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균쇠의 오마주, '산전민'을 쓰게된 이유

by NAHDAN

이 책을 쓰게 된 이유


2020년 봄, 코로나19로 세상이 멈춘 것 같던 그때였다.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나는 오랜만에 책장을 뒤적였다. 그리고 먼지가 쌓인 제러드 다이아몬드의 『총, 균, 쇠』를 다시 꺼내들었다. 처음 읽었을 때부터 10여 년이 흘렀지만, 그 책은 여전히 나에게 지적 충격을 안겼다.


다이아몬드는 정말 대단한 일을 해냈다. 인류 문명 1만 3천 년의 역사를 관통하는 거대한 질문 하나를 던졌다. "왜 어떤 민족은 발전하고 어떤 민족은 뒤처졌을까?" 그리고 이 엄청난 질문에 대해 명쾌한 답을 제시했다. 총기라는 군사적 우위, 전염병 면역력이라는 생물학적 조건, 그리고 철기라는 기술적 혁신. 이 세 가지 키워드로 복잡하기 그지없는 세계사의 수수께끼를 풀어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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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감동적이었던 것은 그의 통섭적 사고였다. 지리학, 생물학, 인류학, 역사학, 언어학까지... 온갖 학문의 경계를 넘나들며 하나의 일관된 논리를 만들어낸 것이 경이로웠다. 학문이라는 것이 이렇게 살아있는 것일 수 있구나, 하는 깨달음이었다. 상아탑 안에 갇혀 있는 지식이 아니라, 세상을 설명하고 미래를 조망할 수 있는 실용적 지혜로서의 학문 말이다.


특히 인상 깊었던 것은 다이아몬드가 은유적 증거들을 모아 하나의 큰 그림을 그려낸 방식이었다. 유럽인들이 아메리카를 정복한 것, 중국이 정화의 대함대를 포기한 것,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이 농업을 발달시키지 못한 것... 이 모든 역사적 사실들이 하나의 패턴으로 연결되는 순간의 전율을 지금도 기억한다.






그런데 책을 덮으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럼 한국은?"


다이아몬드의 논리대로라면 한국은 성공할 수 없었어야 한다. 좁은 국토, 부족한 자원, 끊임없는 외침... 모든 조건이 불리했다. 그런데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BTS가 빌보드를 석권하고, 넷플릭스에서 한국 드라마가 전 세계 1위를 차지하며, K-뷰티가 글로벌 스탠다드가 되고 있다.


이것은 단순한 한류 붐이 아니었다. 더 깊은 무언가가 있었다. 생각해보니 지금이야말로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특별한 시기가 아닌가 싶다. 삼국시대도, 통일신라도, 고려도, 조선도, 심지어 해방 후 고도성장기에도 우리는 이렇게 전 세계에 강력한 문화적 영향력을 준 적이 없었다. 물론 과거에도 우리의 문화가 주변국에 전해진 적은 있었다. 백제의 불교가 일본에 전해졌고, 고구려의 고분벽화가 만주 일대에 영향을 미쳤으며, 조선의 성리학이 동아시아 지성사에 기여하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의 상황은 차원이 다르다. 언어도, 종교도, 피부색도 다른 지구 반대편 사람들이 한국어를 배우고, 한국 음식을 먹으며, 한국 화장품을 쓰고 있다. 심지어 한국의 민주주의 경험까지 배우려고 한다. 촛불혁명을 연구하고, 시민사회의 힘을 분석하며, 평화로운 정권교체의 노하우를 묻고 있다.


처음에는 그냥 신기하고 자랑스러웠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이런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이것이 과연 성급한 애국심의 발로는 아닐까? 우리가 너무 들뜬 것은 아닐까?




아직도 한국은 내외적으로 수많은 도전에 직면해 있다. 북핵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고, 중국과 미국 사이에서 줄타기를 해야 하며, 일본과의 역사 갈등도 지속되고 있다. 내부적으로는 양극화가 심화되고, 저출산·고령화가 가속되며, 청년실업이 사회 문제가 되고 있다.


