다. 재현은 자신의 차에 그녀를 태웠다. 재현은 채린과 함께 무작정 달려가고 싶었지만 가까운 교외로 방향을 잡았다.

“어디 가시려고요?”

“오직 한 작가를 납치할 맘에 미처 목적지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네요.”

그녀는 놀란 표정으로 재현을 쳐다보았다.

“하하하. 그렇게 긴장하지 마세요! 생긴 거는 이래도 여학생들 사이에서는 꽤 매력 있는 교수니까!....”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셔도 교수님께서 얼마나 멋진 분인가를 이미 깨닫고 있습니다.”

“한 작가가 그렇게 생각해 준다면 더욱더 고마운 일이지만......”

시내를 벗어나 30여분쯤 달리자 호수가 가까워져 그런지 안개가 짙어지고 있었다. 길 앞은 뿌연 안개로 뒤덮여 있어 시야가 좁아지고 있었다.

재현은 길 옆 넓은 곳에 차를 세웠다. 채린을 데리고 작은 길을 통해 물가로 내려갔다. 호수 주변은 안개에 뒤덮여 있었고 물 흐르는 소리와 호수 옆을 지나가는 차 소리만이 그 고요함을 깨고 있었다.

앞으로 조금 더 걸어가자 작은 오솔길이 두 갈래로 나뉘어 있었다. 재현과 채린이 호수 쪽으로 나있는 길로 접어들자 앞에서 물소리와 함께 서로 주고받는 말소리가 들렸다. 소리가 나는 곳에 이르러 보니 노부부가 낚시질을 하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고기는 많이 잡으셨어요?”

할아버지는 재현과 채린을 힐끔 쳐다본 후

“고기 잡으려고 나온 거 아니라네. 이렇게 공기가 좋은 곳에서 우리 할멈 아침 운동도 시킬 겸해서 나온 거지.”

“예. 그랬군요.”

할아버지는 재현 옆에서 웃고 서있는 채린을 유심히 쳐다보았다.

“색신가?”

재현이 이내 답변을 못하고 머쓱하게 웃기만 했다.

“복 많은 사람이구먼. 이렇게 어여쁜 색시를 두었으니.”

재현도 채린을 쳐다보고는 할머니에게 눈길을 보냈다.

“고맙습니다. 할머니께서도 젊으셨을 때 미인이라는 말 많이 들으셨겠어요! 지금도 이렇게 고우시니.”

할아버지는 재현의 말에 흡족한 표정을 하고는

“예끼! 노인네를 다 놀리다니...... 사실 이 할망구도 처녀시절에는 미인이란 말 많이 들었지.

자네들 보니 옛날이 그리워지는구먼. 여보시게. 옛말에 부부가 닮으면 잘 산다는 말이 있지! 색시한테 잘하시게!”

“예. 어르신 말씀 명심하겠습니다.”

채린과 재현은 노부부를 뒤로하고 산책로로 올라왔다. 채린이 웃자

“왜 웃어요?”

“차 교수님 사모님께서 들으시면 기분 나쁘시겠어요!”

갑자기 재현이 정색을 하고는

“사모님이요? 한 작가! 내 기분이 나빠지려고 합니다.”

채린은 재현의 말에 ‘이유를 모르겠다’는 듯 빤히 그를 쳐다보았다. 재현은 머리를 긁적거렸다.

“아직 미혼인 사람을 유부남 취급을 하니 내 기분이 나쁘지 않겠습니까?”

“어머. 정말 죄송해요.”

“아! 그렇게 정색을 하면 오히려 내가 미안해지네요.”

“.......”

울창한 나뭇가지가 수십 미터에 걸쳐 뻗어 있어서 그런지 나무들 사이로 부는 바람소리가 유난히도 크게 들려왔다. 재현과 채린은 길 옆 의자에 앉았다. 잠시 어색한 시간이 흐르고 채린이 재현을 한 번 쳐다보고는 먼저 말문을 열었다.

“차 교수님을 뵙고 나서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무슨 생각이요?”

“교수님과 제가 예전에 알고 지냈던 사이는 아닐까 하는, 이상하게 교수님과 마주칠 때마다 낯선 느낌이 전혀 안 들어서요.”

“한 작가!”

“편하게 부르세요. 예부터 ‘선생님 그림자는 밟지도 않는다’는 말도 있잖아요.”

“좋아요. 그럼 지금부터 나 편하게 부를 께요. 그건 그렇고 혹시 군북에서 살은 적 있어요?”

“어머! 그곳을 아세요?”

“부모님 고향이고 저도 어린 시절을 그곳에서 보냈거든요.”

채린은 옛 생각을 하는 듯하더니 다시 재현을 쳐다보았다.

“저도 잠시 그곳에서 생활한 적이 있어요.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녀는 말끝을 흐리며 무얼 생각하는지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한 작가! 뭘 그렇게 생각해요?”

“죄송해요. 어렸을 때 생각이 나서요.”

“그래요! 그럼 우리 한 작가 어린 시절이 어땠는지 그 얘기나 좀 들어볼까요?”

