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계절

4. 아름다운 그대

by 금다요

채린은 몸에 닿는 한기(寒氣)로 인해 자신이 몸을 떨고 있는 줄 알았다. 동원은 무슨 말을 해도 채린이 아무 반응이 없자 채린의 팔을 잡고 세게 흔들고 있었다. 깊은 생각에서 깨어난 채린은 눈앞의 현실 속으로 다시 돌아왔다.

“채린아!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는 거야? 내 얘기 듣기는 한 거니?”

“......”

채린이 말 없이 앞만 바라보고 있자 동원은 다시 제자리에 앉아 고개를 숙였다

“피곤해요. 그만 돌아가 주세요!”

“채린아!”

“동원씨! 부탁해요. 다시는 이 곳에 오지 말아요. 앞으로 당신과 마주친다 해도 절대로 아는 척하지 않을 거예요. 안녕히 가세요.”

채린은 동원을 남겨 둔 채 아파트로 돌아왔다. 채린은 깜깜한 거실에 앉아 불도 켜지 않은 채 어둠의 저편을 응시했다. 채린은 아주 긴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기분이었다. 동원 또한 지금 자기 앞에 앉아있었던 채린이 옛날에 그가 사랑했던 채린과는 많이 달라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동원 자신이 그녀 곁에 없었던 시간동안 많이 성숙해 있었고 강해져 있었다.

세찬 바람이 불어와 공원을 한바퀴 돌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동원은 채린과의 이별이 믿어지지 않았다. 오직 채린을 만나고 싶다는 생각만으로 귀국을 결정했던 그였다. 그런데 자신이 생각한 것과는 상황이 너무 달랐다. 동원이 휴대폰을 꺼내 채린에게 전화를 걸었다.

“동원 씨! 정말 저를 사랑한다면 아니 사랑했다면 이제 그만 잊어 주세요”

“채린아!”

“동원 씨! 당신을 사랑했던 그 시간들이 제게는 너무도 소중해 그 추억을 들추어 낼 때마다 가슴이 아파요. 그렇지만 당신을 사랑했던 것을 후회하지는 않아요. 당신과의 사랑은 한 여름에 길을 걷다 마주치는 신선한 바람 같았으니까요! ”

“채린아! 난 네 기억 속에만 존재하고 싶지 않아. 너에 대한 내 사랑은 아직 끝나지 않았단 말야”

“동원 씨! 모든 게 달라져 있다는 것을 그 누구보다도 당신이 더 잘 알잖아요. 엉킨 실타래는 끊어 버리는 게 최선의 선택이예요"

“채린아. 난 시간을 그 때로 되돌리자는 게 아냐. 정말 내 마음을 모르겠니?”

“동원 씨! 이제는 이렇게 힘든 사랑은 그만 하고 싶어요. 아셨어요?”

채린은 단호하게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동원이 아파트가 떠나갈 듯한 목소리로 울부짖었다.

“한 채린! 채린아! 난 결코 너를 포기할 수 없다. 결코......”

전화벨이 다시 울렸다.

“동원 씨! 자꾸 이러면 서로가 힘들어져요. 서로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대 자꾸 마주친들 결과는 똑같을 뿐이예요”

채린은 상대방에서 아무 반응이 없자

“여보세요?”

“나야. 들어 왔으니 됐다. 피곤한대 빨리 씻고 푹 자라.”

“네.”

재현은 수화기를 내려놓으려다

“괜찮지?”

“네. 걱정하지 마세요.”

“음. 잘 자라.”

“네.”

가을비가 세차게 창을 두드리고 있었다. 새벽녘이야 겨우 잠이 든 채린은 빗소리에 눈을 떴다. 거실로 나온 채린은 베란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비의 비릿함이 차가운 바람 속에 섞여 있었다. 저 멀리 시내가 보였다. 도시가 내리는 빗속에 빠르게 침몰하고 있었다. 이렇게 계속 내린다면 우리 모두 노아의 방주에 타야 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재현도 아파트 베란다에 서서 내리는 빗소리를 들으며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커피 한 잔에 빗속의 풍경을 감상하고 있었다. 초인종이 울렸다. 재현이 감시경으로 복도를 살피자 현지가 서있었다. 문을 열자 현지가 안으로 들어왔다.

“차 선배! 집에 있었네요”

“음. 오래간만이구나!”

“좀 바빴어요. 여러 가지로......”

“그랬구나.”

현지는 조금전보다 얼굴 표정이 어두워졌다.

“현지야! 너 나한테 할 얘기 있어서 왔지?

“흠. 어떻게 알았어요? 커피 한 잔 줄래요?”

재현이 커피메이커에서 금방 내린 커피잔을 들고 나오자 헤즐럿 향이 거실에 가득 퍼졌다.

“그렇지 않아도 이 선배가 네 안부 묻는 대 대답을 못해 나만 혼났어.”

“그랬어요? 자주 연락을 드렸어야 했는대, 무용 발표회도 있고 이것저것 준비하느라 바빴어요.”

“음!”

“선배! 저 이번 학기까지만 아이들 가르키고 영국에 갈 거예요. 그동안 로얄발레단에서 몇 번 입단 제의를 해왔거든요. 이 번이 마지막인 거 같아서 가기로 결정 내렸어요”

“그래. 정말 잘 생각했다. 네가 그냥 주저앉아 있는 것 같아 볼 때마다 네 재능이 아깝다고 생각했었는대, 현지 넌 잘할 수 있을 거야”

“고마워요. 선배! 저 송별회 해줄 거죠?”

“그럼! 당연히 해줘야지. 이 선배한테도 미리 말해 놓을 테니 꼭 연락해라”

“네. 그렇게 할 께요.”

현지가 돌아가고 재현은 모두들 제 몫을 잘해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화기를 들었다.

“한 채린입니다.”

“뭐하니?”

“베란다에서 비 내리는 거 구경하고 있어요.”

“모처럼 한가한가 보구나!”

“네.”

“그럼 외출준비 하고 있어. 도착하면 전화할 께"

거리에는 나뭇잎들이 많이 떨어져 있었다. 한차례 찬바람이 불어와 도로 위에서 뒹굴고 있는 나뭇잎들을 몰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곧 겨울이 오겠지.

재현은 자기 자신이 갑자기 센티멘털리스트(sentimentalism)가 된 느낌이었다. 재현의 차가 아파트 단지로 들어섰을 때는 채린이 입구에 나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재현이 크락숀을 울리자 채린이 손을 흔들며 재현에게로 달려왔다.

“날씨가 많이 차가워 졌구나. 도착하면 전화한다니까 왜 내려와 있어!”

채린은 재현의 말에 쑥스러운 듯 웃음으로 대신했다.

“왜 웃어?”

“아니예요”

채린이 재현을 쳐다보면서 계속 웃었다.

“어? 왜 그래! 내 얼굴에 뭐 묻었니?”

“아니요!.”

순간 채린의 얼굴이 빨개졌다. 그 모습을 본 재현은 채린이 자신에게 뭔가를 숨기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얘기하지 않을 거야?”

“정말 아무 것도 아니라니까요.”

재현의 차는 아파트 옆 톨게이트를 통해 고속도로로 진입했다.

“어디 가시게요?”

“음! 꼭 너와 함께 가보고 싶은 곳이 있거든. 그렇게 멀지 않으니까 가는 동안 창 밖으로 펼쳐져 있는 가을 풍경이나 감상해”

재현이 라디오를 켜자 클래식이 흘러 나왔다. 채린은 재현의 말대로 창 밖을 쳐다보았다.

음악이 끝나고 MC의 멘트가 시작되었다.

“오늘 아침, 버스를 타고 출근하다보니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의 옷깃이 모두 세워져 있더군요! 올 들어 처음 찾아온 추위라고는 하지만 절대로 벌써 겨울이 시작된 건 아닙니다. 아직 시간이 있습니다. 옆구리가 허전한 독신 남녀들이여! 이 가을이 가기 전에 추운 겨울날 후회 없이 사랑을 나눌 수 있는 당신의 반쪽을 찾아내길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라디오에서 들려오는 여자 MC의 말에 두 사람 모두 ‘피식’ 웃었다. 고속도로 주변에 펼쳐진 산과 들은 마치 색색의 물감을 뿌려놓은 듯 단풍이 곱게 물들어 있었다.

