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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성범 Sep 25. 2023

감정의 지휘자는 도파민

성공 경험이 Big Future를 만든다.

시끌벅적 아이들 떠드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남자아이들 목소리가 운동장 쪽에서 들립니다. “곧 퇴근 시간인데, 왜 집에 가지 않았을까?” 걱정스러운 마음에 그들을 향해 다가갔습니다. 4학년 남자아이들입니다. 축구공에 마음이 점령당했을까요? 제가 가까이 다가오는 줄도 모릅니다.   

  

축구하는 아이들을 보면 떠오르는 단어가 있습니다. 황농문 교수가 주장했던 ‘몰입’입니다. ‘몰입’은 마음이 온통 한 곳에 쏠려 자신의 존재를 잊고 있는 경지를 말합니다. 아이들 마음이 작은 축구공 하나에 온통 쏠려 학원, 집에 가는 것도 잊어버립니다. 지금 그들의 가방에서는 전화벨이 연신 울리고 있습니다. 누구일까요? 틀림없이 학원을 독촉하는 부모님의 전화입니다.    

  

그들을 돌려보낼 시간입니다. 집에서 걱정도 하지만, 조금 있으면 날이 어두워집니다. 안전을 위해서라도 돌려보내야 합니다. 아이들을 불러 세웠습니다. “곧 깜깜해진다. 집에 가야지” 아이들이 표정이 어두워집니다. 조금 전 행복했던 모습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습니다. 주섬주섬 자기 물건을 챙기는데 걱정 가득한 얼굴입니다. 학원 숙제를 하지 않았을까요?      


아이들의 돌아가는 뒷모습에서 문뜩 한 사람이 떠올랐습니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주장한 영국의 법학자 제러미 벤담입니다. 그는 저서 ‘도덕과 입법의 원리 서설’에서 자연은 인류를 고통과 쾌락이라는 두 주인의 지배하에 두었다고 말했습니다. 고통과 쾌락이 인간의 모든 행동을 지배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고통은 뭔가를 싫어하는 것, 피하고 싶은 것이지요. 아이들의 고통은 숙제, 학원, 부모의 잔소리 등입니다. 쾌락은 하고 싶은 것, 좋아하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축구, 게임, 놀이 등입니다. 한자로 고통은 不快, 쾌락은 快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快를 추구하고 不快를 멀리합니다.     


그렇습니다. ‘쾌’와 ‘불쾌’에 따라 우리의 모든 행동은 결정됩니다. 다만 ‘쾌’와 ‘불쾌’가 언어를 만나면서 수십 가지 감정으로 분류됩니다. 이것은 마치 스펙트럼과 같습니다. 빛이 스펙트럼을 통과하면 빨간색, 파란색 등 여러 가지 색이 나타납니다. 마찬가지로 ‘쾌’와 ‘불쾌’가 언어를 만나면서 수십 가지 감정으로 분화되었습니다.     


쾌가 언어라는 스펙트럼을 통과하면서 기쁨, 즐거움, 사랑, 행복 등으로 구분되고, 불쾌가 스펙트럼을 통과하면 화, 수치심, 불안, 두려움 등으로 구분됩니다. 이것을 긍정적 감정, 부정적 감정이라고 부릅니다. 이것들은 음식과 같습니다. 음식 종류에 따라 음식 맛이 다르듯 감정들도 쾌, 불쾌의 맛이 조금씩 차이가 있습니다.  

    

다시 4학년 남자아이들 이야기로 돌아가 볼까요? 아이들은 쾌를 추구하고 불쾌를 회피합니다. 놀이, 스포츠, 게임, 맛있는 음식 등은 쾌라는 감정이 일어나는 행동입니다. 반면에 공부, 독서, 잔소리 등 불쾌라는 감정이 일어나는 일을 싫어합니다. 어쩌면 이것은 당연한 결과입니다. 쾌를 가져오는 일은 하고자 하고, 불쾌를 가져오는 일을 회피하려는 것은 우리의 본성입니다.    

