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총균쇠 vs 산전민

by NAHDAN

Chapter 1.1

총균쇠 vs 산전민



1997년, 미국의 생물학자 제러드 다이아몬드가 『총, 균, 쇠(Guns, Germs, and Steel)』라는 책을 출간했다. 이 책은 전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퓰리처상까지 받았다. 왜 그랬을까?


다이아몬드는 인류 역사상 가장 큰 수수께끼 하나를 풀어냈기 때문이다. "왜 어떤 민족은 발전하고 어떤 민족은 뒤처졌을까?" 이 질문에 대해 그는 놀라운 답을 제시했다. 그것은 바로 총기라는 압도적 무력, 전염병에 대한 면역력이라는 생물학적 우위, 그리고 철기라는 기술적 혁신이 만들어낸 문명적 격차였다.




다이아몬드 이론의 핵심과 한계


다이아몬드에 따르면, 유럽인들이 아메리카 대륙을 정복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더 똑똑해서가 아니라 지리적으로 유리한 환경에서 총기와 철기를 먼저 개발했고, 가축과 함께 살면서 전염병에 대한 면역력을 키웠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1519년 에르난도 코르테스가 단 600명의 스페인 군대로 수십만 명의 아즈텍 제국을 멸망시킬 수 있었던 배경을 생각해보자. 아즈텍 전사들은 용맹했고 수적으로도 압도적이었지만, 그들의 흑요석 칼과 나무 방패로는 스페인군의 총기와 철제 갑옷을 당해낼 수 없었다. 화약이 터지는 순간 발생하는 폭음과 연기, 그리고 멀리서 날아오는 총알은 아즈텍 전사들에게는 신의 분노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총(Guns)의 우위였다. 유럽은 중국에서 전래된 화약 기술을 받아들여 대포와 총기로 발전시켰고, 이는 기존의 모든 전쟁 방식을 무력화시키는 게임 체인저였다.


Capture_2025_0921_000635.png 멕시코 아즈텍 제국을 정벌하는 스페인 에르난도 코르테스의 군대(출처 :


하지만 무기보다 더 치명적인 것이 있었다. 유럽인들이 가져온 천연두, 홍역, 티푸스 같은 전염병들이었다. 이 보이지 않는 살인자들은 아메리카 원주민 인구의 90%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잉카 제국의 황제 와이나 카팍도 스페인군과 싸우기도 전에 천연두로 죽었고, 제국은 내부 분열로 무너졌다. 반면 유럽인들은 수천 년간 소, 돼지, 닭 같은 가축과 함께 살면서 이런 질병들에 노출되었고, 그 과정에서 면역력을 키워왔다. 이것이 균(Germs)의 위력이었다. 전쟁에서 승부는 칼과 창이 아니라 미생물이 결정한 것이다.


여기에 더해 철기 기술은 문명 자체의 토대를 바꿔놓았다. 철제 농기구는 청동기보다 훨씬 효율적이어서 농업 생산성을 비약적으로 높였고, 이는 잉여 생산물을 만들어냈다. 잉여가 생기면 일부는 농업에서 해방되어 수공업이나 군사에 전념할 수 있게 된다. 철제 무기와 갑옷으로 무장한 군대는 청동기나 석기를 사용하는 상대를 압도했다. 이것이 쇠(Steel)의 혁명이었다. 스페인 정복자들의 철제 검과 갑옷 앞에서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나무 방패와 돌 무기는 장난감에 불과했다.


이런 관점은 당시로서는 혁신적이었다. 기존의 역사학이 '영웅'이나 '민족성' 같은 추상적이고 자의적인 개념으로 역사를 설명했다면, 다이아몬드는 환경결정론(Environmental Determinism)라는 과학적이고 실증적인 접근으로 문명의 차이를 분석한 것이다. 콜럼버스가 위대해서 신대륙을 발견한 게 아니라, 유럽이 지중해라는 내해를 끼고 있어서 항해술이 발달할 수밖에 없었다는 식으로 설명하는 것이다.


그러나 다이아몬드의 이론에는 치명적인 맹점들이 숨어 있었다. 무엇보다 그의 시각은 서구 중심적 편견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가 설명하고자 한 것은 결국 '왜 유럽이 세계를 지배하게 되었는가?'라는 질문이었다. 유럽이 아메리카, 아프리카, 오세아니아를 정복한 과정을 설명하는 데는 유효할지 모르지만, 중국의 한나라가 2천 년 전에 실크로드를 통해 로마와 교역했던 사실이나, 몽골이 13세기에 유라시아 대륙 전체를 지배했던 현상, 그리고 이슬람 문명이 중세 유럽보다 훨씬 발달했던 역사적 사실들은 제대로 다루지 못한다. 아시아의 복잡하고 역동적인 역사 전개는 그의 단순한 공식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인간의 주체성과 창조력을 과소평가한다는 점이다. 다이아몬드의 논리를 극단적으로 밀고 나가면, 인간은 환경의 피동적 산물에 불과하게 된다. 지리가 좋으면 발전하고 나쁘면 뒤처진다는 식의 기계적 결정론은 인간의 의지와 노력, 그리고 '불리한 조건을 오히려 유리하게 바꾸는 창조적 적응력'를 간과한다. 특히 위기를 기회로 전환시키는 인간의 놀라운 능력, 제약 조건 속에서 오히려 혁신을 만들어내는 역설적 창조력을 설명하지 못한다.