얼굴에 닿는 바람은 차가웠지만 가을 햇살은 투명해서 세상의 모든 것들이 다 들여다보이는 것만 같았다. 하늘에서는 금방이라도 파란 물이 툭툭 떨어질 것만 같았다.

고속도로를 30여분쯤 달려 두 사람이 도착한 것은 재현과 채린이 어린 시절을 보냈던 옥천의 옛 동네 입구였다. 재현을 쳐다보는 채린의 눈이 커지자

“왜 그렇게 놀라니?”

채린이 말없이 웃었다. 채린이 차에서 내리자 재현도 따라 내리면서 차 문을 잠궜다. 두 사람은 동네로 걸어 들어오며 신작로 옆으로 펼쳐진 논과 밭들을 보았다.

“여기 올 줄은 몰랐어요”

“그동안 너와 함께 오고 싶어 얼마나 참았는지 몰라!”

재현은 마을을 돌아보며 채린에게 이것저것 설명을 해주었다. 어느새 할머니의 민박집 앞까지 걸어왔다.

“채린아. 여기가 옛날에 네가 엄마와 살던 집인 대. 민박집으로 변해 있더구나”

재현의 설명에 채린이 웃었다. 재현은 몰랐다. 채린의 ‘비밀의 화원’과 ‘처용무'가 어디서부터 어떻게 세상의 빛을 보게 되었는지를. 할머니가 방문을 열고 집 밖으로 나왔다. 할머니는 채린을 만난 반가움에

“채린아!”

“할머니!”

채린이 민박집 할머니에게 달려가 할머니 품에 안기자 이번에는 재현이 놀랬다.

“채린아. 너 벌써 이 곳을 다녀간 거야?”

재현의 말에 할머니가 재현을 쳐다보았다.

“채린아! 누구시냐?”

재현은 할머니가 채린을 어떻게 알고 있는 지 궁금했다. 재현은 옛날에 그가 살았던 집을 가리키며

“할머니! 옛날에 저희 가족이 살던 집입니다.”

할머니는 재현과 채린을 번갈아 바라보며 두 사람이야말로 하늘이 점지해 준 배필이란 것을 오랜 세월 살아온 경험으로 보아도 한 눈에 느낄 수 있었다. 할머니는 웃으며

“허! 자기 짝들은 제대로 찾았구먼. 내 정신 좀 보게. 채린아. 어서 안으로 들어가자.”

재현과 채린은 할머니의 뒤를 따라 들어가며

“할머니! 죄송해요. 빈손으로 와서. 미리 여기 온다고 말해 줬으면 할머니가 좋아하시는 약과라도 사오는 건대.”

“별소릴 다하는구나. 네가 이 할미한테 날라다 준 게 얼마나 되는 대. 이 할미는 우리 채린이가 빈손으로 찾아온 게 더 좋구나.”

재현은 두 사람이 마치 친할머니와 손녀간처럼 느껴졌다. 채린이 할머니를 도와 식사를 준비하는 동안 재현은 채린이 쓰던 2층 방으로 올라왔다.

정면에 있는 창을 열자 동네의 전경이 한 눈에 다 들어왔다. 온 마을이 부산해 보였다. 추수가 끝난 논과 밭은 바닥이 휑하니 다 드러나 있었다.

재현은 웃옷 안주머니에서 반지케이스를 꺼냈다. 재현은 그동안 채린이 동원의 일로 힘들어하는 것 같아 그녀의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재현은 심플하게 디자인되어 있는 예물반지를 쳐다보면서 오늘 밤 채린에게 프로포즈를 하리라 생각했다.

아래층에서 채린이 재현을 불렀다. 재현이 1층으로 내려가자 할머니의 식탁에는 식사준비를 한 할머니의 정성이 가득 담겨져 있었다.

“어서 식사해요. 기다리느냐고 시장했죠?”

“아닙니다. 할머니도 앉으세요”

“이 할미는 아침식사를 늦게 해서 아직 생각이 없으니 먼저들 들어요.”

“할머니! 그럼 저 섭섭합니다. 제가 할머니 맘에 안 드는 것 같아.”

“아니 무슨 그런 말이 다 있어요! 그런 생각하지 말고 어서 들어요.”

“그럼. 저희들도 식사를 할 수 없죠. 어서 앉으세요.”

재현은 기어코 자리에서 일어나 할머니를 그들 맞은 편 상석에 앉게 하였다.

“할머니! 저도 손주처럼 편하게 대해 주세요. 그래야만 저도 고향집에 온 기분이 들잖아요.”

“그렇게까지 편하게 말해 주시니. 그렇게 합시다.”

“고맙습니다. 할머니! 이제야 집에 돌아온 기분이 드네요.”

할머니는 재현의 서글서글한 눈매며 성격이 맘에 들었다.

“그런데 무얼 하시는 분인가?”

“예. 학생을 가르키고 있습니다.”

“할머니. 명성대학 교수님이세요”

“어려운 길을 가시는구만”

“아닙니다. 학생들을 가르키면서 제가 더 많이 배웁니다.”

“천직이시네.”

세 사람은 기분 좋게 점심식사를 마쳤다. 채린이 찻잔을 들고 마당에 있는 뜰 마루로 나왔다.

“할머니! 제가 설거지하고 나올 테니 앉아서 얘기들 나누세요”

“아니야. 설거지는 할머니가 할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여기 앉아서 얘기나 하자꾸나.”

“아니예요. 할머니. 제가 빨리 해놓고 나올 께요.”

채린이 찻잔을 놓고 부엌으로 들어가자 재현은 할머니에게 작은 소리로

“할머니! 오늘 저녁에 채린이한테 프로포즈하려고 해요.”

“우리 채린에게 결혼해 달라고 말하겠단 말이지?”

“예. 할머니! 평생동안 채린이 옆에 있고 싶어서요.”

할머니는 채린이 처음 그녀를 찾아왔을 때가 생각났는지 눈시울이 붉어졌다.

“할머니! 왜 그러세요?”

할머니는 눈물을 소매로 훔쳐냈다.

“좋은 소식을 알려주니 기뻐서 그러지. 고맙네. 정말 잘 되었어. 정말......”

“그럼 할머니께서는 저희 결혼에 찬성하시는 거죠?”

“당연하지. 자네 같은 교수를 손주 사위로 얻기가 그리 쉬운 일인가! 내가 왜 반대하겠나! 찬성이네. 찬성일세”

“할머니! 저 잠시 어디 좀 갔다가 올 께요. 채린이한테는 얘기하지 마세요”

“알았어. 마침 오늘이 이 곳 장날이니 설거지 끝나고 이리로 나오면 채린이 데리고 장에 가겠네. 그때 살짝 다녀오시게”

“예. 할머니!”

채린이 수건으로 젖은 손을 닦으며 두 사람이 있는 뜰 마루로 걸어왔다. 채린은 뜰 마루에 앉아 정답게 얘기를 나누고 있는 두 사람을 만족스럽게 쳐다보며

“혹시 두 분이 저만 빼놓고 제 흉보신 거 아니예요?”

“어떻게 알았누. 차 교수. 우리 얘기가 부엌까지 들리던가 보네”

재현과 할머니는 의미심장한 눈짓을 보내며 서로를 쳐다봤다.

“채린아! 마침 오늘이 이 곳 장날이니 우리 구경하러 갈까?”

“네. 할머니.”

채린은 재현을 쳐다보았다.

“우리랑 같이 가시지 않을래요?”

“아니. 봐야 할 책도 있고 강의준비도 해야 하니 두 분이 오순도순 정담 나누며 다녀오세요.”

“그래요. 그럼.”

재현은 할머니가 채린을 데리고 읍내 장에 간 사이에 시내로 들어왔다. 재현은 케잌과 샴페인, 그리고 출발할 때 예약해 놓은 꽃바구니를 찾아 차 트렁크에 실었다. 재현은 이 교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재현의 심장은 사랑하는 여자의 부모님께 결혼 승낙을 받을 때처럼 빠르게 뛰고 있었다. 이 교수의 목소리가 재현의 귀에까지 들려왔다.

재현은 이 교수에게 자신의 계획을 알렸다. 재현의 계획을 들은 이 교수는 진심으로 축하의 말을 해주었다.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기다리겠네.”

