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을, 꿈을 그리기 시작하다.
34살에 인스타툰을 시작했다.
초등학생 때부터 그림을 좋아했다. '웬디 수녀의 유럽 미술관 산책'이란 책은 지금도 기억이 날 정도로 여러 번 읽었다. 특히 후기 인상파를 좋아했고, 그중에서도 빈센트 반 고흐를 좋아했다. 아니, 사랑했다. 요즘 말로 하면 소위 '고흐 덕질'을 했었다. 꼬깃꼬깃 코 묻은 용돈을 고흐 그림엽서 사는데 다 쓰기도 하고, 공부방 선생님 집에 있었던 고흐 책을 빌려서 (빌리고 보니 영문책이었다.) 영어사전을 찾아가면서 겨우 겨우 한 페이지씩 읽기도 했다.
미술을 시킬 만큼 집안이 넉넉한 편은 아니었던 터라, 고등학생 때 "엄마, 나 미술이 하고 싶어요."라는 비장한 나의 꿈은 엄마의 "돈이 없어서 못 시켜준다. 미안하다."로 허무하게 끝이 났다.
그렇게 '그림과 가까이 있는 삶'과는 영원히 멀어지는 줄만 알았다. '적성과 흥미'가 아닌 '현실'에 맞춘 대학 전공 진학, 그 전공에 맞춘 직업들로 이어지는 뻔한 삶을 살았다. 그러다가도 이따금씩 참을 수 없는 '무언가'를 느끼곤 했다. 서른이 되는 해에는, 제때 가지 못한 미대가 (서른임에도 불구하고) 너무 너무 너무 가고 싶어서, 가진 학사 학위를 기반으로 갈 수 있는 석사를 한참 찾아보기도 했다. 미술과 깊은 연관이 있는 전공일 것, 학비가 비교적 저렴하고, 대중교통으로 통학할 수 있는 곳을 찾다 보니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이론과 전문사(한예종에서는 대학원을 '전문사'로 칭한다)로 좁혀졌다.
한예종 입시를 전문으로 하는 미술 학원에 상담 갔을 때, 원장님의 말씀.
"나이도 서른에, 미술 관련 학사가 있으신 것도 아니고, 포트폴리오도 없고, 한 해에 고작 10명 남짓 뽑는데... 현실적으로 어려워 보이네요."
좋아하는 그림, 좋아하는 작가, 만 산처럼 쌓여가던 어느 날. 평소에 좋아하던 인스타그램 인스타툰(인스타그램에 카툰을 올리는 것) 작가님의 글이 올라왔다.
'찌그러진 인스타툰 클럽 모집!'
< 이런 분을 찾아요! >
- 인스타툰을 그리고 싶지만 해본 적이 없거나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사람
- 내 일상 이야기가 재미가 없는 것 같은 사람. 평범한 일상을 흥미로운 이야기로 만드는 법이 궁금한 사람
죽이 되든 밥이 되든 1편을 완성해 올릴 사람!
'인스타툰...? 내가 만화를 그릴 수가 있을까? 만화는 사람을 그려야 하잖아. 사람 그리기가 어렵다고 들었는데.. 나 같이 그림 그리기를 안 해본 사람도 인스타툰을 시작해 볼 수 있을까?'
설레는 마음만큼 커지는 걱정의 목소리였다. 댓글로 수업을 듣고 싶은 이유를 쓰면, 작가님께서 하나하나 다 읽으시고 선정을 하신다 하셨다. '선정이 안 될 수도 있으니까, 일단 남겨라도 보자.'라고 생각하며 며칠 내내 고심하여 댓글에 수업 신청 이유를 적었고, 현실에 파묻혀 고새 잊고 있었다. 그러다가 받은 합격 문자. 인스타툰 수업에 선정되셨다는 문자 1통이, '너 이제 그릴 수 있어!'라고 말해주는 것 같아 벅차오르기까지 했다.
대망의 첫 번째 수업날. 인스타'툰'이다 보니 그림, 만화적 요소가 더 중요할 거라고 생각한 내 생각도 잠시. 작가님께서는 그림보다 글이 더 중요하다고 말하셨다.