“제 기억 속에는 항상 아빠같이 저를 보호해주던 사람이 있었죠. 어린 시절을 되돌아볼 때면 항상 그 사람이 생각나요. 얼마나 변했을까요? 길에서 마주치면 제가 알아볼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그 사람이 많이 보고 싶어요?”

“예. 좋은 일이 있을 때면 그 사람한테 달려가 자랑하고 싶어 져요. 지금 어디에 있는지 궁금하네요. 그 사람도 나를 기억하고 있을지도.”

“한 작가! 만약 내가 그 사람이라면?”

“에이 농담이시죠?”

재현이 정색을 하자 채린의 눈이 놀라움으로 더욱더 커져갔다.

“정말이에요?”

“정말!”

채린은 아직도 믿어지지가 않는 듯 재현을 쳐다보기만 했다. 재현은 그녀의 놀란 표정 때문에 웃고 말았다.

채린은 이제야 재현을 볼 때마다 느껴지던 친밀감이 어디에서 비롯된 건지를 깨달았다. 채린은 마치 오랫동안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은 양 흥분이 되었다.

채린은 사춘기를 보낼 때에도 그와 함께 했던 어린 시절이 있어서 꿈을 꿀 수가 있었고 그가 있었기에 지금의 그녀가 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채린아! 궁금한 게 있는 대 물어봐도 되겠니?”

“예.”

“혹시 처용무의 모티프(Motif)가 그곳이니?”

“전부라고 할 수는 없지만 어느 정도는 그렇다고 할 수 있어요.”

“그랬구나.”

채린의 얼굴이 다시 어두워졌다. 재현은 어쩌면 그 자신도 모르게 채린의 아픈 상처를 들추어낸 것은 아닌가 하여 맘이 편하질 않았다.

“그 작품을 쓰는 내내 가슴앓이가 심했어요.”

“이유를 물어봐도 되니?”

“......”

“인터뷰 때도 기다림이란 말을 했는데 그 기다림이 무얼 의미하는지, 혹시 어떤 사람을 지칭하는 거니?”

채린은 재현의 답변에 그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바람소리가 더욱더 크게 들려왔다. 나무들 사이로 가지가 서로에게 몸을 기대고 있는 터라 바람이 불 때마다 서로를 생채기 내듯 부딪히고 있었다. 채린은 잠시 재현을 바라보더니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 누가 그랬을까! ‘여자 나이 설흔부터 자신의 얼굴 표정에 책임을 지라’고, 낼모레면 설흔을 바라보는 그녀의 얼굴은 어딘지 모르게 오랫동안 정신 수양을 해온 사람처럼 경건해 보였다. 재현은 채린이 자기 스스로 자신을 잘 정리하는 타입이라고 느꼈다.

그 반면에 느껴지는 채린의 천진스러움과 순수함 또한 그에게는 신비로움을 더해 주었다. 재현은 말끝을 맺지 못하고 수줍어하는 그녀에게서 아주 오래 전의 한 여자와 만나고 있었다. 엄마의 손을 놓칠까 봐 꼭 붙들고 열심히 엄마를 쫓아가던 어린 채린과......

그리움의 시간이 길었던 탓일까! 채린은 아니 사랑이란 놈은 소름이 끼칠 정도로 빠른 속도를 내며 재현에게로 달려오고 있었다. 채린을 만난 후, 재현의 논문 작업은 여전히 제자리걸음인 채 책상 한쪽에 밀쳐져 있었다.

재현이 원고 더미를 쳐다보며 넋두리를 하고 있을 때였다. 마치 누가 듣기라도 한 것처럼 거실에서 전화벨이 울렸다.

“여보세요?”

“저 채린이에요! 이렇게 날씨가 좋은 대 그냥 집에만 계실 거예요? 그러지 말고 빨리 나오세요.”

재현도 채린을 만나고 싶은 맘은 굴뚝같았다.

“어떡하지? 나도 그러고 싶긴 한대, 개강 전에 이 논문을 끝내지 않으면 다음 학기에 차질이 많거든...... 지금도 많이 늦어서 시간이 촉박해.”

“논문요?”

“음. 박사학위 논문 인대 너를 만나고서는 제대로 챙기질 못했거든.”

“제가 도와 드려도 될까요?”

“정말? 채린이가 도와준다면 나로서는 더 바랄 게 없지!”

“알았어요. 제가 집으로 갈 께요.”

“음!”

그녀는 정확히 1시간 뒤 재현의 아파트 초인종을 눌렀다.

“누구세요?”

“채린이에요.”

“금방 달려올 것 같더니......”

그녀의 양손에는 커다란 비닐봉지가 들려 있었다.

“이게 다 뭐야?”

“일할 때는 잘 먹어야 하거든요.”

재현은 ‘피식’ 웃고 말았다. 채린의 얼굴에 가득한 그 장난기로 인해...... 어수선했던 자료들은 조금씩 제 모습을 찾아가고 있었다. 재현은 커피메이커에서 내린 커피를 들고 서재로 들어갔다.

“채린아.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니니?”

“오늘 다 마치고 우리 교수님 납치하려고 그러죠.”