전화를 끊은 재현은 한결 기분이 가벼워졌다. 재현은 고속도로를 달려 민박집으로 돌아왔다. 재현은 준비한 것들을 채린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2층 다락방에 옮겨 놓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뜰 마루에 앉아 책을 펼쳤다.

한 무리의 사람이 집 앞을 지나가는지 시끌벅적했다. 잠시 후 할머니와 채린이 양손에 물건을 가득 들고 집안으로 들어왔다. 재현은 아무 일도 없었던 양 능청스럽게 뜰 마루에 앉아 두 사람을 반겼다.

“벌써 다녀오셨어요?”

“여보시게 차 교수. 우리 채린이가 자네가 집에 있으니까 신경이 쓰였던지 자꾸 오자고 조르는 바람에 살 것도 못하고 그냥 돌아왔지 뭔가!”

“할머니. 제가 언제 그랬어요?”

할머니는 채린의 말은 아랑 곶 없이 부엌 쪽으로 걸어가다 말고

“차 교수. 특별히 먹고 싶은 음식은 없나? 있으면 얘기해 보게. 이 할미가 솜씨자랑 좀 해보게.”

“할머니. 전 다 잘 먹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채린이 재현의 말을 이어

“할머니. 아직 시간 있으니 우리 동네 한 바퀴 돌아요.”

“아니야. 장에 갔다와서 그런지 난 좀 쉬어야겠어. 두 사람이나 돌아보고 와”

“할머니. 그럼 쉬세요.

재현과 채린은 민박집을 나와 걸었다. 길옆에는 꽃 분홍색, 흰색, 보라색 코스모스가 가득 피어 있었다. 논 옆 빈 공터에는 갈대들이 무성하게 자라 바람에 하늘거리고 있었다.

재현은 어린 시절 채린의 손을 꼭 잡고 걷던 것처럼 채린의 손을 잡았다. 동네에서 한 10여분쯤 걸어 올라가자 저수지가 보였다.

“채린아! 여기 생각나니?”

“바다요?”

“기억하고 있구나.”

채린이 천진스럽게 웃었다. 두 사람은 저수지 옆 풀밭에 나란히 앉았다.

“그때는 엄청나게 커 보였는대”

두 사람은 일어나 옛날에 놀았던 큰 바위동굴이 있던 곳에서 멈췄다.

“이 곳에 큰 바위가 있었던 것은 생각나니?”

“그랬어요?”

“전 그게 바위동굴이라고는 생각지 않고 그냥 산 속으로 뚫린 동굴인 줄 알았어요.”

“음. 그랬구나.”

두 사람은 동네 이곳저곳을 다니면서 지나간 시간들을 추억했다. 어느덧 해가 저물기 시작했다.

“할머니 기다리시겠어요.”

“음. 빨리 내려가자.”

채린과 재현, 두 사람이 민박집에 도착했을 때는 할머니가 저녁식사준비를 모두 마친 뒤였다. 채린이 할머니의 팔을 붙들고는

“할머니. 같이 준비하자니까요!”

“밥하는 게 무슨 어려운 일이라고, 자리에 앉아라.”

“할머니. 밥은 제가 퍼도 되죠?”

할머니는 유난히도 情이 많은 채린의 맘을 잘 이해하는 터라 두말 없이 채린에게 밥 푸던 주걱을 건네 주었다.

“할머니도 빨리 앉으세요.”

“그러자꾸나.”

할머니가 중앙에 자리를 잡고 앉자 채린이 밥을 퍼 두 사람 앞에 놓았다.

“좋은 시간 보냈니?”

“예. 할머니. 어린 시절로 돌아간 거 같아 기분이 이상했어요”

“차 교수하고 동네 산보를 하니까 그렇게 좋았어?”

“할머니는? 전 할머니랑 산보할 때가 더 재미있고 좋았어요. 할머니가 지나갈 때마다 동네 어른들께서 인사를 하셔 저도 덩달아 그 인사 받았잖아요!”

채린은 재미있어 죽겠다는 듯 즐거워 했다.

“우리 채린이도 거짓말을 다할 줄 아니?”

“정말이라니까요”

채린이 정색하자 재현이 거들고 나섰다.

“정말입니다. 할머니. 한 걸음 걸을 때마다 ‘할머니랑 같이 나왔음 좋을텐데’ 하고 아쉬워하더라구요.”

할머니는 다 안다는 듯이

“우리 채린이라면 그러고도 남지. 암 그렇고 말고.”

할머니도 내심 뿌듯해 하셨다. 풀벌레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온 동네가 밤의 장막 속에 잠겨 있는 듯 했다. 할머니는 피곤하다면서 눈치 빠르게 안방으로 건너가고, 재현은 채린이 설거지를 하는 동안 먼저 2층으로 올라와 그가 세운 계획을 실행키 위해 준비를 하고 있었다.

계단을 올라오는 채린의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채린이 방문을 열자 깜깜한 방 중앙에 케잌이 놓여 있었다. 그 위에 하나의 촛불이 켜져 있었고 그 옆에는 백송이 만큼의 빨간 장미가 놓여 있었다.

“뭐 하시는 거예요?”

재현이 일어나 채린의 손을 잡고 그의 맞은 편에 앉혔다. 그리고 장미꽃 한 송이를 바구니에서 뽑아 그녀 앞에 내밀었다.

“채린아! 사랑해. 불꽃같은 사랑이 어떤 건지는 모르지만 채린이 너만 내 옆에 있어준다면 그 어떤 것도 두렵지 않을 거 같구나. 채린아! 내 아내가 되어 줘. 평생을 너와 함께 하고 싶어.”

재현은 미리 준비했던 반지를 꺼내 채린에게 내밀었다. 그러면서도 재현은 채린이 거절할까봐 두려워했다. 그 자신이야말로 도저히 채린과 재회하기 전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가혹한 神의 형벌이었기 때문이다.

채린은 망설임도 없이 재현에게 손을 내밀었다. 재현은 채린의 허락에 기뻐하면서 채린의 손에 반지를 끼워주었다.

“채린아! 사랑한다.”

채린의 얼굴에 수줍은 듯 잠시 빨개지더니 이내 평정을 찾았다.

“저도 사랑해요.”

두 사람은 서로의 일체감에 감격해 했다. 창 밖에는 달빛이 환하게 방안을 비추고 있었다.

오래간만에 두 사람 모두 만족감에 쌓여 잠자리에 들었다.

재현이 먼저 새소리에 눈을 떴다. 커튼 사이로 아침 햇살이 희미하게 방안으로 새어 들어왔다. 이게 얼마 만인가? 재현은 잠들어 있는 채린에게로 다가와 잠든 얼굴을 쳐다보았다. 재현의 눈에 비친 채린의 얼굴은 평온해 보였다.

계단 끝에서 할머니의 기침소리가 들려왔다. 재현은 채린이 깨지 않도록 일어나 조용히 1층으로 내려갔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음. 차 교수도 편안히 주무셨는가?”

“네. 할머니.”

할머니는 차 교수의 손목을 잡고 집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여보시게 차 교수. 우리 채린이가 승낙했겠지?”

재현이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떡이자 할머니는 박수를 치며 기뻐했다.

“차 교수. 잘하셨네. 진심으로 축하하네.”

“고맙습니다. 모두가 할머니 덕분입니다.”

재현은 진심으로 할머니한테 고맙게 생각했다. 바지 주머니에서 휴대폰이 울렸다.

“차 재현입니다.”

“아! 날세.”

“예. 선배님. 무슨 일 있으세요?”

“음. 자네 어딘가?”

“예. 아직 출발 전입니다.”

“그래. 자네와 나눌 얘기가 있어서 말야.”

“곧 출발하겠습니다.”

재현은 2층으로 올라왔다. 그가 할머니와 얘기하는 동안 채린이 방 정리를 마치고 막 내려오려 하고 있었다.

“일어났구나.”

“예. 잘 주무셨어요?”

“음. 채린아! 곧 출발해야겠다.”

“아침도 안 먹고요? 그럼 할머니께서 섭섭해하실 텐데요!”

“잘 말씀 드렸으니까. 괜찮아.”

두 사람이 1층으로 내려오자 할머니께서 안방에서 상자 하나를 들고 나왔다. 재현이 할머니 손에서 상자를 받아들며

“할머니. 이게 뭡니까?”