'글이라면, 브런치에 신나게 썼던 경험이 있으니 나도 조금은 해볼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글 콘티'라는 것에 대해 배우고, 10컷 안에 담을 이야기를 써가기 시작했다. 글이라고 자신만만했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내가 독자에게 말하고 싶은 메시지를 10컷에 맞춰서 쌓아 올려나가는 과정은 보통일이 아니었다. 그간 희희낙락하며 쉽게 쉽게 인스타툰을 보던 내 모습 뒤로, 이렇게 고뇌하고 고민하는 인스타툰 작가님들이 계셨을 줄은.. 막상 직접 해보니 정말, 정말로 어려웠다.
그렇게 3주간의 수업을 마치고, 마지막주 수업의 마지막 과제는 '인스타툰 1화 완성하기'였다. 어렵게 완성한 글콘티를 전부 엎어버렸다. 내가 기획한 콘티가 나에게 전혀 와닿지 않았기 때문이다. 콘티의 내용은 요즘 빠진 '일기 쓰기'에 대한 내용이었다. 글에서 그림으로 옮겨서 그리다 보니, 모르는 사람끼리도 만나면 자기소개를 하는데, 일단 첫 화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이 툰이 어떤 툰인지 먼저 소개해야 하는 거 아닐까? 하는 생각이 계속 들었기 때문이다.
그럼 내 인스타툰의 이름은?
지금 브런치 작가 이름은 파랑이다. 정말 단순한 이유지만, 파란색을 매우 사랑하기 때문이다. 파랑툰? 파랑? 파란색을 좋아하는 툰인가? 그건 아니었다.
나는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다.
하루하루 느끼는, 내가 생각하는 모든 것들을 표현하고 싶어.
이건 그냥 하루하루.. 가 모여서 인생이 되잖아.
인생툰? 너무 진지하고 거대한 느낌.
인생은 뭘까? (<- 실제로도 달고 사는 말버릇이다.)
그렇게 로뎅의 생각하는 자세로 한참을 있다 보니 뒷목이 뻣뻣해서 고개를 들었다. 우리 집 거실에 걸어둔 '파도'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그래, 인생은 파도다.
내 인생을 그래프로 표현하면, 이리 저리 흔들리는 곡선이라고 생각해 왔다. 그 모양은 '출렁출렁'. 작은 출렁도, 큰 출렁도 모두 의미가 있었다. 결국엔 모두 아름다웠다. 이렇게 생각하니 인생이 파도처럼 느껴졌다. 태풍 속의 파도도, 잔잔한 파도도, 모두 아름답지 않은 파도가 없었다. 그래. 인생은 파도다. 그렇다면 내 만화는 파도툰이다!
'헉. 그런데... 파도를 그림으로 어떻게 표현하지...?'
내 핸드폰 사진첩 속엔 내가 찍은 무수한, 아름다운 파도들이 넘쳐났다. 이걸 만화에 넣자...! 그래서 완성된 파도툰 1화. 한 컷 그리는데 한 시간이 넘게 걸렸다. 누군가는 10초면 볼 이 열 컷이 총 10시간 이상을 녹여낸 결과물이다. 누가 1장당 만원, 아니 천 원을 준다고 한 것도 아니고, 누가 시킨 것도, 부탁한 것도 아니었다.
10시간 이상 앉아서 머리를 쥐어뜯고, 턱을 삼백 번쯤 괴고, 머릿속에 있는 그림이 내 손가락으론 표현이 안 돼서 좌절을 하고.. 이 모든 과정이 재밌었다면 믿겠는가? 어처구니없게도 사실이다. 그리는 행위가, 그림을 그리는 주체가 ‘나’라는 것이, 눈물 나게 행복했다.
'나, 그리고 싶었네. 그림을 그리고 싶었어.'
34살에 깨달은 사실이다.
+ 파도툰은 여기를 눌러서 보실 수 있습니다.
인스타그램 : @pado.toon
- 파랑 -
아이패드로 그림을 그리고 있으면, 한 시간이 무섭게 훅 갑니다. 뒷목도 아프고, 어깨도 굳고, 종아리가 땅땅해질 정도로 몸도 피곤해집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결과물이 엉성한데, 분명 '허접한데', 그게 그렇게 제 마음에 들 수가 없습니다. 보고 또 봅니다. 참 이상합니다. 이상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