“음? 이렇게 아름다운 여인이 손수 납치해 주신다면 영광일 따름이죠.”

채린이 재현의 말에 혀를 찼다.

“하여튼 남자란!.......”

“채린아! 지금 네가 한 말을 다른 사람들이 들으면 남자경험이 많은 여자로 착각한다.”

“예?”

“하하하.”

“남자 경험이라......”

채린은 뒷말을 남긴 채 베란다로 나갔다. 재현도 채린의 뒤를 따라 베란다 난간에 기대어 섰다. 채린이 지금 시간을 확인했다.

“벌써 이렇게 되었네.”

“채린아! 무슨 계획 있었던 거 아니니?”

채린이 재현을 쳐다보다 고개를 돌렸다.

“함께 가고 싶은 데가 있었거든요.”

“그래! 드디어 나랑 가고 싶은 곳이 생겼다는 거지?”

“그러니까 빨리 자료 정리를 마쳐야 해요.”

채린은 빈 잔을 재현의 손에 쥐어 주고는 서재로 들어갔다. 채린의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가 3시간 넘게 들려왔다.

모세의 기적이 일어나듯 시계가 정확히 반으로 갈라지자, 꼼짝 않고 있던 채린이 프린터로 뽑은 논문 초본을 가지고 거실로 나왔다.

“차^ 교수니 임! 마지막 검토를 해 보실까요?"

2천 페이지가 넘던 원고 뭉치는 그녀의 손끝에 닿자 8백여 페이지로 압축되어 완벽하게 마무리되어 있었다. 재현은 책장을 넘길 때마다 그녀의 지혜로움에 감탄사만 연발하였다.

채린은 그가 미처 챙기지 못한 부분까지 세밀하게 찾아내 주석까지 달아 놓았다. 재현은 주석을 달아 놓은 곳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채린아! 이 부분은 내가 미처 챙기지 못한 부분 인대 네가 어떻게 알고 주석까지 달아놓은 거야?”

채린은 재현의 질문에 대답 대신 컴퓨터를 쳐다봤다.

“컴퓨터는 왜?”

“요즈음 인터넷이 얼마나 잘 되어 있는 데요.”

재현은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마냥 대학 도서관이나 서점을 뒤져 자료를 챙길 생각만 했지, 인터넷 속의 정보를 활용할 생각은 해보지 못했다.

채린은 재현이 논문 검토를 마칠 때까지 조용히 그를 지켜봤다. 재현이 마지막 장을 덮더니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채린도 재현을 따라 일어났다.

“맘에 안 드세요?”

“아니! 채린아! 빨리 인쇄소 가자. 일주일이면 완성되겠지?”

“지금 가자고요?”

“음! 완성된 초본이 있는 대 뭘 망설여! 옷 갈아입고 나올 테니 넌 디스켓이 필요할지도 모르니까 저장해서 가지고 나와. 바로 가자!”

채린은 재현이 외출복으로 갈아입는 동안에도 문 밖에서 재차 물었다.

“박사 학위논문이에요. 정말 더 보완할 데 없는 거예요?”

“그렇다니까. 빨리 저장해서 가지고 나와.”

재현은 채린이 정리해준 초본이 정말 맘에 들었다. 재현은 채린을 향해 돌아서 그녀의 두 어깨를 잡고 채린의 눈을 응시했다.

“채린아! 그렇게 자신 없니? 걱정 마. 그 누가 봐도 이 논문집은 최상이 될 테니”

채린은 재현의 확신에 찬 말을 듣고서야 맘이 놓였다.

“그럼. 맡길 곳은 있으세요?”

“아니! 학교 앞에 가면 되지 않을까?”

“제가 아는 데로 갈까요?”

“더 좋지.”

재현과 채린이 들린 곳은 시내에서 약간 벗어난 외곽에 있는 ‘명 인쇄소’란 곳이었다. 밖에서 볼 때에는 전혀 인쇄소란 느낌이 들지 않는 전통 가옥이었다.

실내는 전통 양식을 훼손하지 않은 채 이용도가 높은 공간을 현대식으로 바꿔 놓은 게 인상적이었다.

이 곳 사람들이 전통을 지키려 노력한 게 엿보이는 공간이었다. 재현이 이곳저곳을 눈여겨보며 살피고 있을 때였다.

“한 작가!”

“명 사장님! 그동안 안녕하셨죠?”

“음. 그런데 웬일이야?”

채린은 재현의 논문 초본을 명 사장에게 건네며

“이 분은 명성대학에 계신 차 재현 교수십니다.”

“명 재만입니다.”

재현과 명 사장은 악수를 하며 인사를 나누고 채린이 명 사장 앞에 논문 초본을 내밀었다.

“사장님! 차 교수님 박사 학위논문 원고예요. 사장님의 도움이 필요해서 이렇게 달려왔어요.”

“우리 한 작가 말이라면 열일 다 미루고서라도 해 드려야지.”

“감사합니다.”

명 사장은 재현에게 물었다.

“언제까지 완성하면 되겠습니까?”

“15일 안으로 해주시면 됩니다.”

“그럼 우리 한 작가 검토도 받아야 하니까 일주일 후에 다시 봅시다.”