“채린이가 홍시를 좋아해서 말야. 조심해서 가져가시게.”

“고맙습니다.”

“어서들 가시게.”

채린은 차에 오르려다 우두커니 서있는 할머니를 보자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지 할머니에게 달려와 할머니 품에 안겼다.

“할머니! 들으셨죠?”

“암. 듣고 말고, 채린아! 축하한다. 우리 채린이 웨딩드레스 입으면 정말 예쁠 텐데.”

“할머니! 저희가 시간 여유를 두고 모시러 올 테니 아무 걱정 마시고 편안히 계세요.”

“아닐세. 차 교수도 바쁠 텐데 그런 수고까지 해서야.”

“괜찮습니다. 저희가 모시러 올 테니 건강 잃지 않도록 조심하세요.”

“알겠네. 조심해서 올라가시게.”

“네. 알겠습니다.”

채린은 차창을 내리고 할머니와의 헤어짐을 진심으로 섭섭해했다. 그런 채린의 맘을 잘 알고 있는 할머니 또한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채린이나 재현에게 가족이라는 일체감을 느꼈다. 채린은 할머니 모습이 점점 멀어지자 혼자 있는 할머니가 걱정이 되었다.

“채린아. 할머니가 그렇게 걱정이 되니?”

“네. 날도 추워지는 대 저렇게 혼자 계시니.”

“걱정하지 마. 할머니한테 이제는 민박일 그만 두시고 동네 어른들과 여행이나 다니시라고 했어. 매달 생활비 드리기로 했으니 그때마다 찾아뵙자.”

“정말이예요?”

채린은 그동안 그녀 자신이 생각지도 못했던 것을 재현이 알아서 신경 써줄 줄은 몰랐다.

“고마워요.”

“고맙긴. 할머니께서 우리 채린에게 베푸신 것을 생각하면 부족하지.”

정말 그랬다. 할머니는 유복자가 하나 있었으나 이 동네로 이사온 지 얼마 안되어 교통사고로 생명을 잃어 이 세상에 홀홀 단신이었던 것이다. 채린은 진심으로 재현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그러지 마라. 그렇게 정색을 하면 오히려 내가 미안하지. 너나 나나 부모님 일찍 돌아가시고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사람들과 가족처럼 생활해 온 게 어디 하루 이틀이니?”

“이해해 줘서 고마워요.”

재현과 채린, 두 사람이 탄 차는 동네 어귀를 돌아 고속도로로 진입했다. 마치 하늘은 세상의 모든 아침을 축복하듯 화창해 창 밖의 풍경이 선명하고 아름다워 보였다.

그동안 재현이, 채린이 각기 꿈꾸었던 사랑이 神의 축복 속에 이루어지려 하고 있었다. 채린과 재현을 서로를 바라보며 존경을 표하였다. 재현은 채린은 아파트에 내려주고 이 교수 댁을 방문했다. 민 여사가 반갑게

“어서 오세요.”

“선배님께서는 어디 계시나요?”

“서재에 계세요.”

“네. 알겠습니다.”

재현이 이 교수의 서재로 들어서자 이 교수가 침통한 얼굴로 재현을 맞이했다. 이 교수는 재현의 손가락에서 빛나는 반지를 힐끔 쳐다보았다.

“무슨 일이세요?”

“음. 동원이 어제 내 연구실로 전화를 했더군.”

“채린의 일로 자네와 할 얘기가 있다고 자네 연락처를 묻더군.”

“저에게 무슨?”

“내 생각으로는 채린이 자기 아이를 가졌었다는 것을 알게 된 거 같아!”

이 교수는 재현 앞에 전화번호가 적힌 쪽지를 놓았다.

“동원이 휴대폰 번호네. 자네가 먼저 연락해서 만나는 게 좋겠어.”

재현은 쪽지를 접어 그의 주머니에 넣었다. 문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린다. 민 여사가 찻잔을 들고 들어와 테이블에 내려놓고 서재를 나갔다.

“선배님께서는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연락해서 만나보겠습니다.”

이 교수는 재현의 손가락에서 반짝이는 반지를 쳐다보았다.

“그건 그렇고. 우리 채린이한테 승낙을 받았나 보군.”

“네.”

재현이 쑥스러워 했다.

“그럼 이제는 자네가 내 사위가 되는 건가?”

“네? 하하하.”

“하하하.”

두 사람은 조금 전의 무거운 분위기와는 달리 재현과 채린의 결혼 얘기가 나오자 분위기는 순간에 밝아졌다. 서재에서 웃음소리가 들리자 민 여사가 문 밖에서 문을 두드렸다.

“과일 준비했으니 거실로 나오세요.”

이 교수와 재현은 거실로 나왔다. 민 여사는 남편 이 교수 옆에 앉으며

“결혼식은 언제로 잡으면 될까요?”

“총장선거 후에 올려야죠!”

민 여사는 남편 이 교수의 얼굴을 쳐다보며

“차 교수님께서 좀 도와주세요.”

“당연히 도와 드려야죠. 걱정하지 마십쇼. 좋은 결과가 있을 테니.”

“아니! 이 사람 큰일 날 사람이네.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선배님께서 모르시는 말씀입니다. 학내에는 벌써 선거 바람이 분지 오래 되었다고요. 정작 당사자만 모르고 있으니 결과가 뻔하죠 뭐.”

재현은 이 교수의 얼굴을 쳐다보고는

“하하하. 농담입니다. 농담.”

“형수님! 아무 걱정하지 마세요. 명성대 차기 총장은 바로 형님이 되실 테니까”

민 여사는 재현의 장담에 안심한 듯 이 교수를 존경의 눈으로 바라본다.

“차 교수, 오늘 보니 정말 큰일 낼 사람이네 그려. 하하하.”

재현은 이 교수 댁을 나와 동원의 휴대폰이 적힌 쪽지를 꺼냈다.

“강 동원입니다.”

“차 재현입니다. 이 교수께서 강 상무가 나를 만나게 해달라고 한다기에 전화했습니다.”

“채린이 문제로 한 번 뵈어야 될 것 같아서요. 오늘 시간이 되시면 뵙고 싶습니다.”

“채린의 일이라면 좋아요. 저녁 7시쯤 시간이 나겠습니까?”

“그럼 7시에 정동에 있는 촉석루에서 뵙기로 하죠!”

“좋아요. 그럼 그때 만납시다.”

재현이 촉석루에 도착한 시간은 동원과 약속한 시간보다 10여분정도 빠르게 도착했다.

동원이 예약을 해놓았는지 안내라고 명찰을 가슴에 단 웨이터가 재현을 룸으로 안내했다.

“여기서 잠시 기다리시면 오실 겁니다.”

“고맙습니다.”

동원은 정각 7시에 룸으로 들어왔다. 철두철미한 자신의 성격을 재현에게 알리기나 하려는 듯 말이다.

“죄송합니다. 제가 직접 찾아뵙는 것이 도리인 줄은 알지만, 호텔 사정상 자리를 오래 비울 수가 없어 이 곳까지 오시라고 했습니다.”

“아! 무슨 사과까지......그런데 강 상무께서 채린이 문제로 나를 만나고 싶다고 했는 대 무슨 일입니까?”

“독일에 있는 동안 채린이한테 여러 차례 편지도 하고 연락도 해보았지만 그 때마다 연결이 잘 안되더군요. 전 채린이가 저를 기다리고 있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귀국해 제일먼저 한 일이 이 교수님을 찾아뵌 거죠. 얼마 전 채린이 아파트에 갔을 때 차 교수님과 채린이 다정하게 찍은 사진을 봤습니다. 나 아닌 다른 남자와 다정하게 찍은 사진을 보는 순간 눈앞이 깜깜했습니다. 차 교수님과 채린이 곧 결혼할 거라는 얘기는 정말 충격이었습니다.”

재현은 조용히 동원이 하는 말을 들었다.

“차 교수님도 저와 채린이 관계를 들어 아실 줄 압니다. 채린이는 제 여자입니다. 옛날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이 상황이 제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는 방향으로 흐르고 있습니다. 차 교수님께서 도와 주신다면 바로잡을 수 있습니다.”

“강 상무. 난 채린이가 다시 고통받는 것은 원치 않습니다. 지금까지도 채린인 많은 고통 속에서 지내왔습니다. 강 상무. 채린의 선택에 따라 주는 게 진정한 사랑이 아닐까요?”