이런 위기와 도전의 시대에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그냥 K-팝의 성공에 도취되어 있을 것인가, 아니면 이 현상의 더 깊은 의미를 탐구해볼 것인가?


나는 후자를 선택했다. 그리고 다이아몬드처럼 우리만의 키워드를 찾고 싶었다. 한국 문화의 기원을 설명할 수 있는, 한국인다움의 본질을 담을 수 있는 그런 키워드 말이다.


오랜 고민 끝에 찾아낸 것이 바로 '산전민(山戰民)'이었다. 산(山)은 우리가 살아온 지리적 조건이다. 좁고 험준한 땅에서 최대한의 효율을 추구해야 했던 우리 조상들의 지혜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한 뼘의 땅도 소중히 여기며, 작은 공간에서 최대의 가치를 창조해내는 압축의 미학이 여기서 나왔다.

전(戰)은 우리가 겪어온 역사적 시련이다. 끊임없는 외침과 내란 속에서도 굴복하지 않았던 우리 민족의 생존력과 적응력이 여기 있다. 위기를 기회로 바꾸고, 절망을 희망으로 전환시키는 역동적 에너지가 여기서 나왔다.

민(民)은 우리 역사의 진짜 주인공들이다. 왕이나 영웅이 아니라 평범한 백성들이 만들어온 문화와 전통이 우리의 진짜 자산이다. 참여하고 소통하며, 함께 만들어가는 공동체 정신이 여기서 나왔다.


이 세 가지가 21세기 디지털 시대에 완벽하게 맞아떨어졌다. 스마트폰이라는 작은 화면 안에서 최대의 임팩트를 내야 하는 시대(산),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트렌드에 빠르게 적응해야 하는 시대(전), 그리고 일방향이 아닌 쌍방향 소통이 중요한 시대(민)에 우리는 이미 준비되어 있었던 것이다.


A_scholarly_book_cover_in_the_style_of_Guns_Germ-1757342499188.png 현대 한국 문화의 기원을 나는 척박한 환경의 '산', 끊임없는 전쟁과 항거 '전', 저항과 참여의 백성주의 '민'으로 본다.




이 책을 쓰는 이유는 마치 '국뽕'에 취해, 한국인임을 자랑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성찰을 위해서다. 우리가 어디서 왔고, 무엇을 가지고 있으며, 어디로 가야 할지를 생각해보고 싶었다. 특히 요즘 젊은 세대들에게 우리 문화의 뿌리를 알려주고 싶었다.


K-팝이 좋고, K-드라마가 재미있고, K-뷰티가 예쁜 것도 좋다. 하지만 그것들이 왜 세계인들의 마음을 사로잡는지, 그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야 단순한 유행이 아닌 지속가능한 문화적 자산으로 발전시킬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지금 우리가 직면한 여러 위기들을 극복하는 데도 이런 역사적 통찰이 도움이 될 것이라고 믿는다. 우리 조상들이 수많은 위기를 어떻게 기회로 바꿔왔는지를 알면, 지금의 어려움도 새로운 도약의 발판으로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이 책은 한국인에게만 의미 있는 것이 아니다. 전 세계 많은 나라들이 불리한 조건 속에서도 발전할 수 있다는 희망의 메시지를 주고 싶었다. 총과 균과 쇠가 없어도, 산과 전과 민이 있으면 충분하다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고 싶었다.


다이아몬드가 과거를 설명했다면, 나는 미래를 예측해보고 싶다. 21세기에는 어떤 나라가, 어떤 문화가 세계를 이끌어갈 것인가? 그 답의 단서를 우리 역사 속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이 책을 쓰게 된 더 직접적인 동기가 있다. 여전히 한국의 위기를 진단하고 한국의 미래를 걱정하는 목소리들이 끊이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이들은 아예 "한국의 미래는 없다"고 단언하기까지 한다. 저출산, 고령화, 양극화, 청년실업... 이런 구조적 문제들을 나열하며 한국 사회의 지속가능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다.