  

결국 아이를 움직이게 하는 근본적인 힘은 쾌와 불쾌에 있습니다. 쾌의 알람을 켜지게 하는 행동은 반복하게 되며, 그렇지 못한 행동은 회피합니다. 축구는 아이들 뇌에 쾌라는 알람을 켭니다. 그런데 수학 문제집을 열자마자 쾌라는 알람이 숨어버립니다. 대신 고통이라는 화재경보기가 아이들 뇌에서 울리게 되지요.   

   

우리는 놀기의 전문가이다.
우리는 공부를 잘할 수 있도록 설계되지 않았다.   

  

왜 그럴까요? 어려운 문제지만 간단한 답을 찾으면 인간 유전자 설계도입니다. 건물을 짓기 위해서는 건축 설계도가 필요합니다. 수학, 영어를 잘하기 위해서도 어떤 설계도가 필요하겠지요. 다만 우리 유전자에는 놀기, 먹기, 대화하기 등은 잘할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지만, 수학, 영어를 잘할 수 있는 설계도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진화를 연구하는 학자들의 생각에서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들의 주장에는 공통점이 하나 있습니다. 인류 역사는 600만 년 이상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기나긴 기간 동안 매일 벌어졌던 익숙한 일들이 있습니다. 먹기, 놀기, 싸우기, 대화하기, 표정 읽기 등입니다.  

   

이런 익숙한 일에 대해서는 우리 모두 전문가 수준입니다. 이제 갓 태어난 아이도 엄마의 표정에서 감정을 읽을 수 있습니다. 종이 상자 몇 개만 주면 유치원 아이들은 놀기의 천재가 됩니다. 수학 대신 체육을 한다는 담임 선생님의 이야기에 교실은 환호성으로 몸살을 앓습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일은 누구나 잘할 수 있고, 쾌를 느끼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생각해 볼까요? 아이들이 교실에서 떠들었습니다. 담임 선생님이 화가 나셨습니다. 아이들에게 이야기합니다. “오늘 체육 대신 수학이다.” 그 한마디에 교실은 초상집이 됩니다. 이곳저곳에서 아이들의 볼멘소리가 들립니다. “선생님 잘못했어요. 떠들지 않겠습니다. 체육 시간 지켜주세요.”     


이제 우리 아이들이 공부를 싫어하는 이유가 보입니다. 아이들이 공부를 싫어하는 이유는 아이들의 잘못이 아닙니다. 공부가 쾌를 일으키지 않아서입니다. 부모에게 놀이를 잘할 수 있는 설계도는 물려받았지만, 공부를 잘할 수 있는 설계도는 물려받지 못했습니다. 물론 부모님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모의 부모에게서 공부를 잘할 수 있는 설계도를 물려받지 못했습니다.    

 

몇천 년 즉 오랜 세월이 지나면 어떻게 될까요? 언젠가는 공부를 놀이처럼 할 수 있는 날이 올 수도 있습니다. 지금처럼 공부하는 시간이 늘어나고, 놀이하는 시간이 줄어들면, 몇천 년 후 놀이보다 공부가 더 쉬울 것입니다. 그 시대 아이들은 놀이는 싫어하고 종일 공부만 하려고 할 것입니다. 엄마 잔소리는 무엇이 될까요? ‘공부 좀 해라’에서 ‘놀기 좀 해라’가 되겠지요.    

 

놀기, 싸우기, 이야기 등 우리가 쉽게 할 수 있는 것들은 우리 몸에 장착된 유전 설계도 영향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떠오릅니다. 공부라는 유전적 설계도가 없는데, 공부를 좋아하는 아이들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종일 책만 읽으려는 아이들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우선 떠오르는 생각은 ‘의지’입니다. 자신의 미래를 위해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한다는 ‘의지’가 공부를 열심히 하는 아이로 만들 수 있습니다. 풍부한 지식을 갖추기 위해 책을 열심히 읽어야 한다는 ‘의지’가 책을 좋아하는 아이를 만들 수 있습니다. 다만 의지가 높은 아이는 부모의 희망일 뿐 우리 주변에서 그런 아이를 만나기가 쉽지 않습니다.     