마지막으로 다이아몬드의 이론은 20세기 이후의 급속한 변화들을 전혀 예측하거나 설명하지 못한다는 치명적 한계가 있다. 그의 논리대로라면 자원도 없고 국토도 좁은 일본이 19세기 말 아시아 최초로 근대화에 성공할 리 없고, 한국이 전쟁의 폐허에서 50년 만에 세계 10위권 경제대국이 될 수도 없으며, 싱가포르 같은 도시국가가 동남아시아의 허브가 될 이유도 없다. 21세기 디지털 혁명 시대에 핀란드가 노키아로, 한국이 삼성과 LG로, 대만이 TSMC로 세계를 주도하는 현상도 설명할 수 없다.




아시아의 역설 : 일본과 중국의 사례


다이아몬드 이론의 한계는 아시아 국가들의 사례를 보면 더욱 명확해진다.

일본의 경우를 보자. 지리적으로 일본은 한국보다도 더 불리했다. 섬나라라서 대륙과 단절되어 있었고, 화산이 많아 농업에 적합한 토지도 부족했다. 자원도 거의 없었다. 다이아몬드의 논리대로라면 일본은 영원히 변방의 작은 나라로 남아 있어야 했다.


그런데 19세기 중반 흑선(黑船) 사건 이후 일본은 어떻게 되었는가? 불과 30년 만에 메이지 유신을 통해 근대화에 성공했고, 청일전쟁(1894-1895)과 러일전쟁(1904-1905)에서 승리하며 동아시아의 패권국이 되었다. 1945년 패전 후에도 20년 만에 세계 2위 경제대국으로 부상했다.


이것을 총균쇠로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일본은 총도, 균도, 쇠도 없었다. 오히려 서구로부터 이 모든 것을 받아들여야 했던 입장이었다.


하지만 일본에게는 독특한 능력이 있었다. 모방과 재창조의 천재성이었다. 일본은 6세기 불교 전래부터 시작해서 한자, 유교, 성리학을 받아들이면서도 각각을 일본식으로 변용시켰다. 한자를 받아들여 히라가나와 가타카나를 만들어냈고, 중국의 율령제를 도입하면서도 천황제라는 독특한 정치 체제를 유지했다.


더 중요한 것은 섬나라라는 지리적 제약이 오히려 창조적 몰입의 조건이 되었다는 점이다.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안전한 환경에서 일본인들은 내재적 완성도를 추구하는 문화를 발달시켰다. 에도 시대(1603-1868) 260년간의 쇄국정책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바깥세상과의 접촉을 차단한 채 축소지향의 섬세한 창조력을 키워나갔다. 하이쿠의 17음절 안에 우주를 담으려 했고, 작은 정원 안에 자연의 모든 것을 표현하려 했으며, 장인정신을 통해 하나의 기술을 극한까지 발전시켰다. 도자기, 칼, 목공예 등에서 보이는 일본인의 장인정신은 모두 이런 '숨김과 폐쇄의 환경 속에서 나온 창조적 몰입'의 산물이었다.


20세기에 와서도 일본은 이런 특성을 발휘했다. 서구의 기술을 받아들여 소니의 워크맨, 도요타의 자동차, 닌텐도의 게임기로 재탄생시켰다. 모두 '작고 정교한 것'를 추구하는 일본적 미학의 발현이었다.


하지만 21세기 디지털 시대에 와서 일본의 한계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인터넷과 모바일로 대표되는 디지털 혁명은 개방과 연결, 외연적 확장을 전제로 한다. 페이스북, 구글, 아마존, 넷플릭스는 모두 글로벌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성장했다.


그런데 일본은 여전히 내재적 완성도에 머물러 있었다. 일본의 휴대폰은 세계에서 가장 정교했지만 갈라파고스폰이라 불리며 글로벌 시장에서 도태되었다. 소니, 파나소닉, 샤프 등 전자업체들은 애플과 삼성에게 밀렸다. 심지어 일본이 창시한 게임 산업에서도 모바일 게임 시대에는 한국과 중국에게 주도권을 내주고 말았다.

일본의 강점이었던 '축소지향의 섬세함'이 네트워크 시대에는 오히려 약점이 된 것이다. 내부적 완성도는 뛰어나지만 외부와의 연결과 확장에는 서툴렀다. 반면 한국은 처음부터 '연결'과 '확산'을 전제로 문화를 만들어왔기 때문에 디지털 시대에 더 적합했다.


중국의 경우는 더욱 흥미롭고도 안타깝다. 중국은 다이아몬드가 말하는 모든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넓은 대륙, 풍부한 자원, 발달한 농업, 그리고 총과 쇠의 원조국이기도 했다. 화약도 중국에서 발명되었고, 철기 기술도 세계 최고 수준이었다.