재현은 명 사장의 일주일이라는 말에 놀라며

“그렇게 빨리 되겠습니까?”

“한 작가라면 분명 디스켓에 담아 왔을 테고 교정 후 뽑아내기만 하면 될 거 아닙니까?”

“그렇지만......”

“걱정하지 마십시오. 일주일 후에 뵙기로 하고 식사나 하러 가시죠.”

“사장님! 오늘은 선약이 있으니 다음 기회로 미루죠.”

“그래요 그럼.”

“차 교수님! 다음에 뵙겠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재현과 채린은 명 사장과 헤어져 시내로 돌아왔다.

“채린아! 어디 갈 데 있다면서?”

“시간이 맞지 않아서 오늘은 안 되겠어요. 그곳은 다음에 가기로 해요.”

일주일 후, 재현과 채린은 완성된 논문집을 찾으러 명 인쇄소를 찾았다. 명 사장은 채린과 재현을 반갑게 맞이했다.

“명 사장님! 논문은 마무리하셨죠?”

“한 작가! 무슨 그런 섭섭한 말씀을 다하십니까? 명 인쇄소가 하는 약속은 언제나 칼이잖습니까?”

채린이 웃으며 명 사장의 기분을 풀어줬다.

“그래서 우리 명 사장님께 부탁드린 거라는 거 더 잘 아시면서 그러세요!”

“하여튼 한 작가는 사람 꼼짝 못 하게 한다니까. 하하하.”

명 사장은 채린을 뒤따라 들어오면서 재현에게 채린의 완벽주의를 슬쩍 귓속말로 알려주었다. 그리고 자신의 책상 서랍에서 재현의 완성된 논문집을 꺼내 두 사람 앞에 내놓았다.

“다른 거는 포장해서 묶어 놓았습니다. 한 작가 맘에 들어야 할 텐데 걱정입니다.”

“무슨 말씀을 그리 섭섭하게 하십니까? 이 논문은 제 논문입니다.”

“하하하. 당연히 그렇죠. 하지만 한 작가 맘에 들지 않으면 다시 작업해야 하거든요.”

채린은 명 사장의 말에

“너무하시네요. 명 사장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제가 지독하다는 비난성 발언이신 거 같은 대, 우선 이 논문 검토부터 끝낸 후 따지기로 하죠..”

채린도 장난스럽게 웃었다. 그러나 논문집을 살펴보는 채린의 눈빛은 마치 독사가 먹이를 앞에 두고 긴장하는 듯 보였다.

재현이 아무리 맘에 든다고, 완벽하다고 말을 해도 채린은 꼼짝하지 않고 여러 번 체크를 하였다. 그런 그녀를 인쇄소 사람들은 감탄하다 못해 질린다는 표정을 지었다. 채린이 논문집을 덮고 일어났다.

“명 사장님. 그동안 수고 많으셨어요!”

“한 작가 맘에 든다니 나도 기쁘네.”

명 사장은 재현을 쳐다보면서

“사실 한 작가가 이렇게 세밀하게 검토하기 때문에 그 누가 맡겨도 안심할 수가 있습니다. 처음에는 모두가 한 작가가 오면 서로 피하기에 급급 했는 대, 한 작가 덕분에 다른 작가들로부터 인쇄 부탁이 줄을 잇고 있답니다.

오히려 우리가 한 작가에게 고맙다고 인사를 해야 할 처지죠.”

명 사장은 진심으로 하는 말이었다. 채린과 재현이 인쇄소를 나오려는 대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지나가는 비 같은데 잠시 앉았다 가시죠?”

“그럴까요?”

재현은 명 사장으로부터 해마다 변하는 대학 입시제도의 문제성에 대해서 신랄하게 비판의 소리를 듣고 있었다. 채린은 그 옆에서 비 오는 거리를 말없이 쳐다보고 있었다.

채린은 재현을 만나러 오던 길에 신문에서 읽은 동원의 귀국기사를 생각하고 있었다.

“세 헤란 호텔의 차기 회장인 강동원, 재계와 언론의 주목을 받으며 오늘 귀국......”

채린은 그 기사를 보는 순간 아찔한 현기증을 느꼈다. 채린은 재현을 돌아보다가 서로 눈길이 마주쳤다. 채린이 어색해하며 웃자 재현은 채린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궁금해졌다.

금방 그칠 것 같던 비는 더욱 굵어지고 부는 바람도 거세져 아예 천둥소리까지 더해졌다. 옆에 있던 명 사장이 한껏 불만이 가득한 목소리로 한 마디 던졌다.

“태풍이 오려나! 아예 물통으로 들이붓는 구만.”

차들이 도로 위를 달려갈 때마다 웅덩이의 고인 물이 인쇄소 유리창에까지 튀고 있었다.

재현은 비가 그치기를 기다려 봐야 시간만 흘러 보낸다고 생각했는지

“명 사장님. 그만 가봐야겠습니다. 비가 그치기를 기다리다가는 한없을 거 같습니다.”

“예. 그러셔야 될 거 같네요.”

“수고하셨습니다.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예. 두루두루 소문 좀 많이 내주십시오.”

