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레트로는 언제 태어나는가

by NAHDAN

Chapter 3

레트로는 언제 태어나는가



전통사회에는 레트로가 없다


역설적이게도, 과거를 그리워하는 레트로 현상은 전통사회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근대 이전의 사회에서는 시간이 순환적이고 변화가 완만했기 때문에, '옛날'과 '지금'의 감각적 차이가 크지 않았다. 레트로가 탄생하기 위해서는 현재와 과거 사이의 명확한 단절과 차이에 대한 인식이 필요한데, 이는 전통사회의 시간 감각과는 맞지 않았다.


전통사회에서 시간은 농경주기, 종교의례, 왕조의 교체와 같은 순환적이고 반복적인 형태로 경험되었다. 할아버지의 삶과 손자의 삶 사이에 물질적, 감각적 환경의 급격한 변화가 거의 없었다. 같은 도구를 사용하고, 같은 노래를 부르고, 같은 음식을 먹고, 같은 옷을 입었다. 물론 변화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 속도와 범위가 개인이 한 생애 안에 뚜렷하게 인식할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다.


역사학자 키스 토머스(Keith Thomas)는 "전통사회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할아버지가 살았던 세계와 크게 다르지 않은 세계에 살았다"고 지적했다. 이런 환경에서는 특정 시대의 감각적 특징을 구별하고 그것을 향수의 대상으로 삼는 레트로적 감성이 발달하기 어려웠다.


전통사회에서 과거를 회상하는 방식은 레트로와는 질적으로 달랐다. 그것은 주로 '전통(tradition)'이나 '유산(heritage)'의 형태를 띠었다. 전통은 과거의 관습과 가치를 현재에 지속적으로 유지하는 것으로, 과거와 현재 사이의 단절보다는 연속성을 강조한다. 반면 레트로는 현재와 과거 사이의 감각적, 정서적 거리를 전제로 하며, 단절된 과거의 특정 요소들을 선택적으로 복원하고 재해석한다.


민속학자 앨런 던데스(Alan Dundes)는 "전통 문화에서 과거는 보존하고 지켜야 할 대상이었지만, 레트로에서 과거는 소비하고 재해석해야 할 대상"이라고 지적했다. 이 차이는 시간에 대한 근본적 인식의 변화를 반영한다. 전통사회에서 과거는 권위의 원천이자 영속적 진리의 저장소였다면, 모던 사회에서 과거는 '다른 시간', '지나간 순간'으로 객체화된다.


역사학자 프랑수아 아르톡(François Hartog)는 이를 '역사성 체제(regimes of historicity)'의 변화라고 불렀다. 전통사회의 역사성이 과거를 통해 현재를 이해하는 '과거 중심적(passéist)' 체제였다면, 근대 이후의 역사성은 미래를 향한 진보를 중심으로 하는 '미래주의적(futurist)' 체제로 전환되었다. 레트로는 이러한 근대적 역사성이 확립된 이후에야 가능한 현상이다. 역설적이게도, 미래 지향적 진보의 관념이 자리잡은 후에야 과거를 향한 노스탤지어적 시선이 발생할 수 있었던 것이다.


더욱이, 레트로가 탄생하기 위해서는 물질문화와 미디어의 발달이 필요했다. 특정 시대의 스타일, 디자인, 감각적 특징이 충분히 기록되고 재생산될 수 있어야 했다. 사진, 영화, 녹음기술, 대량생산 상품과 같은 근대적 미디어와 기술의 발전은 특정 시대의 감각적 특성을 포착하고 보존하는 것을 가능하게 했다. 이런 기술적 조건이 없었던 전통사회에서는 레트로 문화가 발달하기 어려웠다.




속도의 시대, 뒤처지는 감정


레트로의 탄생은 산업혁명과 근대화가 가져온 급격한 변화의 속도와 깊은 관련이 있다. 18세기 말부터 시작된 산업혁명은 인간의 생활환경을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속도로 변화시켰다. 증기기관, 전기, 공장식 생산, 철도, 전신과 같은 혁신적 기술들은 사람들의 일상 경험을 급격히 변형시켰다.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Eric Hobsbawm)이 '이중 혁명(dual revolution)'이라 부른 산업혁명과 프랑스 혁명의 영향으로, 19세기 유럽 사회는 전례 없는 속도로 변화했다. 이 변화는 물질적 환경뿐만 아니라 사회 구조, 정치 체제, 문화적 감수성에까지 광범위하게 영향을 미쳤다. 한 세대 내에도 생활방식과 감각적 환경이 완전히 달라지는 경험이 일반화되었다.