더 중요한 것은 사상적 토양의 풍부함이었다. 춘추전국시대(기원전 8~3세기)의 제자백가(諸子百家) 사상은 인류 사상사의 보고였다. 공자의 인(仁), 맹자의 민본주의(民本主義), 노자의 도(道), 장자의 자유정신, 묵자의 겸애(兼愛), 한비자의 법치주의까지... 이들의 사상은 250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 철학적 통찰들이다.


특히 공자와 맹자의 사상은 아시아 전역을 한자문화권, 유교문화권으로 만들어냈다. 한국의 성리학, 일본의 주자학, 베트남의 유교 전통은 모두 중국 사상의 영향이었다. 이는 무력이 아닌 사상과 문화의 힘으로 이룬 소프트파워의 원조였다고 할 수 있다.


19세기 말에도 중국에는 자구적인 근대화 운동들이 일어났다. 태평천국운동(1850-1864)는 기독교 사상과 유교 전통을 결합한 독특한 개혁 운동이었고, 신해혁명(1911)는 아시아 최초의 공화정 수립 운동이었다. 강유위의 변법자강운동, 량치차오의 계몽사상 등도 모두 중국적 전통 위에서 근대화를 모색한 시도들이었다.


그런데 왜 중국은 근대에 와서 서구에 뒤처졌을까? 아편전쟁(1840-1842)에서 영국에게 패하고, 8개국 연합군에게 베이징을 점령당하는 굴욕을 겪어야 했을까?


중국이 여전히 세상의 중심(中華)이라는 오만의 함정에 빠진 것이 첫 번째 이유였다. 역설적이게도 중국은 너무 완벽했기 때문에 변화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중화사상(中華思想)에 빠져 외부 세계를 '오랑캐'로 무시했고, 기존 시스템이 워낙 안정적이어서 혁신의 동력이 부족했다.


하지만 더 치명적인 타격은 20세기에 가해졌다. 1949년 중국 공산당이 집권한 이후, 중국 공산주의는 중국이 수천 년 동안 쌓아온 사상적 전통을 의도적으로 파괴했다. 마르크스-레닌주의라는 서구 이데올로기를 절대 진리로 삼으면서 기존의 모든 전통사상을 '봉건 잔재'로 규정하고 척결 대상으로 삼았다.


특히 1966년부터 1976년까지 10년간 벌어진 문화대혁명은 현대판 분서갱유(焚書坑儒)였다. 홍위병들은 사원을 부수고 고서를 불태웠으며, 지식인들을 '우파'로 몰아 숙청했다. 공자를 '봉건 지주계급의 대변인'으로 규정하고, 유교 경전을 '인민의 아편'으로 매도했다.


2500년간 축적된 중국 사상의 보고가 단 10년 만에 초토화되었다. 중국이 가진 전통과 사상이 모두 파멸된 이후, 중국에는 본질적인 '중국다움'이 사라지고 말았다.


그 자리를 채운 것은 중국제일주의, 중국강성주의, 신중화주의뿐이었다. 과거의 중화사상이 '문명'을 기준으로 한 문화적 우월감이었다면, 현재의 신중화주의는 '힘'을 기준으로 한 패권적 우월감이다.


공자의 '덕으로써 다스리는 정치(德治)', 맹자의 '민이 귀하고 군주는 가볍다(民貴君輕)'는 사상은 사라지고, 오직 '중국몽(中國夢)'이라는 이름의 패권 추구만 남았다. 일대일로(一帶一路) 프로젝트도 과거 실크로드의 문화 교류가 아니라 경제적 종속을 통한 세력 확장에 가깝다.


아이러니하게도 중국 전통사상의 진정한 계승자는 오히려 한국이 되었다. 한국의 성리학은 중국에서는 사라졌지만 조선시대를 거쳐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공자의 인(仁) 사상은 한국의 정(情) 문화로, 맹자의 민본주의는 한국의 민주주의 전통으로 계승되었다.




한국의 역설: 총균쇠 이론으로는 설명 불가능


그렇다면 한국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다이아몬드의 논리를 한반도에 그대로 적용해본다면, 한국은 애초에 성공할 수 없었어야 한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생존 자체도 불가능했어야 한다. 객관적 조건들을 차근차근 살펴보면 이 '불가능한 성공'의 역설이 더욱 명확해진다.


지리적 조건부터 살펴보자. 한반도는 국토의 70%가 산으로 이루어져 있다. 평야는 전체 면적의 22%에 불과하다. 이는 중국의 35%, 일본의 29%보다도 현저히 낮은 수치다. 더 구체적으로 들여다보면, 한국의 경지면적은 국토의 16%에 불과해 세계 평균 37%의 절반에도 못 미친다.


유럽의 대평원이나 미국의 그레이트플레인스, 중국의 화북평원 같은 광활한 농업지대와는 비교 자체가 무의미했다. 한반도에서 가장 큰 평야인 김제평야도 겨우 300㎢ 남짓이다. 이는 독일의 북독일평원(15만㎢)이나 헝가리의 알푈드평원(10만㎢)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규모다.