나는 그들의 말을 그대로 수용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들의 표현 이면에 자리한 불안과 염려는 충분히 이해할 것 같다. 급격한 변화의 시대에 미래가 불투명해 보이는 것은 당연하다. 특히 우리 세대는 압축 성장의 후유증을 고스란히 안고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경제적으로는 성공했지만 정신적 여유는 잃어버린 것 같고, 물질적으로는 풍요로워졌지만 관계의 빈곤을 경험하고 있으며, 기술적으로는 앞서갔지만 삶의 의미에 대해서는 더 혼란스러워졌다. 이런 역설적 현실 앞에서 미래를 걱정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그래서 더욱 '현대 한국 문화의 기원: 산전민'을 쓰고 싶어졌다.


지금의 어려움이 처음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우리 조상들도 수없이 많은 위기를 겪었고, 그때마다 절망적인 예측들이 난무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길을 찾아냈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


임진왜란 때도 "조선은 끝났다"고들 했다. 일제강점기에도 "민족의 미래는 없다"고들 했다. 6·25전쟁 후에도 "이 폐허에서 무엇을 할 수 있겠느냐"고들 했다. 하지만 우리는 살아남았을 뿐만 아니라 더 강하게 일어섰다. 그 비밀이 무엇인지 찾고 싶었다.


그리고 한국 문화의 기원과 그 원형질이 우리 한국 사회는 물론, 한국을 사랑하고 한국의 라이프스타일에 관심을 갖는 전 세계 곳곳의 사람들에게도 의미 있는 메시지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세계 각지에서 만나는 한류 팬들을 보면서 느끼는 것이 있다. 그들이 단순히 K-팝의 멜로디나 K-드라마의 스토리에만 빠진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 안에 담긴 어떤 정신, 어떤 가치에 공감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것은 어쩌면 우리가 아프게 보듬어오고, 간절히 외쳐오며, 서로 나누어왔던 희망의 씨앗들이 아닐까. 좁은 땅에서도 함께 살아가는 지혜, 어려운 시절에도 포기하지 않는 의지, 그리고 서로를 존중하고 배려하는 마음. 이런 것들이 21세기 글로벌 공동체가 필요로 하는 가치들과 맞아떨어지는 것은 아닐까.


코로나19 팬데믹을 겪으면서 전 세계가 연대와 협력의 중요성을 절감했다. 기후변화 앞에서 지속가능한 삶의 방식을 고민하게 되었다. 기술의 발달로 인간다운 소통의 가치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이런 시대에 우리가 수천 년간 연마해온 '함께 사는 기술'이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된 것은 아닐까. 그래서 전 세계 사람들이 무의식적으로 한국 문화에 이끌리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이 책의 제목을 '현대 한국 문화의 기원: 산전민'으로 정했다. 기원을 찾는 여행, 그것이 바로 우리가 함께 떠날 탐험이다.


하지만 이것은 과거로의 도피가 아니다. 미래를 위한 준비다. 우리가 어디서 왔는지 알아야 어디로 갈지 결정할 수 있다. 우리의 문화적 DNA를 이해해야 그것을 현재의 도전에 맞게 활용할 수 있다.


스마트폰 속에 숨어 있는 5,000년 역사의 비밀을 함께 풀어보자. 그 과정에서 우리는 한국의 미래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발견하게 될 것이고, 더 나아가 인류의 미래에 대한 희망적인 단서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희망의 씨앗을 나누는 일이라고 믿는다. 절망적인 현실 진단에 맞서는 건설적인 대안, 비관적인 미래 예측에 대응하는 창조적인 비전을 제시하는 것 말이다. 그래야 한국인임을 부정하지 않는 나에게도 희망이 있는 것이니까...


2025.09.0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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