“예. 그럽시다.”

재현과 채린은 명 사장의 배웅을 받으며 인쇄소를 나왔다.

“그동안 고생 많이 하셨어요.”

“고생은? 나보다 우리 채린이가 더했지.”

“저야말로 교수님 덕분에 공부 많이 했습니다. 마치 제가 박사가 된 기분이에요.”

“박사? 그렇지. 학위수여식 때 연락할 테니 공동으로 받자.”

“예?”

재현은 진심이었다. 채린이 도와주지 않았으면 마감 때에나 겨우 마쳐야 할 상황이었기에.

재현의 논문은 심사를 맡았던 교수들의 만장일치로 심사위원회를 통과하여 코스모스 졸업을 하게 되었다.

사각모를 쓴 재현을 멀리서 채린이 지켜보고 있었다. 재현이 채린을 쳐다보자 그녀는 엄지손가락을 들어 최고의 표시를 보내줬다.

채린과 함께 했던 시간은 빠르게 흘러 다른 계절이 시작되고 있었다. 개강을 하자 재현의 생활은 다시 바빠지기 시작했다. 재현이 가까운 사람들에게 논문집을 돌리고 아파트에 도착했을 때는 정각 11시였다.

재현은 노상 주차장에 차를 세워놓고 밤하늘을 쳐다보았다. 달빛이 넓게 둥근 테두리를 만들고 구름은 어디론가 흘러가고 있었다.

옆 동 현지의 아파트를 올려다보았다. 불이 꺼져 있었다. 채린을 만난 뒤로는 통 현지를 만나지 못했다. 재현은 자신을 향한 현지의 맘을 알고 있는 터에 그 맘을 챙겨주지 못하는 게 항상 미안했다.

재현은 논문집이 든 봉투를 들고 현지의 아파트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엘리베이터가 7층에서 멈췄다. 재현이 초인종을 눌렀지만 안에서는 인기척이 없었다.

“벌써 자나!”

재현이 돌아서려 하자 문이 열리고 현지가 얼굴을 문 밖으로 내밀었다.

“차 선배. 이 시간에 웬일이에요?”

현지는 자다가 깼는지 잠옷 차림에 목소리가 가라앉아 있었다.

“요즈음 통 연락도 없고, 잘 있나 해서 올라왔어. 미안하다 잠자는 대 깨워서.”

“들어와서 차 한 잔 하고 가세요.”

“그럴까?”

커피메이커에서 물 끓는 소리가 들리고 잠시 후 현지가 내린 커피 잔을 들고 내려왔다.

“정말 이 밤에 웬일이세요?”

“네 얼굴 본지도 오래됐고 해서 올라왔다니까. 그리고 이 것도 전해 주려고.”

현지는 재현이 건네주는 봉투를 받아 들고 안에서 논문집을 꺼냈다.

“선배! 드디어 해냈군요?”

“음.”

“이 것 때문에 많이 바쁘셨을 텐데. 도와주지 못해 미안해요.”

“바쁘긴 했지만 잘 끝났으니까 마음 쓰지 마라.”

재현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넌 어떠니?”

“전 잘 지내고 있어요.”

“다행이구나.”

재현은 자리에서 일어나

“현지야. 나 그만 가봐야겠다. 들어가서 자료 좀 살펴봐야 해. 시간 내서 다시 들릴 께.”

재현이 신발을 신고 밖으로 나가려 하자

“차 선배. 제 걱정은 하지 마세요.”

“그래. 알았으니 걱정하지 않게 연락이나 자주 좀 해라.”

“예. 선배.”

재현은 평상복으로 갈아입고 거실로 나와 TV를 켰다. 자막이 뜨고 뉴스 앵커의 멘트가 시작되었다.

“얼마 전에 세 헤란 호텔의 강동원 상무가 독일에서 귀국함으로써 우리나라 재계의 후계구도에 대변혁이 시작될 예고를 하고 있습니다. 강 회장의 유일한 상속자인 그는 일찍부터 후계자로서의 전문 교육을 받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미혼인 그는 여성들의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습니다. 다음 뉴스는 최근 신용카드사의 수수료 등 인상으로......”

재현은 급히 학교를 나오면서 우편물을 주머니에 그냥 넣어 둔 생각이 들었다. 우편물 중에 경주 유림 측으로부터 받은 초청장이 눈에 들어왔다.

봉투를 뜯으니 경주에서 개최하는 ‘고전에 살아 숨 쉬는 여성의 존재’ 관련 학술회에 패널리스트로 추천되었는데 참석 여부를 알려 달라는 초청장이었다.

항상 사회적인 문제를 가지고 개선점을 찾아가는 유림 측의 활동에 관심을 갖고 있는 그로서는 학술회에 참석한다는 자체만으로도 뜻깊은 일이었다.

더욱이 유림 측에서 재현을 명단에 올렸다는 것은 대학에서의 자기 위치를 확고히 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준 것이라는 생각에 그의 맘은 다시 바빠지기 시작했다.

며칠 동안 학술회에 발표할 문헌들을 찾아 자료들을 정리하고 연구실을 나왔을 때는 어둠이 운동장에 가득했다.