이러한 급격한 변화 속도는 인간의 감정과 인식이 따라가기 어려운 상황을 만들어냈다. 독일의 철학자 헤르만 뤼베(Hermann Lübbe)는 이를 '현재의 축소(contraction of the present)'라고 불렀다. 그에 따르면, 변화의 속도가 빨라질수록 '현재'로 인식되는 시간적 범위는 줄어들고, 더 많은 것이 더 빨리 '과거'가 된다. 이는 일종의 '문화적 반감기(cultural half-life)'의 단축으로, 특정 기술이나 문화적 형식이 '현재적'으로 느껴지는 기간이 점점 짧아지는 현상이다.


사회학자 하트무트 로자(Hartmut Rosa)는 이러한 현상을 '사회적 가속화(social acceleration)'라고 개념화했다. 그는 세 가지 차원의 가속화를 구분했다: 기술적 가속화(기계와 통신의 속도 증가), 사회적 변화의 가속화(제도, 가치, 생활방식의 빠른 변화), 그리고 생활 리듬의 가속화(개인의 경험 속도 증가). 이 세 차원은 상호 강화 작용을 통해 현대 사회의 전반적인 가속화를 이끈다.


문제는 이러한 기술적, 사회적 가속화에 비해 인간의 감정적, 심리적 적응 속도는 상대적으로 느리다는 점이다. 현대인은 끊임없이 새로운 기술, 새로운 환경, 새로운 사회적 규범에 적응해야 하는 압박을 받지만, 감정적 애착과 의미 형성은 시간이 필요한 과정이다. 이 괴리가 일종의 '시간적 소외(temporal alienation)'를 낳는다.


독일의 문화비평가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은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에서 이러한 변화가 인간의 경험과 인식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했다. 그에 따르면, 근대 기술은 전통적인 '경험(Erfahrung)'을 파편화된 '체험(Erlebnis)'으로 대체했다. 전자가 느리고 깊은 축적의 과정을 통해 형성되는 것이라면, 후자는 빠르고 표면적인 자극의 연속이다. 이런 체험의 파편화는 과거와의 유기적 연결을 약화시키고, 현재와 과거 사이의 단절감을 강화한다.


이러한 단절감과 소외는 19세기 말부터 문학과 예술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되었다. 찰스 보들레르(Charles Baudelaire)의 시에 나타난 현대 도시의 감각적 충격, 마르셀 프루스트(Marcel Proust)의 소설에 묘사된 시간의 파편화와 불연속성, 그리고 20세기 초 아방가르드 예술 운동에 나타난 전통적 형식의 파괴와 실험은 모두 이러한 근대적 경험의 단절과 소외를 반영한다.


이런 맥락에서, 레트로는 가속화된 시간 속에서 뒤처진 감정이 찾은 휴식처이자 저항의 형식이라고 볼 수 있다. 그것은 빠르게 변화하는 세계 속에서 감정적 지속성과 의미를 찾으려는 시도다. 레트로는 단순한 과거 회귀가 아니라, 가속화된 현재에 대한 감정적, 미학적 대응인 것이다.


이러한 ‘속도의 시대’에서 레트로는 세 가지 중요한 기능을 수행한다.
무엇보다 그것은 시간적 앵커링(temporal anchoring)을 제공한다. 빠르게 변화하는 세계 속에서 비교적 안정적인 참조점을 마련해 주며, 잃어버린 시간적 방향감을 회복시키는 역할을 한다. 이어서 레트로는 감정적 회복(emotional recuperation)의 공간을 열어 준다. 가속화된 현대의 리듬에서 잠시 벗어나 다른 속도로 세계를 경험하게 하면서, 개인이 숨 고르기를 할 수 있는 여유를 선사한다. 마지막으로 레트로는 의미 생성(meaning-making)의 도구가 된다. 흩어진 경험들을 다시 연결하고 개인적 서사를 재구성하게 하여, 삶에 일관성과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따라서 레트로는 단순한 과거 지향이 아니라 ‘속도의 시대’가 던지는 긴장과 단절에 대한 복합적 반응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것은 변화와 속도를 거부하는 대신, 그것들을 다른 방식으로 협상하고 의미화하려는 문화적 전략으로 기능한다.