요즘 5학년 몇 명의 아이들을 만나고 있습니다. 흔히 말하는 ‘학교폭력’ 가해 아이들입니다. 이들은 1교시가 되면 어김없이 저를 찾아옵니다. 저는 명상, 상담, 감사 글쓰기로 이 아이들의 감정과 행동 변화를 돕고 있습니다. 제가 하는 활동이 이 아이들의 감정선을 움직이고 있나 봅니다. 20분 일찍 교장실 문 앞에서 저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아이들이 처음 온 날을 선명하게 기억합니다. 얼음같이 차가워진 이 아이들 마음을 무엇으로 녹일 수 있을까? 고민 끝에 칭찬이라는 방법을 선택했습니다. 이 아이들이 받았던 칭찬을 이야기하다 보면 마음 문을 열 수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지금까지 받아 본 칭찬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말은 무엇이니?” 8명 중 2명이 고개를 숙입니다. 기억나는 칭찬이 없다고 말을 합니다.  

   

그 순간 저는 눈물을 흘릴뻔했습니다. 아이들에게 미안했습니다. 우리 어른들의 잘못이구나. 선생님, 부모님 잘못이구나. 칭찬 한마디 듣지 못해 가슴이 얼음이 되었구나. 얼음조각이 되어 친구에게 상처를 남겼구나. 그런 너희들 마음도 모르고 우리는 너희에게 꼬리표를 붙였어. ‘문제아’라고. 진짜 문제아는 저를 비롯한 부모님, 선생님이었습니다. 우리 어른들이었습니다.    

 

오늘은 1월 2일, 이 아이들과 새해 소망을 나누었습니다. 우선 이 아이들의 마음 안정을 위해서 복식 호흡으로 명상을 잠깐 했습니다. 아이들이 눈을 감습니다. “숨을 들이마실 때는 공기를 사랑으로 생각하렴.” 아이들이 숨을 깊게 들이마십니다. “숨을 내쉴 때는 내 안의 나쁜 것들이 밖으로 나가는 거야.” 아이들이 숨을 길게 내쉽니다. 이러기를 몇 번 반복했습니다.     

 

“자 이제 소원을 말해보자.” 이 아이들이 다시 한번 저를 깜짝 놀라게 합니다. 8명 중 5명이 공부를 잘하고 싶다고 이야기합니다. ‘공부를 잘하고 싶어요’라는 소망은 이 아이들뿐만이 아닙니다. 2학년 교실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소원을 들어주는 요정이 있다면 빌고 싶은 소원은 무엇이니?” 22명 중 13명이 공부를 잘하고 싶다고 이야기합니다. 가슴 아픈 현실입니다. 공부가 뭐길래 너도나도 잘하고 싶어 합니다.   

  

우리 5학년 아이들의 새해 소망 ‘공부를 잘하고 싶어요.’가 이루어질 수 있을까요? 단지 소망으로 끝날 확률이 높겠지요. 특별한 프로그램으로 훈련되지 않으면 이 아이들의 새해 소망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소망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단단한 의지와 노력이 필요합니다. 다만 의지는 지갑의 돈과 같습니다. 아무리 두둑한 지갑이라도 며칠이 지나면 얇아집니다. 의지도 그렇습니다. 공부를 열심히 해야겠다는 단단한 의지도 시간이 지나면서 쉽게 무너집니다.     


의지에 관련된 경험을 이야기해 볼까요? 저는 전라남도 영광에 있는 작은 시골 고등학교에 입학했습니다. 지금은 명문고등학교가 되었지만, 제가 입학할 당시에는 소수만이 대학을 진학하는 이름 없는 학교였습니다. 제가 이름 없는 시골 고등학교에 진학한 이유는 가난입니다. 가정 형편으로 도시에 있는 고등학교로 진학할 수 없었습니다.     

 

고등학교 시절 기억나는 경험 중 하나는 빡빡머리입니다. 재학시절 빡빡머리를 했던 친구들이 여러 명 있었습니다. 필자도 그중 한 명이었습니다. 공부를 열심히 해야겠다는 단단한 의지를 붙잡기 위해서입니다. 빡빡머리 효과가 있었을까요? 저의 동기생 중 대부분이 대학에 진학했고, 지금은 사회의 이곳저곳에서 훌륭한 리더로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머리카락을 빡빡 밀었던 이유는 생존과 관련되어 있었습니다. 열심히 공부하는 것 외에는 가난을 벗어날 수 있는 길이 없어서입니다. 이것을 사람들은 ‘Hungry 정신’이라고 표현합니다. 어쩌면 ‘Hungry 정신’은 의지를 유지하고 키울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입니다. ‘Hungry 정신’ 대부분 사람이 자수성가를 이루었습니다.     


