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타주란 다양한 관점에서 탈맥락적으로 무언가를 재구성 재해석함을 뜻한다. 텍스트를 몽타주로 읽는다는 것은 저자가 구성한 방식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 방식대로 재구성하여 읽는 것이다. 평면적 방식을 넘어서 입체적 방식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사건의 몽타주를 그린다는 뜻은 모든 관점을 존중하여 그 관점에서 바라본다는 뜻이다. 모든 가치 체계를 동시에 인정하는 것이다. 비단 사람의 관점만이 아니다. 떨어지는 낙엽을 보았을 때 흙 관점에서도 상황을 느껴보는 것까지도 포함한다.
어떤 사건이 터진 직후에는 여진이 심하다. ‘미네르바의 올빼미는 황혼녘이 되어서야 날갯짓을 시작한다’는 헤겔의 말처럼 사건의 무게가 있을 때 함부로 달려들어서 뭔가를 하려고 하면 안 된다. 불나방처럼 섣불리 돌진하면 안 된다. 사태를 왜곡시킬 가능성이 높다. 시간이 어느 정도 흐른 후 면밀히 분석해 보고 되돌아봐야 한다. 그때까지는 판단 중지가 필요하다. 뿌예진 안개가 어느 정도 걷힐 때까지는 판단중지의 괄호가 필요하다.
진리는 멀리서 오는 서사이다. 객관적 거리가 확보되어야 진리에 다가갈 수 있다. 가까이 있으면 진리는 왜곡되어 보인다. 그러니 어떤 사건이 터지면 판단중지 후 멀리서 그 사건을 보아야 한다. 즉, 서사로 이해해야 한다. 사건을 서사로 이해한다는 것은 사건을 입체적으로 바라봄을 뜻한다. 텍스트를 읽을 때 컨텍스트를 고려하는 것처럼, 사건을 이해할 때 단편적 관점이 아닌 다양한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한다. 사건의 몽타주를 그려야 한다.
애석하게도 현대 사회는 ‘가까운 정보’가 차고 넘친다. ‘가까운 정보’는 멀리서 오는 서사로 이해하려는 시도를 막는다. 가까운 정보를 던져준 후 바로 0과 1의 양자택일 선택을 강요한다. 흑백논리와 같은 단편적인 사고만을 강요하고 사유를 불가능하게 만든다.
0과 1의 사고와 흑백논리로 선택을 강요하는 것, 사유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전체주의’다. 한나 아렌트는 “당신이 살고 있는 사회가 자유로운 사회인지, 아니면 전체주의 사회인지를 알고 싶다면 한 가지 방법이 있다. 당신이 지금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는 느낌이 든다면 당신은 전체주의 사회에 살고 있다.”고 말한다. 0과 1의 흑백논리로 선택을 강요하는 전체주의는 모든 차이를 양극단으로 몰아붙인다.
실제 세상은 0과 1로 나누어떨어지지 않는다. 긍정과 부정으로 명확히 나뉘지 않는다.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일 수 있다. 그러니 방법은 하나다. 시간을 들여 끝없이 사유하고 토론하며 나아가야 한다. 자유란 흑백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규정된 선택으로부터 빠져나오는 것이다. 물론 언젠가 선택의 순간은 반드시 온다. 영원히 논쟁에 빠져있을 수는 없다. 그러나 그 이전에 0과 1의 중간 지대에서 머무를 힘, 입체적으로 사유하는 힘, 몽타주를 그릴 능력이 필요하다.
이런 글을 쓰는 나도 가끔 흑백논리에 빠지기도 한다. 사실 우리 모두는 흑백논리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 않다. 흑백논리에서 벗어나기 위해, 어느 순간 흑백 논리를 취할 수밖에 없는 상황도 생길 수 있다. 어느 순간 이분법으로 행동하고 말하기도 하며 의도치 않게 폭력을 행사하는 경우도 있다. 우리 모두는 가해자이고 피해자이다. 부정할 수 없는 이 사실을 인지한 채로 함께 손을 잡고 나란히 걸어가야 한다.
그러나 ‘이진숙 후보자 검증’, ‘채상병 사건’, ‘사도 광산 사건’, 그리고 ‘대통령 탄핵 청문회’를 보고 있노라니 이런 글을 쓰는 내 자신이 부끄럽다. 아무리 판단 중지하여 멀리서 오는 서사로 바라보려 노력해도 기가 찬다. 무감각의 세계에 빠져 귀를 닫고 권력을 멋대로 휘두르니 국민은 0과 1의 사고를 할 수밖에 없다. 이제는 그들의 무감각한 뻔뻔함이 부럽기도 할 지경이다.
무감각증이 통치하는 자들 밑에서 국민의 신음은 더욱 커질 뿐이다. 더 이상 출구가 없다. 출구가 없다는 명확한 인식 하에서만 희망의 문이 열린다. 출구가 있다고 착각하면 어설픈 시간 낭비만 할 뿐이다. 이제는 출구를 찾는 노력이 아닌 출구를 뚫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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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글을 전남대 철학과 교수 박구용의 생각에서 비롯되었습니다.