게다가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반도라는 지형적 특성은 축복이기보다는 저주에 가까웠다. 대륙 세력과 해양 세력이 만나는 지점, 즉 지정학적 화약고가 바로 한반도였다. 중국 대륙에서 밀려오는 육상 세력과 일본 열도에서 건너오는 해상 세력이 충돌하는 각축장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는 지중해를 끼고 있어 해상 교역의 중심이 되었던 베네치아나 제노바, 혹은 발트해와 북해를 연결하는 요충지 역할을 한 함부르크나 암스테르담과는 정반대의 상황이었다. 한반도는 교역의 중심이 아니라 전쟁의 통로였다.


자원 조건은 더욱 절망적이었다. 한국은 석탄, 석유, 철광석, 구리 등 근대 산업에 필수적인 자원이 거의 없다. 현재도 에너지 자급률이 20% 미만이고, 주요 원자재는 거의 전량 수입에 의존하고 있다. 2024년 현재 한국의 원유 수입 의존도는 99.8%, 천연가스는 98.5%에 달한다.


이는 자원 부국인 러시아나 사우디아라비아는 물론이고, 같은 자원빈국인 일본(원유 99.7%, 천연가스 97.2%)과도 비슷한 수준이다. 하지만 일본과 한국의 차이점은 일본은 적어도 에도 시대까지는 자급자족이 가능했던 반면, 한국은 항상 부족했다는 점이다.


반면 다이아몬드가 성공 사례로 든 유럽 국가들의 조건을 보라. 영국은 18-19세기 웨일스와 스코틀랜드의 풍부한 석탄 매장량으로 산업혁명을 주도했다. 독일은 루르 지방의 석탄과 로렌 지방의 철광석으로 철강 산업을 발달시켰다. 네덜란드조차 1960년대 북해 천연가스전을 발견해 에너지 자급을 이뤘다. 심지어 노르웨이는 북해 유전 덕분에 세계 최고 수준의 복지국가가 되었다. 한국과는 차원이 다른 조건들이었다.


지정학적 조건은 한국사 전체를 관통하는 비극의 뿌리였다. 중국, 러시아, 일본이라는 거대한 강대국들 사이에 끼여 있는 한반도는 마치 코끼리들 사이의 새우 같은 존재였다. 고구려 건국 초기부터 중국의 한사군 설치로 시작된 외침의 역사는 거의 2천 년간 지속되었다.


고구려 때는 수나라 문제와 양제가 각각 100만 대군을 이끌고 침입했고, 당나라 태종도 직접 군대를 이끌고 연개소문과 맞섰다. 고려 시대에는 몽골(원)의 침입을 7차례나 받으며 강화도에서 39년간 항전해야 했다. 조선 시대에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1592-1598)으로 전 국토가 초토화되었고, 인구의 3분의 1이 사망하거나 실종되었다. 뒤이은 정묘호란과 정축호란(1627, 1636)으로 중국 청나라에 굴복하며 '삼전도의 굴욕'을 당해야 했다.


근현대에 와서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일제강점(1910-1945) 35년은 민족 정체성 자체를 말살당할 위험에 처했던 시기였고, 해방 후에는 즉시 분단되어 6·25전쟁(1950-1953)이라는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었다. 전쟁 후에도 냉전의 최전선에서 분단 체제가 고착화되었다.


한국사에서 진정으로 평화로웠던 시기를 꼽아보면 오히려 예외적이었다. 통일신라 후기 약 200년, 고려 전기 약 200년, 조선 전기 약 200년, 그리고 현재의 70년 정도가 전부다. 유럽사에서 30년 전쟁(1618-1648)이나 나폴레옹 전쟁(1803-1815) 정도가 큰 전쟁으로 기록되고, 그 사이사이에는 상당한 평화기가 있었던 것과 비교하면, 한반도는 거의 '영원한 전쟁의 땅'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기술적 조건을 자세히 살펴보면 다이아몬드가 말하는 '총균쇠'는 모두 부족했거나 제대로 활용되지 못했다.

총기 기술의 경우를 보자. 조선은 세종 때 최무선의 화약 기술을 바탕으로 총통과 화포를 개발했다. 진천뢰, 비격진천뢰 같은 폭탄까지 만들어 왜구를 효과적으로 격퇴하기도 했다. 임진왜란 때는 조총의 위력을 직접 경험했고, 전쟁 후에는 조총 제작 기술을 완전히 습득했다.


하지만 성리학적 이념에 따라 '무력보다는 문치(文治)'를 중시하는 정책을 일관되게 펼쳤다. '군자는 활을 쏘되 짐승을 죽이지 않는다'는 유교적 이념이 군사기술 발전을 가로막았다. 특히 숙종 때는 조총 제조를 아예 금지하는 법령을 내리기도 했다. 기술은 있었지만 사용하지 않겠다는 의도적 선택이었다.