기억의 저장, 레트로의 출현


레트로의 탄생을 가능하게 한 또 다른 중요한 조건은 기억의 외부화와 저장 기술의 발전이다. 19세기 중반부터 시작된 사진, 축음기, 영화와 같은 기록 미디어의 발달은 인간의 기억 방식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과거의 감각적 경험이 기술적으로 포착되고, 저장되고, 재생될 수 있게 된 것이다.


미디어 이론가 마셜 맥루한(Marshall McLuhan)은 이러한 기술적 혁신이 인간의 감각과 인식을 확장시키는 동시에 변형시킨다고 주장했다. 각 미디어는 특정한 감각을 확장하거나 강조함으로써, 인간의 감각적 균형을 재조정한다. 사진은 시각적 인상을, 축음기는 청각적 경험을, 영화는 움직임의 감각을 포착하고 재생한다. 이런 기술들은 과거의 특정 순간과 감각을 '고정'하고 '반복 가능'하게 만듦으로써, 과거에 대한 새로운 관계를 형성했다.


독일의 미디어 이론가 프리드리히 키틀러(Friedrich Kittler)는 이러한 기록 기술의 발전이 '기억의 외부화(exteriorization of memory)'로 이어졌다고 분석했다. 이전에는 인간의 뇌와 몸, 그리고 구전 전통에 의존하던 기억이 이제는 외부 장치에 저장되고 처리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는 기억의 본질과 작동 방식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프랑스의 철학자 베르나르 스티글레르(Bernard Stiegler)는 이러한 기억의 외부화를 '제3의 기억(tertiary memory)'이라고 불렀다. 제1의 기억이 개인적 경험에 기반한 것이고, 제2의 기억이 문화적으로 전승된 집단 기억이라면, 제3의 기억은 기술적 장치에 의해 매개되고 저장된 기억이다. 스티글레르에 따르면, 이 제3의 기억은 점점 더 우리의 의식과 무의식, 개인적 기억과 집단적 기억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러한 기억의 외부화와 저장은 레트로 문화의 탄생을 위한 필수적인 조건이었다. 왜냐하면 레트로는 과거의 감각적, 미학적 특성을 현재에 재현할 수 있는 능력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사진, 영화, 녹음 기술 없이는 50년대의 패션, 60년대의 음악, 70년대의 인테리어를 정확히 기억하고 재현하는 것이 불가능했을 것이다.


더 나아가, 이러한 저장 기술은 특정 시대의 '감각적 아카이브(sensory archive)'를 구축했다. 흑백 사진, LP 레코드의 특유한 잡음, 8mm 필름의 화질과 같은 미디어 특유의 감각적 특성들은 그 자체로 특정 시대의 아우라를 담고 있다. 이런 미디어의 물질적, 감각적 특성은 레트로 문화에서 중요한 참조점이 된다. 예를 들어, 디지털 사진 앱의 필터가 재현하려는 것은 과거의 대상이 아니라, 그 대상을 담았던 아날로그 미디어의 특유한 감각적 특성이다.


저장 기술의 발전은 또한 '기억의 산업화(industrialization of memory)'를 가능하게 했다. 20세기 중반부터 본격화된 대중문화 산업은 공유된 문화적 기억을 생산하고 유통하는 중요한 메커니즘이 되었다. 텔레비전 쇼, 히트곡, 유행 패션, 광고 캠페인 등은 특정 세대의 집단적 감각 기억을 형성했고, 이는 후에 레트로 문화의 주요 원천이 되었다.


프랑스의 상황주의자 기 드보르(Guy Debord)는 이를 '스펙터클의 사회'라고 불렀다. 그에 따르면, 현대 사회에서 직접적 경험은 점점 더 이미지의 소비로 대체되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레트로는 흥미로운 이중성을 갖는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상품화된 이미지의 재활용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런 이미지화에 저항하는 감각적, 물질적 진정성의 추구이기도 하다.


