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바랜 나이, 힘을 주세요.”
<당신에게>는 <어느 날 나에게 편지가 왔다>에서 보냈던 편지 내용을 바탕으로 쓴 글입니다. 편지를 읽는 모두에게 진심이 전해지길 바랍니다.
당신에게
벌써 2015년이 다 지나가고 있네요. 다시 오는 새해가 설레기도 하고, 찬바람이 마음마저 훑고 가는 듯 허하기도 합니다. 올 한해 잘 보내셨나요? 이맘때면 한참 먼일 같은데 눈 깜박하기도 전에 벌써 한 살 먹을 때가 왔구나 해요. 어느 때보다 나이를 곱씹는 때이기도 하고. 내 나이가 벌써? 놀라곤 했는데, 언제부턴가 올해 내가 몇 살이었지? 묻고 있더라고요. 시간이 더 흐르면 어떤 말이 떠오를지 모르겠네요.
당신은 나이가 빛바래져 간다고 이야기하셨지요. ‘빛바랜’이란 말에서 당신의 시간이 어디쯤 와 있는지 짐작해봅니다. 제가 아직 살아보지 못한 삶이어서 펜을 들기가 조심스럽지만, 용기를 내요. 실은 제가 당신의 마음을 다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 또한 그 시간을 밟아 보아야 아, 이런 거였구나. 깨닫겠지요. 다만, 요즘 제가 느낀 마음을 나눠 보려고 합니다.
사방에서 꽃이 피어나는 봄, 온통 초록으로 물드는 여름. 이제껏 사계절 중 곳곳마다 생명력이 터져 나오는 계절은 단연 봄과 여름이라 여겼습니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오래도록 깨지 못한 고정관념이란 사실을 깨달았어요. 제게 가을은 색 바랜 낙엽이 뒹구는 계절이었고, 겨울은 앙상한 나무를 연신 볼 수밖에 없는 계절이었지요. 푸른빛이 잿빛으로 변하는 시간인 줄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올가을엔 이상하게도 색색으로 단풍든 나무와 어느 계절보다 높고 푸른 하늘이 눈에 들어왔어요. 여름의 노을보다 가을의 노을이 더 짙고 깊은지도 처음 느꼈고, 낙엽을 밟을 때마다 나는 바스락 소리가 이렇게 기분 좋았나 했지요. 심지어 가을은 추수하는 황금빛 계절이기도 합니다. ‘천고마비’라는 말이 생겨난 때이고 말이에요. 이토록 매력적인 가을의 정취를 그동안 어떻게 놓칠 수 있었을까요?
그렇게 가을에 취해 있다 보니 어느새 겨울이 왔어요. 여느 때와 달리 추위에도 마른 가지를 이고 묵묵히 서 있는 나무가 무척 단단해 보이더라고요. 거기에 눈꽃이 곱게 앉은 걸 보니 어쩐지 포근해지는 기분이 들었어요. 또, 하루는 시장을 지나가는데 사람들이 시끌벅적 모인 곳에 김이 펄펄 나는 거에요. 무엇인가 살펴봤지요. 그 자리에선 동지 팥죽을 팔고 있었어요. 솥에 팥죽이 뜨겁게 끓고 있으니 참 먹음직스러웠죠. 질세라 너도나도 하나씩 사서 가더군요. 그 광경이 하도 정겨워 사진 찍고 싶은 걸 꾹 참았습니다. 겨울은 따뜻함이 피어나는 계절이네 했어요. 왜 이제껏 어느 때보다 따스해지는 겨울을 보지 못했을까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올해엔 수줍게 분홍빛을 띠던 봄을 만났고, 푸르름에 넋을 잃게 하는 여름을 마주했고, 황금빛으로 치장한 가을을 알았고, 새하얀 눈꽃과 훈훈한 겨울을 맞았습니다. 잿빛으로 변하는 계절이라는 것은 올해 제겐 없었습니다. 늘 저마다의 색으로 자신을 뽐내는 시간이 있었을 뿐이죠.
그래서 감히 이야기 드리고 싶어요. 당신의 시간은 여전히 당신만의 색으로 물드는 중입니다. 설사 낡고 오래된 시간이라도 누가 흉내 낼 수 없는 깊이가 있는 것이지요. 다가오는 2016년, 어떤 삶을 보내고 싶으신가요?
늘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미나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