전염병에 대한 면역력도 부족했다. 콜레라, 천연두, 장티푸스, 말라리아 등으로 인한 피해가 컸다. 특히 일제강점기 통계를 보면, 1910년 한반도 인구는 약 1,313만 명이었는데 1945년에는 2,512만 명으로 35년간 약 90% 증가에 그쳤다.


같은 시기 다른 식민지들과 비교해보면 그 차이가 극명하다. 인도는 3억 1,500만 명에서 3억 8,900만 명으로 23% 증가했지만, 이는 영국의 수탈과 기근 때문이었다. 인도네시아는 3,780만 명에서 7,020만 명으로 85% 증가했다. 한국의 상대적으로 낮은 증가율은 질병과 기근, 그리고 일제의 수탈과 강제 징용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철기 기술 역시 독자적 발전이 아니라 중국에서 전래받은 것이었다. 철광석 매장량도 충분하지 않았다. 현재 한국의 철광석 매장량은 약 2억 톤으로 추정되는데, 이는 호주(480억 톤), 브라질(290억 톤), 러시아(250억 톤)는 물론이고 인도(55억 톤), 중국(21억 톤)과도 비교가 되지 않는 수준이다.


그런데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이 모든 불리한 조건들을 뒤엎고 21세기에 와서 한국은 세계 10위권 경제대국이 되었다. 2024년 한국의 명목 GDP는 약 1조 8,100억 달러로 세계 13위, 1인당 GDP는 3만 3,000달러로 G7 국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


이는 1960년 1인당 GDP 79달러에서 무려 400배 이상 성장한 것이다. 같은 기간 일본은 472달러에서 3만 9,000달러로 약 83배, 독일은 1,397달러에서 4만 6,000달러로 약 33배 성장한 것과 비교하면 한국의 성장은 가히 인류 역사상 유례없는 기적이라 할 수 있다.


문화적으로는 더욱 놀라운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2024년 한국 문화 콘텐츠 수출액은 150억 달러를 넘어섰다. 이는 한국 전체 수출액 6,837억 달러의 2.2%에 해당하는 규모로, 반도체(1,308억 달러), 자동차(654억 달러)에 이은 제3의 수출 품목이 되었다.


구체적 수치들을 나열해보면 그 놀라움이 더욱 커진다. 2024년 K-뷰티 수출액은 102억 8천만 달러로 프랑스, 독일에 이어 세계 3위 화장품 수출국 지위에 올랐다. 웹툰 글로벌 시장 규모는 2024년 108억 5천만 달러에서 2030년 483억 달러로 급성장할 전망이다. K-푸드 수출액은 130억 3천만 달러로 사상 최대치를 기록했다.


넷플릭스 통계를 보면 더욱 흥미롭다. 글로벌 톱10에서 한국 콘텐츠가 차지하는 비중이 평균 30%에 달한다. 『오징어 게임』은 출시 28일 만에 1억 1,100만 세대가 시청해 넷플릭스 역사상 최고 기록을 세웠고, 『케이팝 데몬 헌터스』는 52일 만에 1억 8,460만 뷰를 기록하며 애니메이션 부문 1위를 차지했다.


이런 성과는 단순히 경제 지표로만 측정되는 것이 아니다. 문화적 영향력이라는 소프트파워 측면에서 보면 한국은 이미 미국, 영국 다음가는 문화 강국이 되었다. BTS의 UN 총회 연설과 그래미 어워드 후보 지명, 『기생충』의 아카데미상 4관왕, 『미나리』와 『결정사이』의 연이은 성공은 모두 한국 문화의 세계적 위상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들이다.


심지어 언어의 영역까지 확산되고 있다. '대박', '화이팅', '오빠', '언니' 같은 한국어 단어들이 전 세계 젊은이들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사용되고 있다. 옥스퍼드 영어사전에는 '한류(Hallyu)', '김치(Kimchi)', '불고기(Bulgogi)' 등이 정식 등재되었고, 2021년에는 '대박(Daebak)'까지 추가되었다.


다이아몬드 할아버지, 이건 정말 어떻게 설명할 건가요? 총도 없고, 균에도 약하고, 쇠도 부족했던 나라가 어떻게 21세기 문화 강국이 되었단 말인가? 더 나아가 가상의 K-팝 그룹이 실제 빌보드 차트 1위를 차지하는 상황까지 벌어지고 있다. 이것이 바로 다이아몬드 이론의 근본적 한계를 보여주는 결정적 증거다.




한국사 속 '산전민'의 구체적 사례들


사실 다이아몬드의 이론에는 치명적인 맹점이 있다. 그의 관점은 환경결정론에 지나치게 치우쳐 있어서 인간의 주체성과 창조력을 과소평가한다는 것이다. 특히 '불리한 조건을 오히려 발전의 동력으로 바꾸는 능력', 즉 창조적 역설(Creative Paradox)의 힘을 완전히 간과했다.


한국의 경우가 바로 그 전형적 사례다. 한국인들은 불리한 조건을 장점으로 바꾸는 데 천재적이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불리한 조건 때문에 창조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을 한국사의 구체적 사례들을 통해 '산전민(山戰民)'의 DNA가 어떻게 형성되고 발현되었는지 살펴보자.