디지털 시대에 들어서면서, 기억의 저장과 접근은 새로운 차원으로 확장되었다. 인터넷은 거대한 디지털 아카이브로, 과거의 거의 모든 문화적 산물에 즉시 접근할 수 있게 해준다. 유튜브에는 수십 년 전 TV 쇼와 광고가, 스포티파이에는 지난 세기의 모든 음악이, 인터넷 아카이브에는 잊혀진 웹사이트들이 보존되어 있다. 이는 레트로 문화의 풍요로운 원천이 되는 동시에, 그 성격을 변화시킨다.


미디어 이론가 짐 콜린스(Jim Collins)는 이를 '하이퍼매개화된 노스탤지어(hypermediatized nostalgia)'라고 불렀다. 디지털 환경에서 레트로는 더 이상 직접적 경험이나 물리적 아티팩트에 의존하지 않는다. 그것은 미디어를 통해 매개된 기억, 다양한 시간대와 문화적 참조가 중첩된 복잡한 형태로 나타난다. 2000년대의 10대가 80년대 신시팝에 심취하고, K-pop 아이돌이 70년대 디스코 사운드를 샘플링하는 현상은 이런 하이퍼매개화된 노스탤지어의 예다.


이처럼 기억의 저장과 접근 방식의 변화는 레트로 문화의 형성과 발전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초기에는 사진, 영화, 녹음 기술과 같은 아날로그 미디어가, 이후에는 디지털 기술과 인터넷이 레트로 문화의 기술적 기반을 제공했다. 이런 기술적 조건의 변화는 단순히 레트로의 대상과 형식만 바꾼 것이 아니라, 우리가 과거와 맺는 관계의 본질 자체를 변형시켰다.





레트로는 상실의 문화다


레트로 문화의 탄생과 발전을 이해하는 핵심은 '상실'의 경험에 있다. 레트로는 무언가가 지나가고, 사라지고, 회복 불가능해졌다는 인식에 기반한다. 그것은 단순한 향수가 아니라, 상실에 대한 문화적 대응이자 협상이다.


프랑스의 문학 비평가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는 『카메라 루시다』에서 사진의 본질을 '그것은-존재했다(ça-a-été)'라고 정의했다. 사진은 과거의 한 순간을 현재에 붙들어두지만, 동시에 그 순간이 이미 지나갔다는 상실의 증거이기도 하다. 바르트는 이러한 이중성을 '푼크툼(punctum)'이라고 불렀다. 푼크툼은 이미지에서 우리를 찌르는 우연적이고 개인적인 디테일로, 종종 시간의 경과와 상실에 대한 날카로운 인식을 수반한다.


레트로 문화는 이러한 상실의 인식에 기반하지만, 그것을 단순히 수동적으로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그것은 상실된 것을 적극적으로 재해석하고, 새로운 맥락에서 의미를 부여하는 창조적 과정이다. 독일의 문화학자 스베틀라나 보임(Svetlana Boym)은 이를 '반성적 노스탤지어(reflective nostalgia)'라고 불렀다. 이는 과거의 완벽한 복원을 꿈꾸는 '회복적 노스탤지어(restorative nostalgia)'와 달리, 상실과 불완전함을 인정하면서도 그 안에서 창조적 가능성을 찾는 태도다.


상실의 경험은 특히 급격한 사회적, 기술적 변화의 시기에 강화된다. 20세기의 주요 레트로 물결들은 종종 이러한 전환점들과 연관되어 있다. 예를 들어, 1950년대 미국의 복고 열풍은 2차 세계대전 이후의 급격한 사회 변화와 관련이 있으며, 1970년대 영국의 노스탤지어 붐은 후기 산업사회로의 이행기에 나타났다. 1990년대 이후 전 세계적으로 확산된 레트로 현상은 디지털 혁명과 세계화의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이런 전환기에 사람들이 경험하는 상실은 단순히 특정 물건이나 장소의 상실이 아니라, 더 근본적인 '존재 방식(ways of being)'의 상실이다. 철학자 마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는 이를 '세계-내-존재(Being-in-the-world)'의 변화라고 표현했다. 기술적, 사회적 변화는 우리가 세계와 관계 맺는 근본적인 방식을 변형시킨다. 예를 들어, 스마트폰의 등장은 단순히 새로운 기기의 추가가 아니라, 시간, 공간, 타인과의 관계, 정보 접근 방식 등에 대한 전면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이러한 존재론적 상실 앞에서, 레트로는 일종의 '감각적 추모(sensory mourning)'의 형태로 나타난다. 그것은 사라진 세계에 대한 단순한 그리움이 아니라, 그 세계와 관련된 감각적, 정서적 경험을 보존하고 재해석하려는 시도다. 예를 들어, 비닐 레코드의 부활은 단순히 음질에 대한 것이 아니라, 음악을 듣는 행위의 물질성, 의례성, 촉각성을 회복하려는 시도로 볼 수 있다.