요즘 아이들에게 ‘Hungry 정신’을 요구하면 어떨까요? 엄마, 아빠의 힘들었던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열심히 공부하라고 말하면 어떨까요? 엄마, 아빠는 힘든 조건에서도 열심히 공부했는데, 이 좋은 환경에서 공부를 왜 안 하느냐고 설득하면 어떨까요? 이런 말을 해서도 안 되지만, 한다고 해서 달라지지 않습니다. 이런 말은 아이와의 관계를 단절시키는 지름길일 뿐입니다.    

 

다시 우리 5학년 아이들의 이야기로 돌아가겠습니다. 공부를 잘하고 싶다는 아이들의 소망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요? 아이들에게 열심히 공부하겠다는 의지를 높이는 방법은 없을까요? 어쩌면 그것의 답도 ‘쾌’와 ‘불쾌’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공부에서 기쁨, 즐거움이라는 ‘쾌’를 느낄 수만 있다면 공부에서 도주하지 않겠지요. 공부를 그만하라고 애원해도 아이들은 책에서 손을 놓지 않을 것입니다. 

    

‘감정’의 지휘자는 도파민이다.    

 

다행히 ‘쾌’라는 감정은 뇌 과학의 발전으로 그 실체가 서서히 밝혀지고 있습니다. 쾌는 신경전달물질에 의해 만들어지고, 신경전달물질 중에서 ‘도파민’이 그 핵심을 이루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르게 표현하면 ‘쾌’의 지휘자는 도파민이라는 것입니다. 지휘자가 오케스트라를 움직이듯 도파민이 쾌와 불쾌를 지휘한다는 의미입니다.     


여기서 잠깐 신경전달물질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우리 뇌에는 1,000억 개의 신경세포가 있습니다. 공부, 기억, 감정 등 사람의 모든 마음과 행동은 신경세포 연결의 결과입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초등학교 1학년 담임 선생님의 얼굴을 떠올려보세요. 이름은 잊어버렸어도 얼굴 모습은 어렴풋이 떠오릅니다.  

   

이 현상이 신경세포 연결입니다. 수백 개, 수천 개의 신경세포 연결로 초등학교 담임 선생님 얼굴이 떠오르는 것입니다. 생각도 그렇습니다. 지금 저는 황룡강이 바라보이는 들판에서 글을 쓰고 있습니다. 한적한 곳에 차를 멈추고, 노트북을 꺼냈습니다. 차창 밖으로는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습니다. 비를 보면서 ‘주단’이라는 단어가 떠올랐습니다. 지금 내리는 비가 가을을 맞이하기 위한 주단입니다.  

   

이런 생각을 만들려면 몇 개의 신경세포가 연결되어야 할까요? 아마 셀 수 없겠지요. 수십, 수백만 개의 신경세포가 연결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신경세포 연결 모습을 좀 더 구체적으로 그려보겠습니다. 신경세포와 신경세포가 연결은 섬의 이동과 비슷합니다. 이쪽 섬에서 저쪽 섬으로 이동하기 위해서는 배가 필요합니다. 신경세포도 그렇습니다. 신경세포와 신경세포가 연결되기 위해서는 배와 같은 그 무엇이 필요합니다. 그것을 신경전달물질이라고 부릅니다.   

  

현재까지 세로토닌, 코르티솔, 도파민, 아드레날린 등 40여 개의 신경전달물질이 발견되었으며 ‘쾌’와 ‘불쾌’를 결정짓는 감정의 지휘자 신경전달물질은 도파민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신경세포 연결에서 도파민의 양이 많아지면 기쁨, 즐거움 같은 ‘쾌’라는 감정을 느끼며, 도파민의 양이 적으면 우울, 무기력 등 ‘불쾌’의 감정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도파민이 감정의 지휘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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