- 산(山)의 사례: 지리적 제약이 만든 창조적 적응


고구려의 산성 전략을 먼저 보자. 고구려는 평야가 부족한 대신 험준한 산악지형을 최대한 활용한 독특한 방어 체계를 구축했다. 단순히 성벽을 쌓는 것이 아니라 산의 능선을 따라 성을 쌓고, 계곡을 이용해 물길을 확보하며, 동굴을 파서 식량을 비축하는 통합 방어 시스템을 만들어냈다.


안시성 전투(645년)에서 양만춘이 이끄는 고구려군이 당 태종의 20만 대군을 막아낸 것은 단순한 용맹만으로는 불가능했다. 산성의 지형적 이점을 최대한 활용한 과학적 전술의 결과였다. 높은 곳에서 낮은 곳을 내려다보며 적의 동태를 파악하고, 좁은 길목을 이용해 적의 수적 우위를 무력화시키며, 험준한 지형을 이용해 기습 공격을 반복했다. 이는 평야 지대의 정면 대결을 피하고 산악 게릴라전으로 승부를 건 전략이었다.


조선의 수직적 농업도 마찬가지다. 평야가 부족한 조선은 포기하지 않고 산비탈까지 개간해서 계단식 논밭(다락논)을 만들었다. 경사면을 깎아서 평평하게 만들고, 돌담을 쌓아서 흙이 흘러내리지 않게 하며, 물길을 내서 관개시설을 만드는 입체적 농업을 발달시켰다.


이는 단순히 농지를 늘리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좁은 땅을 최대한 활용하기 위한 집약적 농업 기술이 발달했고, 이는 높은 인구 부양력으로 이어졌다. 조선 후기 인구 밀도는 ㎢당 약 70명으로, 같은 시기 중국(㎢당 40명)이나 일본(㎢당 50명)보다 높았다. 좁은 땅에서 더 많은 사람이 살 수 있는 효율성의 극대화를 이뤄낸 것이다.


현대의 아파트 문화는 이런 DNA의 현대적 발현이다. 좁은 국토에 많은 인구가 살아야 하는 현실적 필요에서 아파트라는 주거 형태가 발달했지만, 이는 단순한 공간 절약을 넘어섰다. 수직 도시라는 새로운 도시 계획 개념을 만들어냈고, 집단 거주 문화를 통해 효율적인 인프라 활용을 가능하게 했다.


한국의 아파트 단지들을 보면 놀라운 통합 시스템을 발견할 수 있다. 상가, 학교, 병원, 공원이 모두 도보 거리에 있고, 지하철역과 연결되어 있으며, 택배와 배달이 최적화되어 있다. 이는 '좁은 공간에서 최대 효율'을 추구한 결과물이다.


- 전(戰)의 사례: 갈등과 위기가 키운 역동성


임진왜란 때의 의병 활동은 한국인의 위기 대응 DNA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다. 정규군이 무너진 절망적 상황에서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자발적으로 일어났다. 이는 단순한 저항이 아니라 새로운 전쟁 방식의 창조였다.


곽재우의 홍의장군은 게릴라 전술의 효시였다. 정면 대결을 피하고 기습과 후퇴를 반복하며, 지형지물을 이용한 비정규전으로 일본군을 괴롭혔다. 조헌의 금산 전투에서는 700명의 의병이 7,000명의 일본군과 맞서 절대 불리한 상황에서도 끝까지 저항했다. 김덕령은 민관 협력 체계를 구축해 의병과 관군의 연합작전을 성공시켰다.


이들의 활동은 단순한 애국심을 넘어서 전술적 혁신이었다. 조선 전기의 정규전 중심 사고를 깨고, 유연한 적응력과 즉흥적 창조력을 보여줬다. 이는 후에 일제강점기 독립군의 게릴라전과 6·25전쟁 때 빨치산 토벌 작전에도 영향을 미쳤다.


일제강점기의 문화 운동은 무력으로 해결할 수 없는 상황에서 다른 차원의 저항을 창조한 사례다. 브나로드 운동은 지식인들이 농촌으로 가서 교육을 통한 계몽을 시도했고, 물산장려운동은 경제적 저항을 통해 자립 기반을 마련하려 했다. 한글학회는 언어를 통한 정체성 보존에 집중했다.


특히 주목할 점은 이런 활동들이 네트워크를 형성했다는 것이다. 전국의 지식인, 종교인, 상인들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일제의 감시를 피해가며 지하 저항망을 구축했다. 이는 후에 해방 후 시민사회의 토대가 되었다.

6·25전쟁 후의 재건 의지는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는 한국인의 특성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전 국토가 폐허가 된 상황에서 '다시는 가난하게 살지 않겠다'는 집단적 의지가 생겨났다. 이것이 1960년대 이후 압축 성장의 원동력이 되었다.


중요한 것은 이 재건 의지가 정부 주도가 아니라 민간 주도였다는 점이다. 새마을운동도 처음에는 정부 정책이었지만, 실제로는 마을 단위의 자발적 참여가 핵심이었다. 공장에서 일하는 근로자들, 새벽부터 밤늦게 일하는 상인들, 자식 교육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는 부모들의 개인적 의지가 모여서 국가적 성장을 만들어냈다.