상실의 문화로서 레트로는 또한 '기억의 정치학(politics of memory)'과 관련된다. 어떤 과거가 기억되고, 어떤 과거가 망각되는지는 결코 중립적인 과정이 아니다. 특정 집단과 경험이 주류 레트로 문화에서 더 가시적인 반면, 다른 이들의 경험은 주변화되거나 삭제된다. 예를 들어, 미국의 50년대 노스탤지어는 종종 백인 중산층의 경험을 중심으로 구성되며, 같은 시대 인종적 소수자들의 경험은 간과된다.


이런 맥락에서, 레트로는 때로 대항기억(counter-memory)의 공간이 되기도 한다. 주변화된 집단들은 자신들의 역사와 문화적 유산을 복원하고 재평가하기 위해 레트로적 실천을 활용한다. 예를 들어,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의 소울과 펑크 문화 재해석, 퀴어 커뮤니티의 디스코 재전유, 여성주의적 관점에서의 50년대 가정성(domesticity) 재해석 등이 그 예다.


상실의 문화로서 레트ро의 또 다른 중요한 측면은 '감정 노동(emotional labor)'이다. 사회학자 아리 혹실드(Arlie Hochschild)가 발전시킨 이 개념은, 자신의 감정을 특정 방식으로 관리하고 표현하는 노동을 가리킨다. 현대 사회, 특히 서비스 경제에서 감정 노동의 중요성이 증가하면서, 많은 이들이 감정적 소진과 불안을 경험한다. 이런 맥락에서 레트로는 감정적 자율성과 진정성을 회복하는 공간이 될 수 있다.


레트로가 상실의 문화라는 것은, 그것이 단순히 과거를 미화하거나 현실을 도피하는 반동적 현상이 아니라는 의미다. 그것은 현대성이 초래한 감각적, 감정적, 존재론적 상실에 대한 복합적 대응이다. 레트로는 상실을 인정하면서도, 그 안에서 새로운 의미와 가치를 발견하려는 시도다. 그것은 과거에 대한 그리움이 아니라, 현재와 과거, 그리고 미래 사이의 창조적 대화인 것이다.




레트로의 역사적 주기와 발전


레트로 문화는 단일한 현상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다양한 형태와 주기를 보이며 발전해왔다. 그것은 특정 사회적, 기술적, 문화적 맥락에 따라 다른 모습으로 나타났고, 시간이 흐르면서 그 성격과 기능도 변화했다. 이 절에서는 레트로 문화의 역사적 발전 과정과 주요 물결들을 살펴본다.


레트로의 초기 형태는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유럽과 미국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이 시기는 급격한 산업화와 도시화로 인해 전통적 생활양식이 빠르게 사라지던 때였다. '예술과 공예 운동(Arts and Crafts Movement)'이나 '미학주의 운동(Aesthetic Movement)'과 같은 문화적 흐름은 산업화 이전 시대의 수공예와 자연적 형태를 이상화했다. 이는 완전한 레트로라기보다는 그 전조적 현상으로 볼 수 있다.