재현은 운동장을 걸어 나오면서 젊은이들의 열기로 가득했던 이 곳도 밤이 오면 모두들 퇴장한 빈 무대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재현은 갑자기 채린이 보고 싶어 졌다. 학위 수여식 이후 채린을 만나지 못한 그로서는 끊임없는 인내심이 필요했었다. 재현은 휴대폰을 열다가 다시 닫았다.

“딩동.”

재현과 채린의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철문이 열리고 그녀의 모습이 보였다. 잊고 있던 그녀의 체취가 코끝을 자극시켰다.

“어머. 이 시간에 웬일이세요?”

“채린이 생각나서......”

채린의 아파트는 그리 넓지는 않았지만 그녀 혼자 생활하기에는 좀 크다는 생각이 들었다. 재현은 반쯤 열려 있는 방을 힐끔 쳐다보았다. 바닥에는 국어사전이니 자료들이 이곳저곳에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그녀는 재현의 시선을 눈치챘는지 급히 들어가 흩어진 책들을 주섬주섬 치우기 시작했다.

“조금만 앉아 계세요.”

정리를 마치고 나온 채린은 주방으로 걸어가다가 재현을 돌아보며

“어떡하죠? 먹을 거라곤 커피밖에 없는데.”

“커피! 좋지. 그런데 식사는 하고 일하는 거야?”

소파에서 일어나 냉장고 문을 열어보았다. 물병과 캔 맥주 몇 개와 계란 몇 알만이 있었다. 재현은 툴툴거리며 채린을 데리고 밖으로 나왔다. 아파트 상가에 스낵코너가 있었다. 허기가 가시자 재현은 채린을 차에 태웠다.

“작품도 좋지만 건강도 챙겨 가면서 해야지. 그곳이 어디 사람 사는 곳이니? 서생원님들도 네 집에 들어왔다가는 모두 굶어 죽겠다.”

“.......”

채린은 재현의 말에 눈물까지 흘리며 웃느라 정신이 없었다. 시내를 벗어나 20여분쯤 달려 도착한 곳은 삼림욕장이었다. 재현과 채린은 자판기에서 커피 한 잔씩을 빼들고 걸었다. 그곳에는 오직 달빛과 고요함, 그리고 재현이 사랑하는 한 채린, 그녀와 자신만이 있었다. 채린이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마치 돌아가야 할 곳에 가지 못하는 사람처럼 슬픈 얼굴을 하고 하늘을 쳐다보고 서있었다.

찬 기운이 옷 사이를 헤집고 들어와 체온을 빼앗아 간다. 얇은 옷 하나 걸치고 나온 그녀가 떨고 있었다. 채린은 캄캄한 숲에 단둘 이만 있는 게 무서웠는지 조금씩 재현에게로 다가서고 있었다. 재현은 모르는 척했다.

“채린아! 무섭니?”

“예?”

채린은 무섭냐는 재현의 말에 다가오던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태연하게 웃었다.

“우리 그만 내려가요.”

“저기까지만 올라가자.”

재현이 손짓하는 데로 몇 걸음 더 올라가자 길옆으로 작은 냇물이 흐르고 있었다. 사방이 조용한지라 물소리가 새소리와 어우러져 한밤의 멋진 멜로디를 만들고 있었다.

조금 더 가자 넓은 물웅덩이 보였다. 여름이면 아이들이 놀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게 제법 물이 차 있었다. 재현은 채린의 얼굴을 보는 순간 얄궂은 장난기가 기가 발동했다.

“채린아! 우리 가위바위보 해서 진 사람이 저기 물속으로 뛰어들기 할까?”

“놀리지 말고 그만 내려가요.”

채린은 사방을 둘러보며 재현의 손을 잡아끌었다. 재현은 그런 채린을 보며 보호본능을 느꼈다.

“한 채린. 무섭지? 여기다 뽀뽀해. 그럼 내려갈 테니”

그녀는 뾰로통 해졌다. 밤새 소리 울음이 가깝게 들려왔다. 재현이 고개를 돌리는 그녀의 뺨에 입술을 대자 갑작스러운 그의 행동에 채린의 눈이 더욱더 커졌다.

그녀의 볼이 빨갛게 물들어 갔다. 환한 달빛 때문인지 그녀가 더욱더 아름다워 보였다.

“채린아!”

“......”

“채린아! 사랑해. 이 세상에 내가 있는 이유가 마치 너를 사랑하기 위한 게 아닌가 싶구나.”

채린은 재현의 품에 안겼다. 재현도 자신의 말을 들은 누군가의 질투심으로 그녀와의 사랑을 빼앗길까 봐 힘을 주어 채린을 안았다.

그녀의 체온이 얇은 옷을 통해 그대로 전해져 왔다. 채린은 발 뒤꿈치를 들고 그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의 대었다. 두 눈을 감은 채린의 눈꺼풀이 얇게 떨리고 있었다.

재현은 세미나 참석 차 경주를 찾았다. 세미나는 오전 오후로 나뉘어 오전에는 패널들의 주제발표가 있었고 오후에는 토론회를 갖는 형식을 취하고 있었다.