1997년 외환위기 극복은 위기를 기회로 전환시키는 능력의 백미다. 금 모으기 운동으로 상징되는 국민적 단결과 구조조정의 고통을 감내하는 집단적 인내력이 위기를 극복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이 과정에서 한국이 IT 강국으로 도약했다는 점이다.


외환위기로 기존 산업들이 무너지자, 한국은 새로운 산업을 찾아야 했다. 정보통신 기술에 올인했고, 브로드밴드 인프라를 세계 최초로 구축했으며, 온라인 게임과 전자상거래를 선도했다. 위기가 혁신의 촉매가 된 것이다.


- 민(民)의 사례: 백성 주도의 참여와 혁신


훈민정음의 창제(1443년)는 민(民) 중심 사상의 출발점이다. 세종대왕이 한글을 만든 것은 단순히 왕의 업적이 아니라 민중과의 소통을 위한 혁명적 시도였다. "나라말이 중국과 달라 한자로는 서로 통하지 않으니, 어리석은 백성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있어도 제 뜻을 펼치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는 훈민정음 서문은 민중의 소통 욕구에 대한 왕의 응답이었다.


더 중요한 것은 한글의 과학적 원리다. 발음 기관의 모양을 본떠 글자를 만들고, 음성학적 원리에 따라 체계적으로 구성한 것은 세계 문자 역사상 유례가 없는 과학적 창조였다. 이는 실용성과 과학성을 동시에 추구한 한국적 사고의 백미였다.


동학농민운동(1894년)은 민(民)이 주체가 된 최초의 근대적 사회 변혁 운동이었다. "사람이 곧 하늘이다(人乃天)"라는 혁명적 세계관 아래 20만 명의 농민이 봉기했다. 비록 실패했지만, 이는 아시아 최초의 근대적 농민 혁명이었고, 신분제 타파와 외세 배척을 동시에 추구한 민중 주도의 사회 변혁 운동이었다.


동학의 평등사상은 당시로서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급진적이었다. 양반과 상놈의 구별을 부정하고, 남녀평등을 주장하며, 모든 인간의 존엄성을 강조했다. 이는 서구의 시민혁명 사상과 맞먹는 수준이었다.


4·19혁명(1960년)은 학생이 주도한 시민 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을 무너뜨린 사건이다. "피의 화요일"로 불린 4월 19일, 경찰의 무차별 발포에도 불구하고 시민들이 거리로 나온 것은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 때문이었다. 특히 고등학생들이 맨몸으로 탱크 앞에 서는 모습은 전 세계에 충격을 주었다.


4·19의 의미는 민중의 자발성에 있다. 정당이나 정치인이 주도한 것이 아니라, 학생들의 순수한 의분에서 시작된 시위가 전국적 저항으로 확산된 것이다. 이는 민주주의에 대한 본능적 열망이 한국인의 집단 무의식 속에 깊이 뿌리박혀 있음을 보여준다.


6월 항쟁(1987년)은 "호헌철폐 독재타도"를 외치며 전국적으로 벌어진 민주화 시위로 군사정권을 굴복시켰다. 특히 이한열 열사의 죽음이 알려지면서 시민들의 분노가 폭발했고, 결국 6·29선언을 이끌어냈다.


6월 항쟁의 특징은 전 계층의 참여였다. 학생뿐만 아니라 직장인, 주부, 종교인까지 모든 시민이 거리로 나왔다. 특히 명동성당을 중심으로 한 종교계의 참여와 넥타이 부대로 불린 화이트칼라 직장인들의 참여는 이전 시위와는 다른 국민적 연대를 보여줬다.


촛불혁명(2016-2017년)은 디지털 시대 민주주의의 새로운 모델을 제시했다. 박근혜 정권의 국정농단에 분노한 시민들이 매주 광화문에 모였고, 평화로운 시위로 대통령을 탄핵시켰다. 이는 전 세계에 '한국형 민주주의'를 각인시켰다.


촛불집회의 혁신성은 질서 있는 시위 문화에 있었다. 쓰레기 하나 남기지 않고, 폭력 없이, 심지어 축제 분위기로 시위를 진행했다. SNS를 통한 소통과 온라인-오프라인 연계는 새로운 시민 참여 모델을 만들어냈다.


디지털 시대와 산전민의 만남


이제 핵심적인 질문을 해보자. 왜 21세기 디지털 시대에 한국 문화가 세계를 주도하게 되었을까?


그래서 나는 다이아몬드의 '총균쇠'에 대응하는 한국만의 분석 틀로 '산전민(山戰民)'을 제시하고자 한다.


산(山) - 지리적 제약이 만든 창조적 적응력과 압축의 미학

전(戰) - 갈등과 위기가 키운 역동성과 빠른 적응력

민(民) - 백성 주도의 참여와 혁신, 소통과 공감의 문화


이 세 요소는 단순히 한국사를 설명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더 나아가 "왜 21세기 디지털 시대에 한국 문화가 세계를 주도하게 되었는가?"라는 핵심 질문에 명쾌한 답을 준다.