현대적 의미의 레트로 문화가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20세기 중반 이후다. 문화 역사학자 사이먼 레이놀즈(Simon Reynolds)는 1950년대 미국에서 나타난 '그리저(greaser)' 하위문화를 초기 레트로의 주요 사례로 꼽는다. 그들은 1930-40년대의 로큰롤 음악, 패션, 자동차 문화를 차용하며, 전후 소비주의 사회에 대한 반항적 태도를 표현했다. 이는 레트로가 단순한 향수가 아니라, 현재에 대한 비판적 입장을 취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1970년대는 레트로 문화의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오일쇼크와 경제 침체, 냉전의 긴장, 환경 위기와 같은 사회적 불안 속에서, 많은 이들이 전후 호황기인 1950년대에 대한 노스탤지어를 발전시켰다. 영화 '그리스(Grease)'와 '아메리칸 그래피티(American Graffiti)', TV 시리즈 '해피 데이즈(Happy Days)'는 50년대에 대한 이상화된 이미지를 대중화했다. 이 시기의 레트로는 특히 미국의 중산층 청소년 문화에 초점을 맞추었고, 정치적, 사회적 갈등은 주변화되는 경향이 있었다.


1980년대는 '포스트모던' 레트로의 시대였다. 이 시기의 레트로는 이전보다 더 자의식적이고 절충적이었다. 과거의 스타일이나 감성을 직접 재현하기보다는, 다양한 시대와 장르의 요소들을 혼합하고 재구성했다. 영화 '블레이드 러너(Blade Runner)'나 '블루 벨벳(Blue Velvet)', 뉴웨이브 음악과 같은 문화적 산물들은 여러 시대의 미학적 요소를 중첩시키는 복잡한 레트로 감성을 보여주었다. 이 시기에 레트로는 단순한 노스탤지어를 넘어, 아이러니와 자기참조성이 강한 미학적 전략으로 발전했다.


1990년대부터 2000년대 초반은 '올드스쿨(old school)' 레트로의 시대였다. 디지털 기술의 급속한 확산 속에서, 아날로그 미디어와 기술에 대한 새로운 관심이 생겨났다. 비닐 레코드, 필름 카메라, 빈티지 게임 콘솔과 같은 아날로그 미디어가 재평가되었고, 특히 하위문화 씬에서 인기를 얻었다. 이 시기의 레트로는 종종 디지털 매개의 '비물질성(immateriality)'에 대항하는, 물질적 진정성의 추구로 나타났다.


2010년대 이후는 ‘디지털 레트로’ 혹은 ‘메타 레트로’의 시대로 규정할 수 있다. 인터넷과 소셜 미디어의 발달로 과거의 문화 자료에 대한 접근이 전례 없이 쉬워지면서, 레트로는 새로운 성격을 띠게 되었다. 무엇보다 레트로의 주기가 가속화되었다. 불과 얼마 전의 1990년대나 2000년대 초반까지도 이미 회고의 대상이 되는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동시에 레트로는 하이퍼텍스트적 양상을 띠게 되었다.


디지털 공간에서는 특정 시대나 장르가 고립되지 않고, 서로 다른 맥락이 겹겹이 얽혀 복잡한 참조망을 이루기 때문이다. 여기에 더해, 알고리즘이 만들어내는 노스탤지어가 등장했다. 플랫폼의 추천 시스템은 개인화된 기억을 재구성하거나 특정한 향수를 증폭시키며, 사용자가 선택하기도 전에 ‘그리움’을 소비하게 만든다.


이러한 역사적 발전 과정을 통해, 레트로 문화는 단순한 과거 지향에서 점점 더 복잡하고 자의식적인 문화적 현상으로 진화해왔다. 그것은 현대성과 과거 사이의 관계, 기술과 감각의 상호작용, 기억의 정치학과 같은 복잡한 문제들을 탐색하는 문화적 플랫폼이 되었다. 레트로는 이제 더 이상 단순한 향수의 표현이 아니라, 현대 문화의 중심적 특징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


결론적으로, 레트로는 전통사회에서는 존재하지 않았던, 근대성의 특수한 산물이다. 그것은 속도의 시대가 초래한 단절감, 기억 저장 기술의 발전, 상실의 경험이라는 조건 속에서 탄생했다. 레트로는 과거에 대한 수동적 그리움이 아니라, 현대성이 초래한 감각적, 정서적 단절을 극복하기 위한 적극적 문화적 전략이다. 그것은 시대에 따라 다른 형태와 기능으로 나타났지만, 항상 현재와 과거 사이의 복잡한 관계를 탐색하는 창조적 공간이었다. 레트로를 이해하는 것은 단순히 한 문화적 유행을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현대인이 시간, 기억, 상실과 맺는 복잡한 관계를 이해하는 중요한 창구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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