동원은 재현의 얼굴에서 놀라거나 실망했다거나 아무런 표정의 변화가 없자

“교수님. 채린이는 제 아이를 가졌던 여자입니다. 교수님께서는 왜 다른 남자의 아이를 가졌던 여자와 결혼을 생각하는지 궁금합니다.”

“동원 씨! 지금 그 얘기를 꺼내 채린이에 대한 권리주장을 하는 건가요? 한 생명을 잉태했다는 것은 그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그런데 채린이가 임신해 심하게 입덧을 할 때 당신은 무얼 했죠? 강 동원. 당신은 독일로 떠나는 비행기에 탑승하면서부터 채린이를 어두운 고통의 그늘에 던져 놓았어요. 당신 어머니는 또 어떻습니까? 아들 몰래 아들이 사랑하는 여자를 찾아와 부의 힘으로 짓밟아도 됩니까? 당신은 채린이를 사랑할 자격 없습니다. 그리고 왜 남의 애를 가졌던 여자와 결혼하려 하냐고요? 정확히 답변하죠. 다른 여자가 아닌 한 채린이니까 결혼을 생각한 겁니다. 그녀는 내가 살아온 날들이나 앞으로 함께 살아갈 내 인생에 가장 중요한 여자입니다. 그럼 동원씨의 질문에 답이 되겠습니까? 더 이상 할말이 없다면 이만 일어나겠습니다.”

재현은 동원에게 선전포고하듯 자신의 뜻을 말한 후 일어나 문 쪽으로 걸어갔다. 문을 반쯤 열고는

“동원 씨. 이 것으로 채린과 당신의 관계는 끝난 거로 알겠습니다. 다시는 채린이 앞에 나타나지 마시오. 진정으로 채린이를 사랑한다면.”

동원은 재현의 단호한 태도에 절망적이었다. 채린이 자신의 아이를 가졌었다면 분명코 재현이 채린을 단념할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동원은 지하에 있는 stand bar로 내려갔다. 동원을 알아본 지배인이 달려와 고개를 숙였다.

“어서 오세요.”

동원도 지배인의 인사에 고개를 숙여 인사한 후 자리를 잡고 앉았다.

“저랑 한 잔 하시겠습니까? 오늘은 제가 사겠습니다.”

“무슨 말씀을, 제가 사겠습니다.”

“누가 사면 어떻습니까? 다 한 식구인대, 어서 앉으세요.”

지배인이 동원의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지배인은 눈짓으로 아가씨를 불렀다.

“상무님 옆에 앉아.”

“아닙니다. 지배인님. 오늘은 둘이서만 마시고 싶습니다.”

동원이 극구 거절하자 지배인은 아가씨를 다른 룸으로 보냈다. 재현도 동원과 헤어져 크리스탈에 들어왔다. 재현을 알아본 수정이 반갑게 인사를 한다.

“어머 차교수님! 오래간만에 오셨네요.”

“그렇죠? 수정 씨도 잘 지냈죠?”

“네. 안 오셔서 무슨 일이 있으신 줄 알았어요.”

“수정 씨가 그렇게까지 나를 생각해 주는지 몰랐네요. 고마워요.”

“한 작가님도 오시나요?”

“오늘은 약속하지 않았는대요.”

“같이 오시지 그랬어요.”

“수정 씨가 이렇게 아쉬워하는 대 한 작가한테 전화를 해야겠군요. 수정 씨가 보고싶어 한다고.”

수정은 재현의 말에 얼굴이 빨개지며 주방으로 들어갔다. 재현이 항상 앉던 자리에 앉았다. 주방으로 들어갔던 수정이 물 컵을 들고 재현에게로 걸어왔다.

“오늘도 체리티 드실 건가요?”

“오늘은 시원한 맥주 한 잔 하고 싶은 대요.”

잠시 후 수정이 맥주 3병을 재현의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재현이 3병째 거의 마셔가고 있을 때였다.

크리스탈 문이 열리고 이 교수와 현지가 들어왔다. 재현을 알아본 현지가 걸어왔다.

“차 선배. 여기에 있었어요?”

“아! 현지야.”

“아니 자네. 왜 여기에 있나?”

이 교수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채린이는 같이 안 왔나?”

“네. 오늘은 저 혼잡니다.”

이 교수와 현지는 재현의 맞은 편에 나란히 앉았다. 재현이 수정을 불렀다.

“이 선배! 뭘로 드시겠어요?”

이 교수가 테이블 위에 있는 빈 맥주병을 보며

“맥주 몇 병 더 주시고 안주는 현지가 좋아하는 거로 할까?”

“네. 역시 이 선배 밖에 없다니까요!”

수정이 이 교수의 주문을 적은 후

“고맙습니다. 잠시 기다려 주세요.”

수정이 주방으로 걸어갔다.

“현지 일정이 빨라져 총장선거 다음 날 영국으로 출발해야 한다네. 그래서 저녁이나 같이 먹을까 해서 왔지.”

“그랬었군요. 그럼 형수님도 모시고 나오지 그랬어요.”

“그럴걸 그랬나.”

“아니예요. 출국하기 전에 제가 댁으로 갈 께요.”

“현지야. 꼭 그렇게 해라. 그냥 떠나면 형수님이 섭섭하실 거야.”

“알았어요.”

이 교수가 갑자기 생각난 듯

“아쉽구나. 현지가 재현의 결혼식을 못보고 떠나는 것이.”

순간 현지는 술이 확 깨는 것 같았다.

“차 선배, 정말 결혼해요?”

“음!”

“언제요?”

“이 선배 총장선거 치루고 5월쯤 결혼할까 해. 현지는 참석하지 못하겠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내년 봄에 한국 공연예정이 잡혀 있다니까 또 모르죠. 확실하게 대답은 못하겠네요. 지금 상태로는 영국에 건너가 그 곳에 적응도 해야 하고, 괜히 간다고 했나봐요.”

“하하하. 현지 너 갑자기 떠나려고 하니까 자신이 없어진 거는 아니니?”

“선배님두 참.”

“그래. 현지의 축하를 받고 싶었는 대. 어쩔 수 없지 뭐. ”

현지가 갑자기 생각난 듯 재현에게 물었다.

“차 선배, 신부는 누구죠? 역시 한 채린 씨인가요?”

이 교수는 현지가 알고 있는 것에 얼마 전 재현이 말한 게 거짓이 아니었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음. 그 한 채린이야.”

현지가 손을 내밀었다.

“축하해요. 차 선배. 신부감은 꼭꼭 숨겨 놓고 이 후배한테는 인사 안 시킬 거예요?”

“그럴 리가.”

재현은 무심히 창 밖을 쳐다보았다. 어느 새 희미하게 새벽빛이 거리의 주인이 되어 오가는 이의 움직임을 살피고 있었다. 카운터 위 벽시계도 밤의 시간을 지나 다음 날을 가리키고 있었다.

“이 선배, 그만 가봐야겠어요.”

“그래야겠다. 현지는 재현이와 같은 아파트니까 함께 택시 타고 가라. 나는 내가 알아서 갈테니.”

현지는 다른 때보다 이 교수가 자기 주량을 넘어선 것이 걱정되었다.

“임마. 난 걱정하지 마. 자네들이나 잘들 가라구.”

세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나 거리로 나왔다. 밤 공기가 많이 차가워져 있었다. 재현은 괜찮다는 이 교수를 대기하고 있던 택시에 태우고 그 차가 출발하자 그는 현지와 다른 택시를 잡았다.

“차 선배. 행복해요?”

“음.”

“하늘만큼 땅 만큼?”

“그 둘을 합쳐도 모자랄 만큼, 현지야. 난 믿는다. 우리 예쁜 후배도 곧 나처럼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예쁘게 살 거라는 걸.”

재현이 현지를 쳐다보자 그의 어깨에 기대 잠이 들어있었다.

“어쩐지. 오늘 지나치게 마시더라”


방송사마다 프로그램 개편이 시작되었다. NBX방송도 시청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NBX방송 측에서는 채린의 ‘처용무’로 승부수를 던지기로 했다.