첫날 주제발표가 끝나고 회의장을 나왔을 때는 도시의 불빛이 하나 둘 켜지고 있었다. 유리창을 통해 보이는 불빛들의 흔들림을 보자 그녀를 안고 싶은 욕심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재현은 세미나에 참석했던 일행들과 식사를 마치고 호텔로 돌아왔을 때는 새벽녘이었다. 습관처럼 휴대폰을 켜자 신규 메시지의 경고음이 울렸다.

“저 채린이에요. 메시지 확인하면 전화 주세요.”

재현은 지금 시간을 확인 후 전화 다이얼을 돌렸다.

“깨운 거 아니니?”

“괜찮아요! 어디세요?”

“음! 숙소.”

“술 많이 드셨어요?”

“음.”

재현의 방 밖에서 누군가 초인종을 눌렀다. 재현은 혼잣말처럼 ‘이 시간에 누구야?’하고는

“채린아! 방 밖에 누가 왔나 보다. 다시 전화할 테니 기다려.”

“예.”

재현이 문을 열자 채린이 활짝 웃으며 서있었다. 재현은 놀라움에

“채린아. 너 말도 않고...... 여기까지 어떻게 된 거야?”

“호호호. 우리 교수님! 놀라게 해 주려고 바쁘게 달려왔죠.”

“어서 들어와.”

정말 반가웠다. 생각지도 못했던 그녀가 눈앞에 서 있다니, 재현이 그녀를 만났다는 기쁨에 어쩔 줄을 몰라 하자 채린 역시 재현을 쳐다보며 큰 소리로 웃었다.

“갑자기 보고 싶어 지니까 참을 수가 없었어요.”

채린은 재현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재현은 채린을 안고 곧장 침대로 향했다. 그러지 않으면 그녀의 마음이 변해 금방이라도 방을 나갈 것만 같아서였다.

그녀를 침대에 눕히자 그녀의 떨림이 재현에게 전해져 오고 있었다. 그녀의 입술에는 상큼한 레몬향기가 묻어있었다.

부드러운 그녀의 살결이 재현의 몸 구석구석을 지나갈 때마다 재현에게서도 가느다란 떨림이 계속됐다. 재현은 더 이상 참는다는 것이 무리였다.

아니 신의 뜻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이라 생각되었다. 재현은 조금씩 아주 천천히 그녀의 깊은 곳을 채워갔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재현과 채린은 서로의 갈증을 채우며 절정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잠시 후 그녀의 떨림이 멈추고 두 사람은 완벽하게 하나가 되어 있었다.

다음날 아침, 재현이 잠에서 깼을 때는 채린은 없었다. 언제 일어났는지 그녀가 누웠던 자리는 깨끗이 정리되어 있었고, 재현의 머리맡에 그녀의 향이 담겨있는 메모지 한 장이 바람에 날리고 있었다.

“사랑의 기쁨, 환희에서 오는 절정의 만족감, 채린”

간단히 남긴 그녀의 메모를 보고 채린과 나누었던 사랑이 꿈속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실감하면서 처음으로 편안함을 느꼈다.

재현은 휴대폰을 들고 창 밖을 쳐다보았다. 천년고도(千年古都)의 아침이 밝아오고 있었다.

“한 채린입니다.”

“나야.”

“일어났어요? 생각보다 일찍 일어나셨네요!”

“음! 옆구리가 허전해서 말이야. 더 누워 있을 수가 있어야지."

“미안해요! 말도 없이 떠나......”

“그런 말 안 해도 채린이 맘 아니까 마음 쓰지 마."

“오늘 세미나 걱정 안 해도 되죠?"

“음! 채린이 따라갔다가 이 곳으로 다시 와도 될 정도로 최상의 컨디션이야."

“호호호. 알았어요. 그럼 이만 끊을 께요.”

“운전 조심하고. 도착하면 전화할 께.”

재현은 전화를 끊고 침대 밖으로 나왔다. 창 밖으로 밝아오는 아침의 얼굴을 쳐다보며 담배에 불을 붙였다.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와 재현이 내뿜은 하얀 연기를 몰고 공중으로 사라졌다. 젊은애들이 자기네들끼리 떠들던 사랑한다는 느낌이 이런 것이었나?

사랑은 재현을, 아니 채린은 재현이 그렇게 원했던 모든 것을 변화시키고 있었다.

재현은 경주에서 돌아온 후 더욱더 바빠졌다. 채린에게서도 NBX방송에서 ‘처용무’를 드라마로 만들고 싶다는 제의가 있었다는 한 통의 전화연락만 있었을 뿐이다.

외출했다 돌아오니 채린으로부터 한 장의 짧은 편지가 도착해 있었다.

“햇살이 참 맑습니다. 저 빛이 내 몸을 비추면 금방이라도 부서져 사라질 것만 같아요.

이렇게 좋은 날, 모두가 나가고 저 혼자 호텔에 남아 작업을 하고 있으니 가슴이 답답해옵니다. 이 곳 일정으로 인해 새벽 일찍 출발해 전화도 못했습니다. 곤히 자고 있을 당신을 깨우기가 싫었습니다.