무엇보다 먼저 떠오르는 것은 공간의 극한 압축이다. 스마트폰이라는 5~6인치 화면 안에 모든 정보와 엔터테인먼트가 담겨야 한다. 유튜브 영상은 평균 10분 이내로 짧아졌고, 틱톡은 1분, 인스타그램 릴스는 30초, 쇼츠는 불과 15초로 축소되고 있다. 어텐션 이코노미 시대에는 몇 초 안에 임팩트를 줄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은 좁은 국토에서 최대 효율을 추구해온 한국인들에게 익숙한 환경이다. 조선시대 시조가 3행 45자로 우주의 진리를 담으려 했고, K-팝 뮤직비디오가 3분 안에 드라마 한 편 분량의 서사를 압축했으며, 한국 광고가 15초 CF로 브랜드를 각인시키는 것 역시 같은 DNA에서 나온 것이다. (산)


여기에 더해, 디지털 시대를 규정하는 또 하나의 특징은 변화의 가속화와 무한 경쟁이다. 디지털 세상에서 트렌드는 하루가 다르게 바뀐다. 어제의 인기 영상이 오늘은 잊히고, 조금만 늦어도 도태된다. 알고리즘은 새로운 콘텐츠를 끊임없이 요구하며, 업데이트 주기는 점점 짧아지고 혁신 속도는 가파르게 빨라진다. 그러나 이는 끊임없는 위기 상황 속에서 생존을 체질화해온 한국인들에게 낯설지 않다. 임진왜란 때 게릴라전으로 일본군을 괴롭혔고, 일제강점기에 문화운동으로 저항했으며, 6·25전쟁의 폐허에서 ‘한강의 기적’을 일으켰고, 1997년 외환위기를 IT 혁명의 기회로 바꿔낸 경험이 그 DNA 속에 각인되어 있다. (전)


나아가 디지털 시대를 뒷받침하는 결정적 특징은 참여와 소통의 혁명이다. 디지털 미디어는 더 이상 일방향이 아니다. 유튜브 댓글, 틱톡 듀엣, 인스타그램 라이브는 모두 사용자 참여를 전제로 한다. 소비자는 동시에 생산자가 되고, 실시간 소통과 즉각적 피드백이 콘텐츠의 성패를 좌우한다. 이러한 구조는 ‘민(民)’이 중심이 되어 문화를 빚어온 한국의 전통과 정확히 겹쳐진다. 판소리의 추임새, 강강술래의 집단 참여, 동학농민운동의 민중 주체성, 4·19혁명의 학생 주도성, 촛불혁명의 시민 참여는 모두 같은 DNA에서 비롯된 것이다. 소통과 공감을 통한 집단 창조의 전통이 디지털 플랫폼과 만나, 이제는 전 세계로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민)




총균쇠 vs 산전민: 과거와 미래의 패러다임


결국 한국이 디지털 시대에 성공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5,000년간 '산전민'의 환경에서 살아오면서 자연스럽게 체득한 능력들이 디지털 시대의 핵심 요구사항과 완벽하게 일치했기 때문이다.


총균쇠는 과거를 설명하고, 산전민은 미래를 예측한다.

다이아몬드는 "왜 과거에 서구가 우위에 섰는가?"를 설명했다면, 우리는 "왜 현재와 미래에 한국이 문화적 우위에 서게 되었는가?"를 보여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그리고 이것은 단순한 한국 자랑이 아니다. 전 세계의 많은 나라들이 '불리한 조건'에 처해 있다. 좁은 국토(싱가포르, 대만), 자원 부족(일본, 스위스), 지정학적 위험(이스라엘, 폴란드), 역사적 트라우마(독일, 베트남), 경제적 후진성(베트남, 방글라데시) 등등.


그들에게 한국의 사례는 "불리한 조건도 창조의 원동력이 될 수 있다"는 희망적 메시지를 전해줄 것이다. 제약이 창조를 낳고, 위기가 혁신을 부르며, 참여가 기적을 만든다는 새로운 발전 패러다임을 제시할 것이다.

더 나아가 이것은 '발전'에 대한 근본적 정의를 바꾼다. 다이아몬드식의 발전은 '정복과 지배'였다면, 산전민식의 발전은 '공감과 소통'이다. 한류가 전 세계에 확산되는 것은 무력이나 경제력 때문이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문화적 힘 때문이다. 소프트파워의 새로운 모델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산전민의 세계로 본격적으로 들어가 보자.


좁은 화면 속에서 피어나는 무한한 창조력,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역동적 에너지, 그리고 경계를 넘나드는 소통과 공감의 힘. 이 모든 것이 어떻게 5000년 한국사에서 만들어져 왔는지, 그리고 어떻게 21세기 디지털 혁명의 주역이 되었는지를 함께 탐험해보자. 우리가 발견하게 될 것은 단순한 성공 스토리가 아니라, 인간의 무한한 가능성에 대한 감동적인 증언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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