그 덕분에 채린의 ‘처용무’는 황금시간대로 방영시간이 잡혔다. 그 사실을 연락 받고 채린이 인사차 NBX방송국에 들리자 ‘처용무’의 연출을 맡았던 이원우 감독은

“한 작가. D-day가 오늘인대 맘 단단히 먹어요. 안 그럼 내일 심장병으로 병원에 입원하게 될지도 모르니까.”

“전 이 감독님만 믿어요. 잘 부탁합니다.”

이 감독은 채린의 겸손함에 무거웠던 기분이 풀리는 듯 했다.

“한 작가. 분명 첫 방부터 대박 터질 테니 기다렸다가 술이나 한 잔 사고 가지 그래요!”

“예. 걱정하지 마세요. 그래서 오늘 들어온 거니까요.”

이 감독은 까마득히 후배인 조연출자에게 자기 옆에 채린의 자리를 만들도록 했다. 채린이 자리를 잡고 앉자 이 감독은 채린이 배우가 아닌 것에 대하여 무척 아쉬워했다.

“정말이야. 한 작가 같은 사람이 배우를 해야 하는 대, 정말 연기에는 뜻이 없는 거요?”

“네. 할 줄 아는 게 글 쓰는 거밖에 없거든요.”

“너무 겸손해 하면 그 것도 교만이라는 거 알죠?”

채린은 이 감독의 말에 대답대신 웃음으로 답했다. 채린은 시간이 가까워지자 그녀 자신도 모르게 초조해졌다.


“그렇게 떨지 않아도 됩니다. 분명 ‘처용무’는 그 이름 값을 할겁니다.”

“감사합니다.”

시간이 되자 채린을 위해 옮겨 놓은 대형TV 화면에 한자로 ‘처용무’란 글자가 나타나고 최 혁진이 부른 주제가 ‘님이시여’가 흐르기 시작했다.

채린은 자신의 심장박동이 빨라지고 있는 것을 느꼈다. 채린은 40여분이 그렇게 긴 줄을 처음으로 느꼈다.

다음 회 예고편이 흐르고 실내에 불이 켜지자 이 감독을 비롯한 ‘처용무’ 관계자 모두가 기립박수로 채린과 이 감독을 축하해 주었다.

“한 작가! 제 연출 실력이 어때요? 맘에 들어요?”

채린은 진심으로 이 원우 감독의 뛰어난 연출실력에 탐복을 하고 있었다. 촬영현장에 같이 있으면서 이 감독만큼 채린의 작품을 이해하고 핵심을 찾아내는 사람은 드물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채린과 이 감독 일행이 방송국 로비로 나오자 마주치는 사람들마다 축하의 말을 전했다. 채린은 재현에게서 전화를 받았다.

“채린아. 축하한다.”

“봤어요?”

“그럼. 누구 작품인대.”

“고마워요.”

“지금 이동하는 거니?”

“네. 첫 방 결과가 좋다고 이 감독께서 한 잔 사야 한답니다.”

“그럴 줄 알았지. 지금 그쪽으로 이동 중이니까. 자리 잡히면 장소 알려 줘.”

“정말이요?”

채린은 뜻밖에 재현이 자신의 일을 인정해 주는 것 같아 몹시 기뻤다.

“그렇게 좋니?”

“그럼요.”

이 감독이 채린의 걸음을 재촉했다.

“한 작가. 그만 통화하고 갑시다.”

“네.”

이 감독은 채린이 자기 옆으로 가까이 오자

“부군 될 사람인가 봅니다.”

“네.”

“합석하자고 할 걸 그랬네요.”

채린이 웃으며 이 감독에게 말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지금 이쪽으로 오고 있다니까.”

“아! 그렇습니까? 한 작가는 정말 여러 가지로 축복 받은 사람입니다. 부군 될 차 교수께서 한 작가 일을 인정해 주시니, 차 교수 오시면 차기 작품에 대하여 협의해 봐야 겠습니다.”

“네에? 호호호.”

두 사람은 기분 좋게 방송국을 나왔다.

“이 감독님! 오늘 회식 장소가 어딘지 아세요?”

“한 작가는 걱정하지 말고, 아참 내 정신 좀 보게. 차 교수께는 우리 방송국 정면 우측으로 보면 골목이 보이는 대 그 끝에 ‘아리랑’이란 식당이 있으니 그쪽으로 오시라고 해요.”

“네. 하필이면 왜 ‘아리랑’이래요? 호호호. 혹시 술 마시다 계산하기 싫어 중간에 혼자만 도망가지 말라는 뜻이 담겨 있는 거 아니예요?”

이 감독은 채린의 정확한 해석에 소름이 끼쳤다. 작가로서의 직관이 뛰어나다는 것은 촬영하면서 이미 느끼고 있었지만, 한 번도 가보지도 않은 식당의 이름을 놓고 단 번에 그 의미를 집어내는 것이 채린이 예사로운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다시 증명하는 것이었다.

채린은 이 감독의 얼빠진 듯한 표정을 보고 웃으며

“왜 그러세요? 제 해석이 너무 어이없는 주장이었나요?”

“아! 절대로 그런 거 아니니 오해하지 말아요.”

채린은 재현에게 만남의 장소를 알려주고 이 감독과 함께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 별실로 안내된 채린은 이 총장의 참석에 놀라워했다. 그리고 ‘처용무’의 총책임자인 최 필종 이사의 섬세한 배려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감사한 것은 오히려 저희 쪽입니다. 한 작가 같은 인재를 이 총장께서 발굴하시고 이 자리까지 오게 하셨는 대 당연히 모셔야죠. 그리고 참석해 주셔 정말 감사드립니다.”

“불러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끝까지 우리 한 작가 지켜봐 주시고 부족한 점 있으시면 지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 총장이 얘기하는 동안 재현이 들어와 채린 옆에 앉았다. 이 총장은 재현을 옆으로 불러 최 이사에게 인사를 시켰다.

“명성대 차 재현 교수십니다.”

재현과 최 이사는 서로가 고개를 숙이며 정중히 악수를 교환했다.

“명성대 차 재현입니다.”

“이번 ‘처용무’의 총책임자인 최 필종 이삽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한 작가의 부군되실 분이라니 정말 부럽습니다. 하하하.”

“잘 부탁드립니다.”

채린은 이 총장과 재현이 함께 한 것만도 기쁜 대 자신의 작품에 대하여 긍정적인 평가가 계속 나오고 있다는 것에 기쁨을 감출 수 없었다.

채린은 처용무의 방영 편수가 늘어갈수록 他 방송사로부터 차기 작품의 우선권 요구로 인해 골머리를 썩고 있었다.

다음날부터 재현과 이 교수는 바빠지기 시작했다. 총장 선거일이 10여일 밖에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채린은 이 교수를 돕고 싶었지만, 그녀 자신이 정면에 나타난다면 오히려 이 교수에게 해를 끼칠까봐 먼 거리에서 그들의 선거운동을 도왔다.


선거일 아침, 다른 때보다 일찍 깬 채린은 베란다로 갔다. 커피향이 바람을 타고 어디론가 날아갔다. 하늘에서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올 해 들어 첫눈이었다. 채린은 재현에게 전화를 걸었다.

“첫눈이예요”

“그렇구나. 첫눈 축하를 해야 하는데 어쩌나! 오늘 하루는 정말 지루하겠구나”

“천하의 차 교수께서 그렇게 마음 약한 얘기를 다하시고 오래 살만 하네요”

“뭐라고? 하하하. 채린이 너.”

“잘 될 거예요. 마감시간에 맞춰 크리스탈에 가 있을 께요. 이 교수님 모시고 오세요”

“그래. 저녁에 보자”

재현은 외출준비를 마치고 이 교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선배님! 저 지금 출발하니까 준비하세요. 좋은 꿈 꾸셨죠?”

“아주 편안히 잤으니 걱정 말게.”

“예. 그럼 지금 출발합니다.”

재현과 이 교수는 투표 마감시간이 다가오면서 더욱더 긴장했다. 벽시계가 정각 6시를 가리키자 두 사람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재현아. 그동안 수고했어.”

“저보다는 선배님이 더 수고하셨죠!”

“나야 당사자니까 수고랄 게 뭐 있나! 정말 고맙네. 재현이 네가 있어서 할 수 있었어.”

“분명 좋은 결과가 있을 겁니다.”

“.......”