고속도로를 달리는 데 안개가 자욱해 사물을 분간하기가 힘들었어요. 시간이 흐르면서 안개가 걷히고 빈 들판이 드러났습니다. 하지만 달리는 차의 움직임에 따라 바뀌는 창 밖의 아침 풍경들은 마치 그림을 펼쳐놓은 듯 아름다왔습니다.

농가에서는 이른 아침식사를 준비하는지 연기가 피어오르고, 까치밥으로 남겨놓은 감나무에는 빨간 홍시가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 위태롭게 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그 풍경이 얼마나 아름답던지 이 곳으로 오는 내내 당신이 그리웠습니다. 빨리 당신을 보고 싶어요. 꼭 당신의 손을 잡고 그 들판을 걸어보고 싶어요."

채린의 마음이 가득 담긴 편지를 읽고 나자 재현은 그녀 곁으로 달려가고 싶었다. 재현에게는 채린이 그의 곁에 없는 시간들이 마치 천년의 세월이 흐르는 것처럼 긴 느낌이 들었다.

재현에게는 채린이 이 도시에 없는 것만으로도 그녀와 함께 걸었던 거리의 빛깔도 이미 퇴색해 버린 지 오래였다. 매일매일 찾아오는 밤은 재현을 더욱더 외롭게 했다.

한 달 후, 채린이 초췌한 얼굴로 재현의 연구실을 찾았다. 재현이 강의를 마치고 연구실로 들어오자 채린이 소파에 기대 눈을 감고 있었다. 재현이 들어오는 것을 느꼈는지 채린이 자세를 바로 잡으며 어색하게 웃었다.

“언제 왔니?”

“1시간 전에 도착했어요. 어휴! 감독이 이 작가를 얼마나 혹사시키는지 자기 하인 부리듯 이래라저래라 한다니까요. 작가가 아니라 완전히 노예예요. 노예.”

재현은 채린의 푸념에 웃음이 나왔다.

“그렇게 힘드니? 그 감독 이름이나 얘기해봐. 내가 쫓아가서 혼내 줄 테니”

채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리고 기분이 나아졌는지

“그래도 그 감독이 작업한 드라마는 모두 대박이 터졌대요.”

“대박?”

“호호호. 시청률 말이에요.”

“아하. 시청률. 채린아! 그 감독 정말 능력 있는 거 맞니?”

“어떤 능력이요?”

“아니. 한 채린의 작품성은 높이 평가하면서 사람에 대해서는 아무 말이 없는 것 같으니 말이야.”

채린은 재현이 무얼 말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호호호. 그렇지 않아도 작업 시작하기 전에 감독께서 작가가 직접 여주인공역을 맡으면 어떻겠느냐는 것을 거절했어요.”

“정말이야?”

“예. 저만큼 제 작품을 이해하고 완벽하게 소화하기란 힘들겠지만 전 작가지 배우는 아니잖아요. 그들도 자존심이 있는 대.”

채린은 배우들의 원성과 앞으로의 작품에 편견을 갖도록 하기는 싫다며 거절한 이유를 재현에게 설명했다. 재현은 자신의 완벽한 외모를 내세우지 않는 채린이 더욱더 아름다워 보였다.

“일 얘기는 그만하고 우리 나가요.”

채린이 자기 배를 가리키며

“정말 배고파요. 피곤하기도 하고.”

“그럼 빨리 나가야겠다. 나가자.”

“근사한 저녁으로 사주셔야 해요?”

“당연한 말씀. 자! 어디로 모시면 될까요?”

채린은 소파에서 일어나 재현을 따라나섰다. 피곤하다고 하더니 채린은 차에 타자마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재현이 라디오를 켜자 음악이 차 안을 가득 메웠다.

자고 있는 줄 알았던 채린은 생각에 빠진 듯 말없이 창 밖을 쳐다보고 있었다. 식당에 도착할 때까지도 채린은 한 마디의 말도 없었다. 채린이 CD플레이어에 CD를 넣었다. 클래식이 차 안을 메웠다. 그녀는 표정 없는 얼굴로 재현을 쳐다보았다.

“교수님! 나도 결혼하겠다고 아빠한테 매달려 볼까요?”

“음?”

채린은 재현의 반응을 살피다 소리 없이 웃고는 다시 눈을 감아 버렸다. 재현은 채린을 쳐다보았다. 재현도 알고 있었다. 그녀에게는 ‘아빠’라고 부를 아버지가 곁에 없다는 것을....

어떤 이유에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는 몰라도 채린이야말로 神의 축복을 가장 많이 받은 여자란 생각이 들었다.

마치 그리스 신화에서 금방 뛰쳐나온 여신처럼 그녀 자체만으로도 빛이 나는 대, 그녀는 세상의 아름다운 변화와 그 속에서 일어나는 현상에 대하여 느낄 줄 아는 능력 또한 지녔으며, 생각하고 표현하며 그 소중함까지 간직하고 있으니 말이다.

“채린아.”

“......”




차례


2. 이방인

3. 사랑의 기쁨

4. 아름다운 그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