두 사람은 대학본부 건물을 나와 크리스탈로 향했다. 크리스탈 문을 열자 창 옆에 채린이 민 여사와 함께 앉아 있었다. 이 교수는 민 여사와 채린을 번갈아 쳐다보면서

“당신이 어려운 걸음을 했구만.”

민 여사는 남편 이 교수의 말에 채린을 쳐다본다.

“안 나온다고 했더니 채린이가 집으로 찾아와 따라 나왔어요.”

“당신도 채린이한테는 어쩔 수 없네 그려. 하하하하”

민 여사는 채린의 손을 꼭 잡고 웃는다.

“그럼요. 전 당신보다 우리 채린이가 더 좋거든요. 설마 당신 질투하시는 것은 아니시죠?”

“질투? 하하하”

이 교수는 민 여사 옆에 앉아 만족스럽게 재현과 채린을 쳐다본다. 오랜 결혼생활 동안 한 번도 다툼 없이 살아온 부부를 보면서 재현은 지금 자기 옆에 앉아 있는 채린의 소중함을 다시 한 번 느꼈다.

“형수님! 정말 잘 나오셨어요. 오늘 첫눈이 온 걸 보면 분명 형님께 좋은 결과가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고마워요. 다 차 교수님 덕분입니다”

“별말씀을 다하십니다. 당연히 장인이 되실 분인 대 사위가 도와 드려야 되지 않겠습니까?”

“네?”

네 사람은 긴장했던 시간들을 잊은 채 한 순간에 분위기를 밝게 바꿔 버렸다. 때로는 상대방의 얘기를 진지하게 듣다가 분위기가 어둡다 하면 다른 상대방이 유머스런 말로 분위기를 단 번에 바꿔 버려 그들을 쳐다보는 이들의 마음까지 흐뭇하게 해주었다.

민 여사가 벽시계를 바라보더니

“시간이 이렇게 됐나? 여보! 이제 그만 둘이 데이트하게 일어서요.”

부인의 말을 들은 이 교수는 짓궂게 채린과 재현을 쳐다본다.

“당신 무슨 말을 하는 게요? 이렇게 좋은 자리를 벌써 파하자는 게요?”

“젊은 사람들 기분도 생각해 주세요!”


“형수님! 걱정하지 마세요. 앞으로 평생 살 사이인대 오늘 하루 데이트 못한다고 해서 어떻게 되겠습니까?”

민 여사가 애써 미안함을 감춘다.

“형님! 너무하십니다. 아! 젊은 사람들 맘도 이해해 주셔야지. 이렇게 계속 붙들고 있을 겁니까”

이 교수는 재현의 말에

“아니 이 사람 보게. 귀한 내 딸 훔쳐 가는 주제에, 우리보고 빨리 나가라고 하는 건가?”

“아!. 그 말씀은 왜 하십니까? 하하하”

네 사람은 오늘에 감사하고 만족해하며 기분 좋게 웃었다.

“오늘 많이 긴장했었나 보네. 우리 이쯤에서 퇴장할 테니 젊은 두 사람은 즐거운 밤 보내게”

“예. 형님! 아니 장인 어른!”

“예끼. 이 사람”

이 교수와 민 여사는 재현과 채린만을 남겨 둔 채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아닙니다. 같이 나가시죠”

“그럴까?”

밖으로 나온 네 사람은 각기 자신들의 짝과 팔짱을 낀 채 여유를 누리며 거리를 걸었다. 시간은 어느새 어둠을 몰고 와 빛의 세계로 빠르게 스며들고 있었다.

이 교수와 재현이 참석하고 교수 및 이사들이 모두 참석한 회의에서 정식으로 이 교수가 명성대학 제76대 총장으로 당선됨을 확정했다. 이 교수는 회의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로부터 축하의 박수와 환호를 받았다.

한 때는 채린의 일로 위기에 몰리기도 했지만 그의 높은 학식과 인품은 학생들과 다른 교수, 그리고 이 교수를 아는 모든 이들을 감동케 한 것이다.

“축하합니다. 이 총장님!”

“수고했어. 차 교수.”

두 사람은 서로를 쳐다보며 결과에 흡족해 했다.

다음날, 이 교수는 동원으로부터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교수님! 저 동원입니다.”

“알고 있네.”

“총장에 당선되신 거 축하드립니다.”

“고맙네.”

“제가 독일에 있는 동안 저희 어머니와 채린이 사이에 있었던 일에 대해서 어머니한테 다 들었습니다. 그 얘기를 듣고 보니 도저히 채린이 앞에 나타날 수 없어 교수님께만 전화드립니다.”

“그래. 어머니께서는 건강하시고?”

“병원에 입원해 계십니다. 그동안 아버지로부터 받은 정신적인 스트레스가 커져 그 화로 얼마전에 쓰러지셨습니다.”

“저런...상심이 크겠구만.”

“교수님께도 뭐라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부디 너그럽게 용서해 주시길 바랄 뿐입니다.”

“다 지나간 일이야. 동원이 자네도 하루속히 지난 날은 잊고 새롭게 출발하게.”

“고맙습니다. 그리고 총장님 취임식 전날 영국으로 출장을 가게 되어 취임식에는 참석치 못할 거 같습니다. 다녀온 후 찾아 뵙겠습니다.”

“알겠네. 조심해서 다녀오게.”

이 교수는 현지에게서도 축하의 전화를 받았다. 그리고 현지도 동원이 탑승하는 영국행 2시발 KAL기 편으로 영국으로 떠난다는 소식을 듣고 이 교수는 은근히 한 쌍의 연인이 다시 탄생하기를 기대했다. 모두가 제 자리를 찾았다.

온 세상의 하얀 겨울은 모든 이들에게 희망을, 때로는 절망을 안겨 주면서 시간 속으로 묻혀 가고 있었다.

대학 내 나무마다 아니 온 건물이 하얗게 변해 버린 12월 11일, 이 교수는 펑펑 쏟아지는 탐스런 눈의 축복을 받으며 당당히 명성대학 제 76대 총장으로 취임했다.

취임선서를 하는 이 교수의 눈에도 그 모습을 바라보는 민 여사와 채린의 눈에서도 기쁨의 눈물이 흘렀다. 취임식이 끝나고 대학 구내식당에 마련한 연회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 총장은 민 여사와 함께 일일이 참석자들을 찾아다니며 총장으로서의 첫 임무를 수행하였다. 이 총장은 연회가 막바지에 이르자 재현과 채린을 마이크 앞으로 불렀다.

“여러분! 잠시 제 말에 귀를 기울여 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오늘은 제 인생에 있어 가장 기쁘고 뜻 깊은 두 가지 일이 일어난 날입니다. 첫 번째는 제 모교였던 곳의 총장에 취임했다는 것과, 나머지 한 가지는 지금 내 옆에 서있는 이 두 분에 관한 일입니다. 한 분은 이 대학의 교수시고......”

이 총장은 채린 곁으로 걸어와 채린의 손을 잡고 정다운 눈빛을 보내며

“한 채린 양은 여러분들도 알다시피 현재 작가로 활동 중입니다. 한 때는 이 명성대학에 학생이기도 하였습니다. 저나 우리 집사람에게는 이 두 사람 모두 절대로 없어서는 안될 소중한 사람들입니다. 그런 이 두 사람이 5개월 후 한 가정을 꾸미기로 약속을 했답니다. 모두 축하의 박수로 이 두 분의 미래를 축복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재현과 채린이 인사를 하자 여기저기서 셔터가 터지며 박수와 환호가 들려왔다. 이 총장의 취임식에 참석했던 기자들은 유명인이었던 채린의 결혼 발표로 인해 특종기사를 잡기 위해 그들의 주변을 분주하게 왔다갔다했다.


다음날 그들의 결혼 소식은 한 주간의 특종이 되어 세인들의 관심을 끌었다. 결혼발표 후 채린과 재현은 외출을 삼갔다. 갑자기 그들 앞에 나서는 기자들의 셔터소리에 재현이 난감해 하자 채린이 내린 극약처방이었다. 재현과 채린이 집에서 꼼짝도 하지 않는 만큼 두 사람과 관련한 기사는 추측에 의해 보도될 뿐이었다.

재현은 밤낮 없이 일속에 묻혀 사는 채린을 쳐다보면서 결혼날짜를 앞당기기로 맘먹고 이 총장을 찾았다. 이 총장 또한 채린의 건강을 염려하던 터라 쾌히 본인의 일정을 조정하기로 했다.

꽃샘추위가 잠시 주춤거리고 성미 급한 개나리꽃이 벌써 만개한 곳도 있었다. 재현과 채린은 결혼식 준비를 위해 분주하게 왔다 갔다 하고 이 총장은 난생 처음 주례를 맡게 되자 원고 준비에 고심을 하고 있었다.



바람도 잔잔하고 햇살도 유난히 따스한 봄이었다. 꽃향기가 그윽한 대학 내 정원 로즈마리에서 봄의 여신만큼이나 아름다운 채린과 한 여자만을 기다리고 사랑해온 재현의 결혼식이 거행되었다.

맨 앞자리에는 재현과 채린, 두 사람이 결혼하기 며칠 전 옥천으로 가 그들이 약속한 대로 함께 온 할머니가 흐뭇하게 그들을 쳐다보고, 그 옆에는 민 여사가 두 사람의 부모를 대신해 기쁨의 눈물을 연신 손수건으로 닦아내고 있었다.

주례를 보는 이 총장 또한 그 힘겨운 시간을 당당하게 맞서 이겨내고 자신의 앞으로 걸어오는 두 연인의 모습을 진심으로 축복했다. 두 사람이 서로 예물반지를 나눠 가질 때는 끝내 손수건으로 눈물을 찍어냈다.

예식이 모두 끝나고 사회자의 행진 소리에 맞춰 재현과 채린은 하객들 사이에 놓여져 있는 꽃길 위를 걸었다.

재현의 과 학생들이 마련한 축포가 울리고 비둘기들이 정원 위를 날았다. 하늘도 새 부부의 탄생을 축하하는 양 구름 한 점 없는 가을하늘처럼 파란 색을 띠고 있었다.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채린과 재현이 민 여사한테로 걸어왔다. 그리고 채린이 민 여사의 품에 안겼다.

“고맙습니다.”

민 여사는 채린의 볼을 쓰다듬으며

“우리 채린이 정말 아름답구나. 이 세상에서 우리 채린이보다 예쁜 사람은 없을 거야. 정말 축하한다”

“사모님이 더 아름다우세요.”

“채린아! 잘 다녀와. 도착하면 꼭 전화하고”

“네.”

채린은 민 여사의 손을 맞잡고 그녀의 볼 위로 흐르는 기쁨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이 총장도 하객들에게 인사를 마치고 그들 곁으로 돌아왔다.

“아니 당신. 이렇게 기쁜 날 왜 눈물은 보이고 그래요.”

민 여사가 손수건으로 자신의 눈물을 닦으며

“너무 기뻐서 저도 모르게 자꾸 눈물이 흐르잖아요.”

“이제 그만 떠나도록 하지.”

재현은 이 총장과 손을 맞잡고

“다녀와서 찾아 뵐 께요”

이 총장은 재현의 등을 두드려 주며

“우리 채린이 잘 부탁하네. 앞으로 채린이 눈에 눈물이 흐를 때는.....알지?”

“예. 명심하겠습니다”

“자네만 믿네. 잘들 다녀오게”

채린이 두리번거리자 이 총장은 채린이 할머니를 찾는 것을 눈치 채고

“채린아! 할머니는 먼저 출발하셨어. 여독이 풀리지 않아 피곤해 하시는 것 같아 먼저 모셨다”

“그랬군요.”

“지체하지 말고 어서 출발들 해.”

“다녀오겠습니다”

“그래. 추억거리 많이들 만들어 오시게”

“네.”

재현과 채린은 고개를 숙여 인사 후 차에 올랐다. 이 총장과 민 여사는 두 사람이 탄 차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 자리에 서서 손을 흔들었다. 채린은 결혼 준비 때문에 긴장했었는지 차에 타자마자 졸기 시작했다.

“채린아. 힘들게 참지 말고 자둬. 도착하면 깨워 줄 테니.”

“미안해요. 새 신랑 옆에 신부가 졸기나 해서.”

“걱정하지 말고 자. 그동안 쉬지도 못했으니까 피곤한 게 당연하지.”

“그럼 조금만 잘 께요.”

채린은 차가 고속도로로 진입하자 의자에 기대 눈을 감았다. 재현이 창문을 내리자 봄바람이 차안으로 불어왔다.

재현은 잠든 채린의 얼굴을 보면서 그 자신이 꿈을 꾸고 있는 기분이었다. 그녀에게 프로포즈를 하기 위해 맘 졸이며 달리던 이 길이 그녀와 신혼여행을 떠나는 길이 될 줄이야.

두 사람이 탄 차가 할머니의 민박집에 도착했을 때는 오후의 햇살이 더욱더 아름다운 빛을 더하고 있었다. 할머니는 내내 두 사람이 도착하기만을 기다렸는지 차가 집 앞에 멈추자 할머니가 방에서 급하게 나왔다.

할머니는 피곤해 하는 채린이 안타까웠다. 처음 채린과 만났을 때가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재현은 채린을 깨워 차에서 내리게 했다. 채린은 할머니를 보자 정신이 들었는지 할머니 품에 안겼다.

“할머니! 오늘 피곤하셨죠?”

“아니야. 오늘처럼 기분 좋고 몸이 가벼운 적이 없었어.”

채린은 할머니의 손을 잡고 안으로 들어갔다. 재현은 가방을 챙겨 2층 채린이 쓰던 방으로 옮겼다. 재현은 아래층으로 내려가려다 멈칫했다.

채린의 가방 중 하나가 유난히도 무거웠기 때문이었다. 재현은 웃으며 혼잣말로

“금덩이라도 싸들고 왔나! 왜이리 무거워!”

재현은 방문을 열고 아래층으로 통하는 계단을 살핀 뒤 채린의 가방을 열었다. 가방에는 채린의 옷들과 소지품이 들어 있었다. 지퍼를 닫으려다 가방 밑을 살폈다.

그 곳에는 마무리 단계만 남은 원고뭉치들이 있었다. 재현은 제일 위에 있는 원고뭉치를 들었다. 맨 앞장에는 가제라고 명시된 ‘아름다운 그대’라는 제목이 써 있었다.

재현은 가슴이 뭉클했다. 동원의 귀국으로 마음고생이 심했을 텐데 그녀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잊지 않고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것이. 재현은 원고뭉치를 원래대로 제자리에 놓고 가방의 지퍼를 닫았다.

재현이 1층으로 내려오자 할머니와 채린은 뭐가 그리 즐거운지 연신 서로을 쳐다보며 큰 소리로 웃고 있었다. 할머니는 재현을 부르며

“차 교수, 이리 오시게.”

재현이 채린 옆에 자리를 잡고 앉자 할머니는 둘을 번갈아 쳐다보며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할머니! 그렇게 좋으세요?”

“그럼. 이 할미는 이제 할아버지가 계신 저 세상으로 간다고 해도 여한이 없어.”

“무슨 그런 섭섭한 말씀을 하십니까? 전 이제야 할머니가 생겨 사랑도 받는구나 실감을 하고 있는 대, 앞으로는 그런 말씀 절대로 하시면 안됩니다.”

“정말이예요. 할머니! 그런 말 자꾸 하시면 이제는 채린이가 귀찮아진 거로 알고 다시는 이 곳에 오지 않을 거예요.”

“미안하네 차 교수. 이 할미가 괜한 말을 했네. 내 사과함세”

“네. 다시는 그런 말씀하시면 안됩니다.”

“며칠동안 쉬지도 못하고 힘들었을 텐데. 올라가서 좀 쉬지.”

“네. 그럼 쉬세요.”

재현과 채린은 할머니가 낮잠을 자는 동안 바깥구경을 하기로 했다. 분홍색, 노란색, 오렌지색 등 여러 가지가 섞여 저녁하늘을 물들이던 노을이 산등성이에 걸쳐 있었다.

재현은 채린의 손을 잡고 조금씩 밤의 전령사가 먼저 와 자리잡은 들길을 걸었다. 간간이 부는 바람이 그들의 다정한 모습을 시샘하듯 채린의 머리카락을 휘 젖곤 하였다.

재현은 채린의 손을 더욱더 세게 잡았다. 재현은 눈앞에 펼쳐져 있는 들판을 쳐다보았다. 둥그렇게 동네를 감싸고 있는 잠든 산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채린을 쳐다보았다. 끝.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